#21장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강시완의 입에서, 힘들다, 라니. 현우는 차에 앉아 본가에 들어서는 시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거대한 저택. 지하에서 3층까지 승강기도 있는 내부. 그런 곳에 살게 되면 어려움 같은 건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시완은 태어날 적부터 왕자님이었으니까, 왕자님은 공주님과 잘 먹고 잘살았다는 동화의 결말처럼 언제나 행복할 줄만 알았다. 그런 놈의 입에서 힘들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가 친구일까. 이렇게 치유도 되지 않을 열등감에 똘똘 뭉친 내가 네 친구여도 되는 걸까. 감히 그래도 되는 걸까. 현우는 핸들에 얼굴을 묻었다.

*

“아버지. 저 왔어요.”

회장은 미리 소파에 앉아있었다. 시완이 거실에 들어서자 혜령이 반겼다.

“어 시완아, 어서 와.”

자신이 저질러 놓은 일은 입을 싹 닦고 어서 오라는 말이라니. 그 옆에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한 명 더 와있다.

“부회장님, 오셨습니까.”

지훈이 고개를 숙여 예의 있게 시완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완은 간단한 끄덕임으로 인사를 받고 회장의 오른쪽 소파에 앉았다. 앉자마자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기사 봤다.”

회장의 말이 묵직하게 울렸다.

“어떻게 할 셈이냐.”

회장은 돌려 묻지 않았다. 시완도 돌려 답하지 않았다.

“기자회견도 하고, 검진도 받아서 자료 제출할 예정입니다.”

“흠….”

“유건 화학을 한성에 매각하고 부분 인수합병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고?”

“…네.”

“너 그게 진짜 유건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시완은 회장의 눈을 맞췄다. 혜령과 지훈이 시완의 맞은편에 앉아 둘의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시완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네.”

그리고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듯 입술을 물었다.

“이제 네 기억도 찾았고. 애비보다 너는 더 잘할 거다. 난 그걸 믿어.”

회장은 시완의 성정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다.

“그러니까 남들이 뭐라고 해도, 네가 맞다고 생각한다면….”

회장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밀어붙여.”

“…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회장님?”

혜령이 당황한 듯 회장을 불렀다.

“원래 사람이 길을 가는 데는 개도 짖고, 바람도 불고, 싸움도 나고 하는 법이다. 때로는 맞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보는 게 정답일 때도 있다. 대신….”

회장이 시완을 바라봤다.

“꺾이지만 않으면 된다. 네가.”

“회장님….”

혜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회장은 혜령의 부름에도 흔들림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기사 제보한 사람이 내부에 있다지.”

그 말에 시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혜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혜령이 입을 다물었다.

“당신….”

회장의 눈이 혜령에게 향했다.

“할 말 있는가.”

혜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완도 회장의 말에 놀랐다. 회장님께도 보고가 들어갈 줄은 시완도 몰랐다. 건강상의 이유로 경영일선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던 회장이었다. 회장의 눈빛에 혜령은 말을 잃었다. 그녀의 긴 손톱이 손바닥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때.

“제가 제보했습니다.”

지훈이었다. 혜령이 놀란 눈으로 지훈을 바라봤다.

“박지훈… 부문장?”

회장이 의아한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 이사님은 관여하지 않으신 사안입니다. 제가… 제보했습니다.”

“…이유는?”

회장이 물었다.

“부회장님의 사적인 감정들이… 공적인 사안들을 망칠까 봐. 염려됐습니다.”

“그래서 부회장을 음해하려고 했다?”

그때 혜령이 나섰다.

“회장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음해라뇨. 박지훈 부문장은 그 누구보다 유건을 위해 일해 왔던 사람입니다.”

“당신은 잠자코 있어.”

회장의 말에 혜령은 입을 다물었다. 시완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랐다. 회장은 건조한 기침을 한 번 내뱉었다.

“박지훈 부문장. 이번 일이 선을 넘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나? 이 기사 하나로 유건이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얼마인지 자네가 다 알기나 해?”

“죄송합니다. 죗값은 무겁게 받겠습니다.”

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회장님. 아닙니다. 이규한 이사의 짓이에요.”

혜령은 죽어도 자신이 한 일이라곤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알면서도 왜 막지 않았소?”

회장이 혜령을 향해 되물었다.

“그게….”

혜령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동자만 쉼 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회장은 그런 혜령에게 눈길을 거두고 시완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강시완.”

“…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다. 네 경영 능력에 대한 첫 시험 관문이라고 생각해.”

“네….”

“박지훈 부문장은….”

혜령이 간절한 눈으로 회장을 바라봤다.

“내규에 따라, 강 부회장이 알아서 처리하고.”

“…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런 회장을 혜령이 좇아 일어섰다.

“회장님…!!”

혜령의 간절한 외침에도 회장은 돌아보지 않았다. 혜령이 그런 회장을 끝까지 따라갔다. 두 사람이 남았다. 회장과 혜령이 방으로 사라지고 문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전보다 더 적막한 침묵이 흘렀다. 시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랬습니까?”

기사 제보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주도하지 않았을 거란 것쯤은 시완도 알고 있었다.

“….”

지훈은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처분이든 감내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지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시완은 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시완의 손을 들어줬다. 예상치는 못한 것이었지만, 한시름 놓았다. 다만, 박지훈의 대처가 마음에 걸렸다.

“그럴 놈이 아닌데….”

아무튼 아버지가 자신의 편이 돼준 것은 큰 힘이 될 터였다. 시완은 아버지와 혜령이 사라진 방 쪽을 바라봤다.

