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g)
#1장
“악수나 한 번 할까?”
시완이 회색빛의 법원 계단을 내려와 하는 말이라곤 저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놈이 내민 손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그동안의 결혼 생활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결혼 생활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22살의 어린 나이에 타의로 시작된 결혼이었다. 아마도 그에겐 두 집안의 전략적 결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
“굳이 뭘요.”
‘나만 늘 애가 닳았고, 나만 늘 보고 싶어 했지.’
내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기나긴 짝사랑이 결혼으로 보답 받는가 싶었다. 하지만 나의 포지션은 변함없었다. 2년이라는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이라는 작자를 본 것이 다섯 손가락에 꼽는 데다가 부부관계도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유부녀였던 걸까 과부였던 걸까.
“그럼. 잘 지내.”
악수를 청했던 손을 주머니에 쓱 넣고는 그 잘난 강시완은 나를 등지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시완의 쭉 뻗은 다리와 정장이 잘 어울리는 빵빵한 엉덩이와 뒤태를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다시는 뒤태에 집착하나 봐라!’
나는 저 강시완과 결혼이라는 두 글자로 얽힌 그날을 떠올렸다.
‘그래, 그날도 너는 똑같았어.’
*
<청옥정> 한식집
상견례 날. 양쪽 어른들과 식사를 마치고 나온 나는 음식을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속이 매우 더부룩했다. 조심조심, 얌전하게 먹어야 했고, 내 앞에는 ‘그’가 앉아 있었으니까. 청옥정 마루에 걸터앉아 하이힐을 신는데 뒤에서 시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수정.”
내 이름 석 자를 그의 목소리로 오롯이 듣는다는 게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지, 10년의 힘겨웠던 짝사랑이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일어서자 그가 구두를 신고 내 앞에 섰다.
“잘 부탁해.”
시완이 그의 희고 길게 뻗은 손을 내밀었을 때 내 가슴은 주책맞게도 더욱 빠른 속도로 뛰어댔다. 겨우 악수 가지고 제발 나대지 마 심장아! 너 이제 22살이야. 더 이상 중2 소녀가 아니라고. 그때, 내 심장을 짜게 식게 한 시완의 한 마디.
“…2년 동안.”
그래. 정해진 결혼 기간은 2년이었다. 시완의 기업과 우리 집 기업의 주가 상승을 위해 특별 기획된 이벤트. 그게 우리의 결혼이었다.
“아….”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 있었다.
‘2년 동안, 내가 너를 꼬셔 줄게. 너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렇게 다짐했건만, 결혼 생활이 끝날 때까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줄이야.
*
“저 사람, 강시완 맞지?”
정치인, 기업가, 톱 연예인 등 부유층의 자식들만 다니기로 유명했던 명강초, 중, 고등학교에서도 시완의 존재는 대단했다. 재계 서열 3위 내에 드는 유건 전자의 외아들. 그는 유건 전자의 유일한 후계자였고,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외모는 후계자라는 후광을 더욱 빛내줬다.
“수정아, 너 저 오빠랑 친하다고 했지?”
“엉?”
“왜? 너희 집안이랑 엄청 친하잖아.”
“마… 맞아. 우, 우리 오빠랑 절친이라 맨날 집에 놀러 오고 그, 그래….”
“와 진짜 부럽다. 그럼 우리 앞으로 가서 인사드리자!”
“엉?”
‘우리 오빠랑 친한 것도 맞고, 집안끼리 친한 건 맞는데….’
“아 수정아. 나도 시완 오빠한테 인사하고 싶담 말야.”
‘나는 너처럼 수많은 군중들 중 한 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
“알았어.”
나는 자존심 센 열다섯의 어린 마음에 친구 손을 붙들고 시완의 앞으로 갔다. 다짜고짜 두 명의 소녀가 길을 막으니 시선을 아래에 두고 걷던 시완이 멈칫하면서 멈춰 섰다. 그리고 나를 빤히 바라보는 강시완. 내 옆구리를 툭 치는 친구 때문에 나는 억지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 오쁘아…? 안녀엉?”
“…오빠?”
그날의 수치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리고 시완은 고등학교 2학년 때 훌쩍 유학을 떠났더랬다. 철벽을 향한 내 안타까운 짝사랑은 그 이후로도 쭉-진행형이었고.
*
“나도 잘 부탁해요.”
청옥정에서 그가 손을 내밀었던 날, 그를 유혹해버리겠다는 담대한 오기로 나 또한 악수를 받아줬었다. 오랜 짝사랑 끝에, 강시완이라는 남편을 쟁취한 나는 이제 남은 것은 유혹과 행복뿐 인 줄 알았지. 이혼만 남았을 줄이야.
‘너는 못 지내라. 어? 잘 먹고 잘 살지 말라고!’
나는 법원 앞에서 멀어져 가는 시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래, 비밀리에 협의이혼 스케줄 잡느라 황 비서님이 얼마나 고생했어. 참자, 참아.’
