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짓을 계속 하자구요?

희주가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후드티를 뒤집어쓴 키 큰 남자 하나가 제 몸집만 한 캐리어를 세워놓고 서성이고 있었다.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하다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을 믿은 게 잘못인 걸까.

그녀는 살짝 겁이 났다.

“누구세요?”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를 메웠다.

그녀의 목소리에 민준이 고개를 돌리자, 센서등이 번쩍 빛을 밝혔다.

사람에게서 후광이 난다는 말을 믿지 않았었는데 공포를 느끼는 와중에도 멋있는 걸 보면 그는 분명 잘난 얼굴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일 것이었다.

미세한 불빛에서도 쌍꺼풀 없는 큰 눈은 빨려들어갈 듯 깊었고 베일 듯 날이 선 콧대와 도톰한 입술의 조화가 눈에 띄었다.

“이 집 비밀번호 그쪽이 바꿨습니까?”

그가 도어록을 가리키며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뭔 놈이 잘생기면 다야.

남의 집 현관 앞에서 시비야.

“네. 제집이니까요. 왜요?”

“하! 미친 김도훈.”

민준이 짧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뱉었다.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이내 흘러나왔다.

“혹시 2층 좀 둘러봐도 됩니까. 이 집 살던 사람인데.”

그녀가 순순히 들어오라는 대답을 건넨 이유는 결코 마주 본 그의 얼굴이 잘생겨서는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김도훈이란 이름은 계약할 당시 보았던 주인의 이름과 같았다.

또한 도망쳐 나온 불량배 같은 모습도 아니었기에 마음이 간 것도 사실이었다.

모든 게 그의 치명적인 얼굴 덕을 보긴 했지만 말이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러니까 처음부터 2층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거야.’

집 계약을 위해 만났던 주인은 복층인 이 집의 1층만 사용하길 원했다. 그녀도 흔쾌히 허락했던 사항이라 잊지 않고 있었다.

“30분 정도면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집으로 들어온 희주는 소파 테이블에 맥주를 올려놓고 2층으로 올라가는 민준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성큼성큼 올라가는 발걸음에 불만이 그득한가 싶더니 곧이어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도훈이 형. 누구 맘대로 집 내놓으래.”

2층을 둘러보더니 열 받은 거겠지.

하긴 이 오피스텔은 2층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끝내주긴 하지.

“나 여기 아니면 갈 곳 없는 거 알잖아.”

사람 마음 심란해지게 왜 갈 곳은 또 없다는 건지 너무 잘 들리는 그의 통화내용에 온 신경이 쏠리는 그녀였다.

목소리는 또 왜 저렇게 살살 녹아.

누가 저 목소리를 남자랑 통화한다고 생각하겠나 싶은 그의 목소리에 저절로 맥주에 손이 갔다.

‘문영민 같은 놈한테 파혼당하고 나니까 외로운 거야, 뭐야. 정신차려, 서희주!’

희주는 자꾸만 민준에게 끌리는 마음에 문단속할 필요를 느꼈다.

영민과 파혼한 지 3달이 지났다.

2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 그가 사소한 이유로 헤어지자 했을 때 어이없긴 했어도 슬프지는 않았다.

그와의 결혼은 그녀가 부모님께 드리는 보상과도 같았다. 딸의 결혼이 고된 그들의 삶에 한 줄기 희망이 되기를 바랐다.

파혼당하고 나니 비로소 그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보란 듯 그보다 훨씬 멋진 남자와 연애를 하겠다 다짐했었지만, 현실은 그녀의 다짐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 외로워서 그렇다 치자.’

그녀가 체념한 듯 다음 맥주로 손을 가져갔을 때 띵동- 현관 벨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저 남자가 혹시 주인이라도 부른 거야?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가 귀찮은 걸음을 옮겼다.

“누구세요?”

-나다.

“네?”

-영민이 엄마라고. 얼른 문 열어!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앙칼진 목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영민 엄마?

그녀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너는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우리가 인사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희주는 입안 가득 맴돈 말을 차마 뱉을 수 없었다.

“아직 이사 중이니?”

미애가 현관에 우두커니 남겨진 캐리어를 쳐다보았다.

민준이 좀 전에 들여다 놓은 가방이었다.

그녀는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말을 돌렸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제가 이사한 건 또 어떻게 아시고.”

“네가 어딜 가든 내가 못 찾아내겠어. 용건만 듣고 싶은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할게.”

희주는 영민을 피해 이사도 하고 약국도 옮겼다.

헤어지고 나서도 술만 마시면 자꾸만 찾아오는 그를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현직 검사장의 부인인 미애가 그녀 하나 찾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이렇게 불쑥 제 앞에 나타나는 건 그나 제 어미나 똑같아 신물이 났다.

“너 왜 자꾸 내 아들 앞길을 막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영민이 이제야 겨우 저랑 비슷한 여자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네가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서 그 애가 찾아다니도록 해야겠냐고.”

“네?”

“안 그래도 마음 여린 우리 아들 사라진 너한테 연민이라도 느끼고 돌아오길 바라는 거 아니니?”

“하…!”

희주는 그녀의 말이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왔다.

뭐가 어쩌고 어쩐다고요?

“얘 웃는 거 봐.”

미애는 정색하며 희주를 쏘아보았다.

