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두두두둑.

‘엄마야!’

소율의 손에 들려 있던 수십 장의 가격택이 우수수수 매장 바닥 위로 떨어졌다. 시즌 택 갈이를 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하필이면 시원과 눈이 떡하니 마주쳐 버린 탓이었다.

“…….”

“정소율 씨.”

“…네, 점장님….”

“조심해.”

“…죄송합니다.”

떨어진 택들을 줍기 위해 쪼그려 앉은 소율의 앞에 어느새 다가온 시원도 묵묵히 앉아 택을 집어 들었다. 시원이 쓰는 향수의 부드럽고 시원한 베르가모트 향이 코끝에 닿자 소율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만 같았다. 이건 마치…. 파블로프의… 멍멍이… 같달까.

이렇게 존재만으로도 소율을 긴장시키다 못해 얼어붙게 만들어 버리는 이 남자는 그녀가 일주일 전부터 일하게 된 백화점 남성복 브랜드 ‘fly day’의 점장 차시원이다.

백화점 내 여직원들 사이에서 ‘S’라는 별명을 소지하고 있는 그는 섹시한 피지컬로 새로 론칭된 신상 옷들을 입었다 하면 완판시켜 버리는 것은 기본이요. 스페셜한 외모로 아무 죄도 없는 주위 사람들을 일순간 오징어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를 가진데다, 하늘에 떠 있는 스타와도 같다고 해서 SSS. 줄여서 ‘S’라고 불리고 있었다.

소율은 곁눈질로 시원을 흘끔 훔쳐봤다. 뇌쇄적인 눈빛과 부드럽고 깨끗한 피부. 다부진 눈썹과 남자다운 턱 선은 가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는 이들마다 감탄사를 자아내게 하는 비주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근데 그러면 뭘 해….’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날아드는 그의 비수같이 날카로운 눈빛에 심장이 찔리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것 같은 소율은, 난생처음으로 근무한 지 고작 일주일 만에 심각하게 퇴직을 고려해 보는 중이었다. 분명 잘못한 게 없는데도 그런 눈빛으로 사람을 쏘아보면 아무리 스무 살 때부터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소율이라고 해도 실수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

“소율이는 좋겠다아.”

바로 옆 매장인 ‘톰 블랙’의 막내 하영이 밥을 먹다 말고 두 손을 맞잡고서 말했다.

“왜요?”

“왜긴 왜야, 무려 차 점장님 같은 사람이랑 같은 매장에서 일하잖아. 어떤 기분이야? 차 점장님이 정소율 씨. 하고 부르면?”

“…글쎄요.”

할 말은 많지만 할 수 없는 소율은 주먹을 꼬옥 말아 쥐고서 그저 웃었다. 남의 매장에다 윗사람의 험담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설사, 말한다고 한들 경청하는 귀보단 심미안이 더 발달되어 있을 것 같은 언니들이 소율의 고민에 동감해 줄 리 만무했다.

“어머머, 얘 좀 봐. 글쎄요라니? 나는 차 점장님이 조하영 씨. 하고 부르면 너무 좋아서 기절할 거 같은데!”

황홀한 표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하영을 뒤이어 이번엔 ‘톰 블랙’의 둘째 미주가 말했다.

“복에 겨웠어. 소율이가. 우리 매장에서도 너희 점장님 슈트 속 복근이 보이더라니까? 키는 뭘 먹어서 그렇게 크고 팔뚝은 또 왜 그렇게 단단하다니? 딱, 한번이래도 좋으니까 그 넓은 품에 포옥 안겨봤으면.”

“…….”

소율의 속도 모르는 언니들은 연신 시원을 극찬하며, 여고생들처럼 꺅꺅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하영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미주를 불렀다.

“언니, 우리 맨날 말로만 이러지 말구.”

“응?”

“매니저님한테 오늘 당장 플라이 데이랑 회식하자고 하면 어때요?”

“…어머! 진짜 그럴까? 안 그래도 어제 매니저님이 조만간 우리 회식 하자고 했었잖아.”

