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석환은 어제저녁, 백화점을 찾았었다. 면접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을 소율에게 알리기 위해 또 마침 폐점 시간이라 부리나케 달리는데 저 멀리에서 소율을 차에 태우는 시원이 보였다.

“…….”

비싼 외제 차에 정장 차림으로 소율의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있는 시원은… 언제 봐도 간지가 철철 흐르는, 멋있는 남자 어른 그 자체였다. 석환은 문득 제 모습을 내려다봤다. 주현이랑 피시방을 가기 위해 대충 입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후드티, 양말이 드러나는 슬리퍼….

‘하, 진짜….’

석환은 짜증이 일은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발길을 되돌렸다.

“오, 회사 기둥 뽑아 버린다던 친구가 자네로구만.”

회사로 첫 출근을 하자 사무실 제일 안쪽에 앉아 있던 과장이 석환을 보며 알은체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석환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렁차게 인사하니 사무실 내의 모든 사원들의 이목이 훤칠하고 서글서글한 석환에게로 쏠렸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단발머리에 안경을 낀 혜진이 석환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

지금부터 일주일 전 즈음이었다. 퇴근길에 갑작스럽게 내리는 비를 올려다보는 혜진의 얼굴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쉽게 안 그칠 것 같은데….’

회사 입구에 서서 한참을 기다려 봐도 그칠 생각이 없는 것 같은 하늘을 보며 혜진은 지하철역까지 뛸 요량으로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을 머리에 썼다.

“하나, 둘, 셋.”

셋, 소리와 함께 냅다 앞으로 달려 나가는데 혜진의 머리가 단단한 가슴팍에 쿵 하고 부딪쳤다.

“아야야….”

“괜찮아요?”

생판 모르는 여자가 난데없이 부딪쳐 오는 바람에 적잖이 당황스럽고 화가 났을 텐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오히려 저와 부딪쳐서 나가떨어진 혜진에게 우산을 내밀며 말했다.

“미안해요, 넘어지는 바람에 다 젖었네…”

“아, 아니에요. 저 때문에 부딪친건데….”

“자, 이거 써요.”

“괜찮긴요, 다 젖었는데. 난 어차피 저기서 친구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양하지 말고 받아요.”

과분한 친절에 혜진이 손을 절레절레 내젓는데, 남자는 저쪽에 보이는 카페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우산은 없어도 된다며 한사코 혜진의 손에 우산을 들려 주었다.

“그럼, 조심히 가요. 또 넘어지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카페 쪽으로 뛰어갔다. 혜진의 두 손에는 그가 쥐여 준 빨간 우산이 들려 있었다.

“……!”

저 남자는…. 분명히 그날 봤던 남자가 맞았다. 혜진은 콩콩 심장이 뛰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부터 함께 일하게 된 박석환이라고 합니다.”

‘박석환….’

마음이 따뜻한 그와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

“지향아!”

“연주야!”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했다. 요즘 통 바빴던 탓에 3개월 만에 보는 지향의 제일 친한 친구였다.

“형부가 잘해 주나 보네? 얼굴 폈다 너.”

지향이 연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 말했다. 사랑받는 여자구나 싶게 얼굴에서 빛이 반짝반짝 나고 있었다.

“그래? 음… 우리 오빠가 잘해 주긴 하지. 너는? 그 짝사랑남이랑은 진전이 좀 있었어?”

제일 친한 친구답게 연주는 지향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시원을 좋아하게 됐을 초기 때부터 연주에게 말했으니, 그게 벌써 5년 전이다.

“진전은 뭐….”

“바보야. 너 아직도 고백 안 했지? 기다리기만 하면 어떻게 해. 사랑은 쟁취하는 건데.”

연주의 호기로운 말에 지향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공 매니저님. 우리가 그렇게 사적인 것까지 공유하는 사이였습니까?’

그날의 차가웠던 시원의 얼굴이 떠올라 지향은 가슴이 미어졌다. 정말 연주의 말대로 진즉 고백이나 해볼걸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 끝났어.”