영민이 희주를 소개해주던 그 순간부터 미애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변호사인 제 아들을 꼬셔 팔자 한번 펴 보려는 여자 취급을 해대기 일쑤였다.

그녀도 어디 내놓아 무시당하지 않을 약사였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패배자로 낙인찍혔다.

“제가 지금 들은 말이 좀 어이가 없어서요. 저 영민 씨 더는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이사했어요. 약국도 옮겼구요.”

“너 지금 한 말 책임져야 할거야. 한 번만 더 우리 아들 입에서 네 이름 나오는 날엔 그냥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거야. 알겠니?”

“저야말로 바라는 바예요.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 마세요. 영민 씨한테도 결혼 축하한다고 전해주시구요!”

맥주 한 캔의 힘은 생각보다 위대했다.

미애가 오기 전 빈속에 마신 맥주는 머리끝까지 오른 열기 덕분에 온몸을 타고 흘렀다.

영민을 만나며 당했던 그 많은 수모를 갚아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그때처럼 꿀 먹은 벙어리는 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게 어디서 못 배워먹은 티를 내! 어머! 너…. 설마 동거하니?”

희주의 얼굴을 향해 들어 올리던 미애의 팔이 공중에서 딱 멈춰버렸다.

미애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었던 민준이 2층 계단 중간쯤에 서 있었다.

맞다. 저 남자가 있었지.

희주는 하필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을 전부 알아버린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용건 끝나신 거 같은데 이만 가시죠.”

이렇게까지 제 상황에 간섭해주니 더더욱 눈도 마주칠 수 없었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와 미애 앞에 마주 선 그가 무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참나. 영민이를 피해서 이사했다더니…. 그러면 그렇지.”

“여긴 제집이니 이제 함부로 찾아오지 마십시오.”

혀를 끌끌 차며 현관으로 향하는 미애에게 민준이 조용히 으름장을 놓았다.

탁-.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희주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알코올의 힘은 딱 여기까지였다.

한꺼번에 몰려온 불청객으로 인해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편 들어줬는데 맥주 하나 마셔도 됩니까.”

한데 이 남자가 다시금 불을 지폈다.

부탁한 적도 없는 편은 왜 들어줘서 이 사단을 만들었는지 이유나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어요? 이름도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이.”

“강민준입니다. 이제 이름은 아니까 이유를 말하죠.”

무심하게 툭 이름을 뱉은 민준이 맥주 하나를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이 또 뭐라고 맥주가 목으로 넘어가며 내는 소리와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에 희주는 잠시 넋을 놓았다.

“내가 사실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습니다. 없는 사람처럼 지낼 테니까 2층에서 몇 달만 지내면 안 되겠습니까.”

뭐래. 진짜 동거하자는 거야?

한껏 눈이 커진 희주가 잠시 말을 잃었다.

미애와 맞딱들인 상황에 대한 이유 같은 건 그의 말 한 마디에 까맣게 잊어버렸다.

“왜 굳이 여기서 없는 사람처럼 지내시려구요?”

“몇 년 동안 작업실처럼 쓰던 공간이라 익숙해서라면 이유가 되겠습니까.”

민준의 중저음의 목소리는 사람을 귀 기울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희주가 굳이 알지 않아도 될 그의 속사정을 궁금해 할 만큼 말이다.

“그래도 성인인 남녀가 한집에서 산다는 건 좀⋯⋯.”

“기껏해야 3달 정도일 겁니다. 어차피 작업 때문에 또 나가야 해서.”

“제가 그쪽을 알지도 못하는데⋯.”

“여기 주인 불러서 신원 확인시켜 줄게요.”

희주가 꺼림칙한 이유를 대자, 민준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마음을 활짝 열어줄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한참이나 그의 말에 기울어진 상태였다.

내내 말끝을 흐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대답해줘야 하는 건가요?”

그럼에도 시치미를 떼는 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반기를 들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금 마음에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덜컥 남자를 한집에 들이기에 그녀는 나름 이성적이었다.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뭐라도 먹을 시간은 주고 나서 쫓아내시죠.”

“누가 보면 악덕 주인인 줄 알겠네.”

“안주 없이 맥주 마셔서 얼굴 빨개진 것 같은데 뭐 먹을래요? 치킨이라도 시킬까요.”

먹는 걸로 유혹하는 사람은 믿지 말라 했거늘.

희주는 제 뱃속 상태까지 알아맞히는 그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뭐 아무거나 괜찮아요.”

이런.

결국 그와 같이 식사까지 하겠다고 승낙한 꼴이 되었다.

종국엔 그의 뜻대로 2층을 보란 듯 내어주겠지.

익숙한 듯 핸드폰을 들어 치킨을 시킨 그가 희주를 돌아보았다.

“맥주 더 마실래요? 밑에 가서 사 오게.”

희주는 차마 말로 또 한 번 그의 뜻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살짝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현관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 보였다.

멀어지는 그의 발소리가 들리자 희주는 후- 하고 숨을 뱉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오늘따라 제 머리가 멈춘 듯 그만 보면 멍해지기 일쑤였다.

띵동-.

5분이나 지났을까.

들려오는 벨소리에 그녀는 저 남자 슈퍼맨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날아갔다 왔어요?”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열었고, 한 중년 여자의 모습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조금 전 마주친 미애보다 더욱 세련되어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었다.

오늘따라 제 집에 아무나 들이는 관리실에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차오르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