“…….”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것처럼 신이 난 두 언니들과 달리, 맞은편에 앉은 소율은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점장님과의 회식이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것 같았다. 싸늘하다 못해 등골이 다 서늘해지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대체 뭘 목구멍 너머로 넘길 수나 있겠냔 말이다. 괜히 비싼 밥 먹고 체할 바에야 참기름에 간장만 넣고 비빈 밥이라도 배부르고 속 편한 게 최고다.

“언니들… 전 오늘 집에 일이 있어서….”

“어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네 환영회 겸 회식인데 주인공이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

소율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불참 의사를 밝히자 두 언니가 도끼눈을 뜨고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언니들은 혹여나 소율이 안 가겠다고 하면 멍석말이를 해서라도 데려가겠다는 확고한 눈빛이었다.

*

“소율아?”

“네…?”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어디 아파?”

멍하니 서서 시원이 단골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니, 진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소율에게 다가왔다.

“아,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럼 잠깐 옥상에 바람이라도 쐬고 와. 계속 서 있으려니까 다리 아프지?”

불행 중 다행으로 플라이 데이의 둘째인 진하는 차가운 시원과 달리 참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얼음 왕자 같은 시원이 항상 냉기를 풀풀 풍기는 에어컨이라고 하면 진하는 따뜻한 온풍기랄까. 구인난에 겨우 구한 금쪽같은 막내가 행여나 힘들세라 언제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소율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지쳐 보일라치면 지금처럼 쉬고 오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어 주는 착한 둘째가 진하였다.

“이번에 신상으로 나온 재킷 100 사이즈로 갖다줘요.”

어느새 단골손님의 바지 기장을 잡은 시원이 마네킹에 걸쳐져 있는 신상 재킷을 가리켰다. 그 옆으로는 단골손님이 픽해서 걸쳐 놓은 옷가지들이 대충 계산해 봐도 300만 원은 훌쩍 넘어 보였다. 그때 마침 또 다른 손님이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플라이 데이입니다.”

“소율아, 잠깐만 손님 좀 봐줘. 내가 창고에 금방 갔다 올게.”

진하가 새 상품을 꺼내려 창고 쪽으로 급하게 뛰어가려는데 그런 그의 팔을 소율이 덥석 붙잡았다.

“아니에요, 오빠 제가 금방 가지고 올게요.”

“어? 아니야 저 창고는 사다리가 좀 위험해서 내가 갔다 올게.”

“이런 건 막내인 제가 할 테니까 오빠는 어서 가보세요.”

“어…그럼 그럴래?”

기특하다는 표정의 진하를 뒤로하고 소율은 냅따 창고로 뛰었다. 그러고는 창고 벽면에 있는 소라색 재킷을 찾아 잽싸게 매장으로 돌아왔다.

“찾으신 재킷 가져왔어요. 입어 보시겠어요?”

“네.”

소율이 꺼내 온 재킷을 걸친 단골손님은 다행히 이 디자인도 퍽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이것도 기장 잡아 주세요.”

“…네!”

매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소율이 한쪽 무릎을 굽혀 팔목에 꽂혀 있는 진주 핀을 손님의 소맷단에 꽂았다.

“…….”

그때, 또다시 저를 냉소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시원과 눈이 떡하니 마주쳤다.

“아얏!”

당황한 나머지 소율은 뾰족한 진주핀으로 제 검지를 찔렀다. 손가락 끝에 금세 새빨간 핏방울이 맺히더니 하필이면 신상 재킷 위로 똑 하고 떨어져 버렸다.

“어! 괜찮아요?”

단골손님의 놀란 목소리에 매장 내의 모든 시선이 일제히 소율을 향했다.

“아, 죄송합니다! 전 괜찮아요. 새 상품으로 다시 가져다드릴게요!”

피맺힌 손가락을 잽싸게 말아쥔 소율이 손님을 향해 냉큼 허리를 숙였다.

“됐어, 내가 갈게.”

“…….”

어느새 시원이 손님과 소율의 사이를 가로막고서 말했다. 순간 스쳐 지나간 그의 싸늘한 눈빛이 소율의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율은 손님을 향해 다시 90도로 꾸벅 인사하고는 무작정 매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같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 가며 직원 전용 화장실까지 내달렸다.