“어?”

“그 남자… 다른 여자 좋아하는 것 같아.”

“…….”

지향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연주가 급하게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 그래. 야. 5년이나 좋아했으면 됐지 뭐. 그렇게까지 좋아했는데 안 이어진 걸 보면 그 사람은 인연이 아닌 거야 그건.”

“그런가….”

“그렇지. 왜 그런 노래도 있잖아.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노래.”

“…….”

연주의 위로가 전혀 먹히지 않는 건지 지향의 표정은 한없이 우울했다.

“됐어. 다 잊어, 응? 언니가 오늘 풀코스로 쏠게.”

연주는 지향의 팔짱을 끼고서 거리로 나갔다. 두 사람은 1차로 네일 숍에 갔다. 역시 기분 전환을 하는 데는 꾸미는 게 최고지. 지향은 팜므 파탈의 붉은 와인색을 골랐고 연주는 파스텔 톤의 알록달록한 색을 골랐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손톱에 예쁘게 광을 낸 두 사람은 2차로 레스토랑을 들러 오리 가슴살 구이와 베이컨 파스타를 먹었다. 레스토랑에서도 디저트가 나왔지만 연주는 지향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SNS상 요즘 뜨는 핫 플레이스인 감미로이로 향했다.

“올해 밸런타인데이 때 여기서 오빠 초콜릿 샀었거든. 근데 너무너무 맛있더라고. 너무 달지도 않고.”

“…그래?”

지향은 가게 앞에 서서 하얀 간판을 올려다봤다.

“그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게, 여기 사장님이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다는 거야.”

*

강원도 산골짜기에 위치한 펜션 마을. 로엘 본점의 남성복 매장 직원들과 아웃도어 직원들이 우르르 관광 버스에서 내렸다. 산골짜기여서 그런지 싱그러운 공기가 폐부를 감쌌다. 바로 옆에서 지저귀는 듯한 새소리도 들렸다.

“우와, 오랜만에 이런 공기 쐬니 너무 좋네요.”

“힐링 되는 기분이야.”

매일같이 커다란 백화점 건물에만 박혀 있던 직원들이 오랜만에 산림욕을 맘껏 누렸다.

“자, 그럼 다들 숙소로 가셔서 짐들을 푸시고, 30분까지 별관 회의실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숙소의 키를 받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304호네.”

소율과 시원, 진하는 지정받은 방으로 가서 키로 문을 열었다.

“…우와.”

실내의 내부에는 로엘 호텔의 스위트룸 못지않게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음, 그럼 소율이 넌 저 방 써. 우리는 이쪽 방 쓸 테니까.”

다이닝 룸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방이 나뉘어 있었는데, 오른쪽은 침실이 하나, 왼쪽에는 침실이 두 개 있었다. 소율은 오른쪽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내려 두고 넓은 테라스 쪽을 내려다봤다. 초여름이라 그런지 벌써부터 초록 잎들이 무성하게도 자라나 있었다.

*

별관 회의실. 사람들은 각 브랜드마다 지정되어 있는 둥그런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미리 와서 테이블에 앉아 있던 태오와 준재가 플라이 데이 식구들을 보며 인사했다. 둥그런 테이블마다 의자가 대여섯 개씩 있었는데 플라이 데이는 자연스럽게 솔리드와 같은 테이블에 명판이 올려져 있었다. 소율의 자리는 왜인지 태오의 옆자리였다. 그리고 시원의 자리는 진하와 준재의 사이.

“…….”

시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올려져 있는 명판에 누구의 손때가 묻었는지 알 것 같은데,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가 장내에 가득 퍼졌다.

“자, 로엘 본점 식구들. 그럼 제15회 한마음 협의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

강단 앞에 선 팀장은 우선적으로 한마음 협의회를 어떻게 잘 운영해 나갈지, 앞으로에 대한 방향성과 포부를 밝히고 있었다. 소율도 귀를 쫑긋거리며 열심히 듣고 있는데, 누가 소율의 어깨를 건들었다.