참자는 속마음과는 달리 눈에는 눈물이 그득 고여 왔다.
‘이제 나 너 안 좋아할 거야. 강시완. 안 좋아할 거야.’
나는 화장이 번지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두 손으로 눈물을 꾹 찍어냈다.
“나쁜 놈. 인정머리 없는 놈.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네.”
‘두고 봐 강시완. 나, 잘 먹고 잘 살 거야. 그리고 막 살 거야!’
나는 그놈이 걸어간 반대 방향으로 힘차게 걸었다. 24살 이혼녀 한수정의 앞날을 축복하면서.
*
<2개월 후>
“어야! 마시자 마셔!”
자유란 이렇게 좋은 것인 줄 어떻게 모르고 살았지? 나 한수정. 한다면 하는 여자다. 잘 먹고 잘 살고 막 살겠다는 그 다짐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
“야 수정아. 너 아빠가 이런 데 오는 거 아셔?”
“아 유떠나. 우리 아빠가 오또케 아로오. 알면 내가 요기 있께떠? 으이. 우리 유서니 바보야 바보.”
오늘 여기서 마시고 죽는다 야호---!
신촌의 한 헌팅포차 안. 이 한정된 공간 안에서 서로의 짝을 찾겠다는, 뜨거운 밤을 보내보겠다는 창창한 청춘들의 열정과 열기가 나를 들뜨게 했다.
“너! 무! 조타아. 자유! 젊음! 방탕! 쾌락! 유서나 나 지금 너무 행복카다?”
나는 즐겁게 유선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소주잔을 들었다. 소주잔에 찰랑거리는 소주가 잔에서 흘러넘쳤다.
“아 얘 또 시작이야. 또.”
유선은 이런 나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혀를 찼다. 우리 테이블에는 유선이와 나를 타겟으로 앉은 머리를 탈색한 노란 머리 남자와 헐렁한 가죽 잠바를 몸에 걸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반쯤 풀린 눈으로 그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보면서 생각했다.
‘이 애송이 가튼 것들. 누나가 오늘 한 수 가르쳐 줄게!’
그리고 비장하게 외쳤다.
“야…!! 늬들은! 결혼하지 마라.”
이 젊음의 헌팅포차에서 결혼이라는 족쇄 같은 언밸런스한 단어가 등장하자 잠시 당황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노란 머리 남자. 그가 픽-하고 웃으면서 물었다.
“결혼해보셨어요?”
“그럼 임뫄. 누나가 인생 숸배야 숸배.”
나는 선배답게 똑바로 발음을 해보려고 애썼다.
“아이, 아뇨. 결혼은 무슨. 우리 아직 대학생인데 무슨 결혼이에요.”
유선은 술자리가 파투 날까봐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똑바로 앉히려고 노력했다.
“겨론 해봤쮜!!”
하지만 내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또 뭐 해봤는쥐 알와?”
“아유, 얘가 취해 가지고. 취하면 막, 상상해서, 막 헛소리하고 그래요. 상상 결혼. 그치?”
그때, 나도 모르게 테이블을 꽝 하고 내리쳤다. 테이블 위에 있던 소주병과 맥주병, 잔들이 쨍그랑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아 머 해봤눈쥐 아냐구.”
‘혀가 꼬일 대로 꼬여버렸군. 아 머리가 너무 무겁다. 잠시 내려놔야겠어.’
쿵-내 머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테이블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또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호냈어….”
테이블에 앉은 유선과 남자들의 벙찐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걸.
“나 이혼해따고오….”
“하하… 얘가 또 뭐래. 이번엔 상상 이혼!”
유선은 이번엔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을 잡고 싶은지 부단히 노력해댔지만 테이블의 남자들은 서로 눈빛 교환을 하면서 술잔을 비웠다.
“친구분 잘 챙겨주세요.”
남자들이 일어났다.
“아 저기… 저….”
유선은 안타까움에 그들의 뒤꽁무니라도 잡아보려 허공에 손을 저었다. 그리고 침묵. 왁자지껄한 헌팅포차에서 우리 테이블은 외딴 섬 같았다. 철썩철썩 파도가 몰아쳐도 고요-히 바다에 떠 있는.
“야. 한수정.”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분노로 끓어오르는 듯한 유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선은 여전히 엎드려 있는 내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야, 아야.”
“아파? 아파?? 아니 너는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깽판이야. 나 이번엔 혼자 벚꽃 보러 가기 싫다고 했어, 안 했어? 너는 친구가 돼서 그거 하나 못 들어주고 이렇게 초를 치냐 어? 어??”
“흐흐흑… 내가 가 줄게 벚꽃.”
“됐어. 너랑 안가.”
“흐흑… 유서나아….”
“일어나 이것아.”
“나… 보고 싶다….”