*

나를 태운 차가 유유히, 도로를 나아갔다. 차에는 고요한 적막만 흘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단 한 가지 생각에만 매몰돼 있었다. 포기시키자. 해야 할 일은 그거였다. 유건이 먼저 살기를. 강시완이 그것만 생각해주기를. 이제는 그가 그럴 수 있도록 내가 나서서 도와야 한다.

“사모님.”

황 비서가 룸미러로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네?”

“얼굴 좀 푸셔요. 얼굴에 쥐 나겠어요.”

내 얼굴이 그렇게 굳었나.

“하하… 그, 그 정도예요?”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얼굴을 매만졌다.

“그래요. 사모님은 웃는 게 훨씬 예뻐요. 웃는 얼굴이 좋은 일을 불러온다잖아요.”

“…네.”

내 대답을 끝으로 다시 고요함이 맴돌았고, 나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 비친 얼굴엔 웃음기가 다시 사라졌다. 그때 황 비서님이 다시 물었다.

“…걱정이 많으시죠?”

“조금요… 조금.”

대답과는 달리 마음속에는 자꾸 불안이 서서히 짙어졌다. 홀로 시완을 전쟁터에 내보낸 마음이다. 내가 해줄 건 아무것도 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있는 것 같다.

“이겨내실 거예요. 사장님은 강한 분이시잖아요.”

강한 사람…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누구나 상처를 입는다. 강한 건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참는 거다. 피가 가슴에 선연하게 물들어가는 데도 말 한마디 없이 참아내는 그런.

“이제는 저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려고요.”

룸미러로 비치는 황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란 그런 거죠. 한 사람의 일이 곧 내 일이 되는 거.”

“….”

“전 사모님도 잘 해내실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요?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항상 그렇게 해 오셨는걸요?”

황 비서님 특유의 허스키하지만 정겹고 따뜻한 목소리가 차 안에 가득했다. 그의 말대로, 내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그 말에 엷게 웃음으로 답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니 불안감에 쿵쾅대던 마음도 조금은 진정이 되는 기분이었다. 차가 어느덧 한성그룹 본사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을 열고 나서자, 황 비서가 말했다.

“이따가 끝나고 전화하세요. 사모님.”

“아… 그간 일 보실 것 있으면 하셔도 돼요.”

얘기가 조금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혼자 또 걷고 싶어질 수도 있으니까. 황 비서님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요? 일이 오래 걸리실 것 같으세요?”

“…확실하지 않아서요.”

황 비서는 웃으며 고개를 꾸벅했다.

“잘 다녀오세요.”

“네.”

나는 크게 한 번 호흡한 후 차에서 내렸다. 한윤성은 아마 회사에 있겠지. 유건의 규모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한성도 자금난을 겪기 전까진 고속, 유통, 케미컬 분야와 리조트 사업으로 번창했었다. 케미컬 산업이 그나마 호재인 상황인데, 그래서 시완도 거기에 힘을 보태 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산업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워낙 회의적이고, 근본적인 재정난은 언제나 한성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엘리베이터 안. 나는 심호흡을 했다. 시완의 말이 생각났다.

-네가 꿈을 이루는 걸 보는 거. 그게 내 꿈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제 내게도 시완의 꿈이 소중하다. 내 꿈이 오빠의 꿈을 포기하게 해선 안 된다.

“수정이 왔냐.”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았다. 최대한 밝은 목소리였지만 아빠는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다 보셨겠지 기사들.

“아빠.”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빠가 먼저 물었다.

“학교는?”

“오늘 공강이에요.”

“논문 쓰느라 바쁘다면서?”

“…괜찮아요.”

억지로 이어가는 일상적인 대화들.

“우리 딸, 볼살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아빠 서운하게.”

“…아빠.”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왠지 쉽지 않았다.

“뭐 좀 마실래? 때마침 차를 하나 선물 받았는데.”

아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빠.”

그런 아빠를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불러 세웠다.

“차 필요 없어요. 아빠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거예요.”

아빠는 굳은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 막내딸 표정이 심각하네.”

“…기사 보셨죠?”

아빠의 표정도 살짝 굳었다.

“…그래.”

“이제 오빠 기억 문제와 관련해서 한성과의 문제도 수면 위에 드러날 거예요.”

“….”

“시완 오빠가 혼자 우리의 짐까지 떠안는 거, 저 못 봐요.”

“수정아.”

“그 사람이 그럴 의무 없잖아요. 우리 회사고, 우리 문제고.”

“너까지 나서서 혼란하게 하지 마라. 충분히 어른들끼리 얘기된 사안이야.”

“어른들끼리요?”

마음속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

“그래.”

아빠의 딱딱한 목소리.

“그럼….”

주먹 쥔 손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전 언제 어른이 되는데요?”

“…뭐?”

나는 아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물었다. 아빠의 양 눈썹이 떨려올 때쯤.

“벌써 왔냐.”

문 여는 소리와 함께 윤성이 들어섰다. 여기서도 분위기 파악은 하나도 못 하는 인간…! 윤성은 예기치 못한 공기의 느낌에 멈칫했다.

“이게 무슨 분위기람.”

나는 아빠에게 다시 물었다.

“전 언제 어른이 되냐고요. 언제쯤이면 어른 취급을 해주실 거냐고요.”

“뭐?”

“언제까지 세상 물정 모르고 엄마 아빠 품에서 하하 호호 순진한 막내딸로 남겨두실 거예요?”

“수정아.”

조금씩 거칠어지는 말에 윤성도 나를 제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한 번 풀린 입이 조여지지 않았다.

“아빠는 절 언제쯤 성인으로 봐주실 건데요? 저 한 달만 있으면 졸업해요. 근데 아빠는 항상 날 어린애 취급하잖아요. 그게 진짜 절 위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수정이 너….”

아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