톡톡.

서포터 우아진이었다.

“소율 씨, 잠깐 시간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그럼 나 좀 잠깐만.”

소율은 아진을 따라 회의장 밖으로 나섰다.

*

“우리 이따 저녁에 바비큐랑 캠프파이어 할 건데, 우리끼리 준비하다 보니까 영 손이 모자라서 말이야. 주니어 사원들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중이거든.”

“아. 네, 뭐든 말씀만 하세요.”

“정말? 역시, 소율 씨 듣던 대로 순진하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아진은 소율을 이끌고 산속 풀숲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산책로 같은 오솔길을 걷다가 점점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이제는 우거진 풀숲밖에 보이질 않았다.

“어…. 이쯤 어디였던 거 같은데.”

아진이 발걸음을 망설였다. 펜션 별채에 바비큐 장비가 있다고 해서 온 건데 별채는 대체 어디 있는 건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아진은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하더니 소율에게 말했다.

“왔다 갔다 하면 다리 아프니까 여기 바위 위에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어느 쪽 방향인지 보고 올게.”

“아, 괜찮아요. 저 다리 별로 안 아픈데 같이 가요.”

아진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소율인데, 그녀는 한사코 괜찮다며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금방 갔다 올게.”

*

“…….”

얼마나 지났을까? 얌전히 바위 위에만 앉아 있던 소율은 점차 조금씩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 안 오시는 거지….”

걱정이 든 소율이 핸드폰을 들었는데 ‘서비스 불가 지역’이라는 문구가 액정 화면 위에 떠 있었다.

“하아… 이를 어쩐다….”

시간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소율은 바위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걸으면 걸을수록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얼마를 걸었는지 발바닥에서는 불이 나고 하늘에도 벌써 울긋불긋한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지면 안 되는데…!’

그래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걷는 것밖에 없어서 소율은 걷고 또 걸었다. 숲속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왔다. 이제는 핸드폰 플래시 없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때, 우지끈.

“꺄악!”

소율은 어두운 탓에 나뭇가지를 잘못 밟아 철퍼덕 넘어졌다. 발목 부근에 아찔한 통증이 일었다. 소율은 상체를 들어 겨우 자세를 잡고 앉았다. 발목은 아프지, 다리는 천근만근이지. 사면이 초가인데, 바람이 불 때마다 숲 안의 나뭇가지들이 부딪치면서 스산한 소리가 났다.

스스스스스.

‘나 이제 어떻게 하지…?’

소율은 무릎을 끌어안아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문득 시원이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점장님….’

“흑, 흐윽….”

기어코 참았던 눈물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흐아앙. 이런 데서 죽기 싫어어. 살려 주세요! 점장님…. 점장니임…!”

흐느끼며 울부짖는데, 저 깊은 숲속에서부터 검은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부스럭.

‘……?’

부스럭. 부스럭.

‘……?’

알 수 없이 다가오는 정체에 두려움을 느낀 소율은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 순간. 구름에 가렸던 달빛이 내리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시원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율을 꼬옥 껴안았다.

“…알았으니까 한 번만 불러.”

“……!”

*

“흐흐흑, 후. 흐흑, 후.”

얼마나 울었을까. 소율은 시원의 포근한 품에서 겨우 울음을 그쳤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건 시원의 흙투성이가 된 트레이닝복 바지와 흰 운동화였다. 시원이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저를 찾아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제 다 울었어?”

시원이 묻자 퉁퉁 부은 얼굴로 소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진 어떻게 온 거야.”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고요….”

“숲속엔 왜 들어왔는데?”

“아까 낮에 우아진 서포터님이 바비큐 장비를 같이 들어 달라고 해서 따라왔는데….”

“우아진 씨가?”

시원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네. 금방 오신다고는 했는데 시간은 자꾸 가지, 핸드폰은 불통이지 제가 바보같이 혼자 길을 찾아보겠다고 돌아다니다가….”

“…….”

“그러다 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왔어요….”

시원의 머릿속에 특색 없이 단조로운 아진의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