“하아, 하.”

겨우 화장실에 도착한 소율은 제일 안쪽에 있는 칸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앉았다. 그제서야 참았던 울음이 서럽게 터져 나왔다.

“흐윽, 흑.”

‘…자꾸 그렇게 쳐다보니까 긴장돼서 그렇잖아…. 왜 사람을 자꾸 그렇게 노려보냐고….’

이유라도 알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시원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은데 소율은 대체 그 이유가 뭔지, 왜 저토록이나 나를 싫어하는 건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지만….

오랫동안 일했던 편의점을 그만두고 나서 어렵사리 구한 직장이었다. 게다가 방구석 한편에 쌓아 둔 빨간 글씨의 각종 고지서들이 떠올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소율이었다.

*

한참을 울고서 매장으로 돌아가니 벌써 마감을 끝낸 것 같은 진하가 옷과 마네킹 위에 휘장을 쳐놓고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어디, 손가락 좀 보자.”

진하가 소율의 검지를 들어 살폈다. 옷핀에 찔린 자리에는 어느새 까만 점처럼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

눈가는 빨갛게 부은 데다, 풀이 죽은 채로 자책하는 소율을 보며 진하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 퇴근하자.”

“…네.”

진하의 다정함에 그나마 기운을 차린 소율이 사복을 들고 피팅 룸으로 들어섰다. 아침에 입고온 청바지와 흰 티셔츠로 갈아입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는데 어느새 매장을 넘어온 톰 블랙의 두 언니가 들뜬 목소리로 소율을 불러댔다.

“소율아! 준비됐어?”

“얼른 나와. 회식하러 가야지!”

‘아… 회식….’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점장님이 나를 위해서 회식을?’

해줄 리가 없다.

온종일 이 시간만이 오기를 목빠지게 기다렸을 톰 블랙의 두 언니들에겐 무척이나 안타까운 소식이겠지만, 매장에 그가 안 보이는 걸 보면 이미 퇴근을 한 걸지도 몰랐다. 피팅 룸 문을 천천히 열어젖히며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자고 말하려는데.

“…….”

매장 앞에 서서 소율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 우뚝 서 있는 시원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또다시 꽁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

백화점 근처에 위치한 일본 선술집. 노랗고 따뜻한 조명이 잔뜩 달린 창문 너머로 4월의 커다란 벚꽃 나무가 흐드러지게 만개한 분홍 꽃비를 내리고 있었다.

“시원아. 너랑 술자리가 얼마 만이냐 이게. 앞으로 우리 이런 자리 자주자주 좀 갖자. 응?”

톰 블랙의 매니저 최웅이 옆에 앉은 시원의 너른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 말에 아영과 미주가 만개한 벚꽃처럼 화색을 띠었고, 시원은 대답 없이 술을 비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율 씨는 어때? 백화점 처음이라며? 일은 할 만해?”

최웅이 옆집 아저씨같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실은 못 해 먹겠다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소율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네에.’ 하고 대답했다.

“…….”

그 와중에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시는지, 시원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율을 뾰족하게 찔렀다.

“와, 우리 매니저님 소율이만 챙겨 주는 것 좀 봐. 소율이가 그렇게 예쁘면 아예 데리고 가세요! 제가 플라이 데이 막내로 갈 테니까.”

“어? 그럼 나도, 나도.”

하영과 미주가 기회는 이때다! 싶어 하는말에 진하가 격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됐어, 너희가 오긴 어딜 와. 우리 소율이는 그 누구하고도 안 바꿀 거야.”

“…….”

정말이지, 시원을 뚝 떼어놓고 생각해 보면 정말 최고의 직장과 사람들이었다. 더울 땐 시원하게, 추울 땐 따뜻하게 일할 수 있는 데다, 저렴한 비용으로 고퀄리티의 식사를 제공해 주는 직원 식당도 있고. 다정다감한 진하와 매일 웃으며 반겨 주는 언니들이 있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요즘이었다. 비록 시원이 서럽게 하는 게 너무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대신 그만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있으니 여기서 더 욕심부리면 안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