“아오 한수정! 왜 이렇게 무거워.”
“보고싶어어. 강쉬완 이 나쁜 새끼. 나쁜 놈!!! 이 재수 없는 호랑말코 같은 떼끼이이!!!”
유선은 테이블에서 나를 일으키려고 애를 썼다. 애써 화장한 눈에서 검은 물이 흘러 내렸다. 나는 분명 다 잊었는데. 이놈의 술이 문제에 문제라서, 내 마음은 기쁜데 눈에선 자꾸 눈물이 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너무 나쁜 놈이야. 근데 왜 자꾸 보고 싶냐.
*
“수정아. 집 들어갔지?”
“끄응….”
나는 침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휴대폰을 귀 위에 올려뒀다. 휴대폰 건너편에서 유선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대로 찾아 들어간 거 맞아? 1702호!”
“우움….”
나는 익숙한 촉감의 침대를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이불 잡혀 이불?”
그리고 유선의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열심히 이불을 잡아댔다. 그러다가.
물컹. 마침 손에 잡히는 그 촉감이 낯설었지만 나에겐 눈을 떠서 확인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불 잡효. 유서나 나 이제 괜찮아아….”
나는 이불에 몸을 둘둘 말아댔다. 그 바람에 휴대폰은 귀에서 스르륵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전화해. 아마 너 제정신 아닐 거다.”
끝까지 걱정스러운 유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 근데 왜 이렇게 이불이 끝까지 안 말리지. 눈을 떠서 내 옆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런데 마치 누가 몸을 어둠 속으로 끌고 깊이깊이 들어가는 것만 같다.
*
“우움….”
따사로운 봄 햇살이 침대를 비췄다. 나는 김밥말이가 된 채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이불 속이 너무 따뜻해서 나가고 싶지 않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느껴지는 침대 위 또 다른 무게감.
‘…옆에 뭐가 있… 어?’
그 생각이 들자마자 술기운이 싹 가셔버렸다.
‘대체 뭐야? 뭔데? 나 어디야?’
나는 곧바로 이불을 확인했다. 이건 우리 집 이불이 맞는데. 여긴 우리 집인데….
나는 이불 말이에서 고개를 서서히 들었다. 내가 돌돌 말아버린 이불 그 반대편에서 새근새근 한 남자가 자고 있었다. 단단하게 잡힌 등 근육. 까만 머리칼. 하얗지만 남자다운 어깨선과 목선. 아직 잠을 자는지 옆으로 돌아누운 남자의 몸이 숨에 따라 살짝 씩 움직였다. 나는 이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순간 숨이 막혔다.
“끄으응….”
남자가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헉…!”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깼어?”
남자가 반쯤 뜬 눈으로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강시완… 네가 왜 여기 있어? 싱긋- 웃고 있는 시완을 보니 저 남자가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남자였나 싶었다.
“뭐… 뭐예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나는 떨리는 마음에 여전히 이불 말이를 꽉 쥐고 시완에게 물었다.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오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시완은 허공에 대고는 번호 키를 누르는 척을 했다. 지금 장난도 치는 거니?
“삑삑삑. 이렇게 번호 누르고 왔는데? 우리 결혼기념일.”
…우리 결혼기념일? 2019년 2월 28일. 그가 무려 결혼기념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시완에겐 그저 의미 없는 숫자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저 남자… 왜 윗옷은 다 벗고 있는 거지? 적당히 하얗고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 좋게 잡혀 있는 시완의 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저… 저기. 자꾸 우리 우리 하는데. 여기 우리 집 아니고 내 집이에요….”
나도 모르게 침을 꼴칵 삼켰다.
“그, 그, 그리고…!! 옷은 좀 입어줄래요? 남의 집에선? 에티케… 켁, 에티켓 몰라요?”
저 남자를 봐온 그 긴 시간 동안, 남편으로 산 2년 동안 저렇게 픽-픽 웃는 모습은 정말 처음 본다. 크고 깊은 눈매를 가진 남자라 고양이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속없이 웃으니까 정말 큰 댕댕이가 따로 없다.
‘정신 차려 한수정. 네가 지금 얼굴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지금 강시완이….’
그때 시완이 이불로 둘둘 쌓인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아 침대에 눕혀버렸다. 시완의 얼굴이 한달음에 가까워져 버렸다.
‘이, 이건 예상 못 한 건데….’
“왜 자꾸 선 그어?”
“…네…?”
선 긋고 살던 게 누군데! 진짜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제 와서 이혼 다 한 마당에 왜 이러냐고! 시완의 나쁜 손이 다리 쪽으로 가더니 슥 이불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스커트를 입은 다리에 시완의 따뜻한 손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만…!’
그의 간질거리는 손길이 다리를 타고 올라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확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따뜻한 입술이 내 목덜미에 닿자 나도 모르게 흣-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미리보기 끝
메뉴
로망띠끄
로그인
검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