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다시 찾아온 가을

비가 한바탕 쏟아붓더니 공기가 한결 선선해졌다. 여름이 길어 가을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나뭇잎의 색깔이 바뀌고 하늘이 높아지더니 제법 가을 티가 난다. 바람을 견디지 못해 아래로 떨어진 낙엽들은 차곡차곡 쌓여 쓸쓸해지는 가을을 운치 있게 만들었다.

가을을 추억과 낭만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창밖을 내다보던 은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가을은 그다지 추억하고 싶지 않은 계절이다. 할 수만 있다면 영영 지워버리고 싶은 가을.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따라 시간이 흐르면 가을은 언제고 그 자리를 찾아온다. 그때마다 그녀는 힘든 기억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은지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교실 한쪽에 잠들어 있는 아영이에게로 다가갔다. 덮고 있는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 동그란 이마를 손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아이들의 귀가 지도를 하고 돌아온 주임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교실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주임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아영이는 자나 봐요?”

“네.”

“떼 한 번 안 쓰고 잘 지내는 거 보면 정말 대견하고 예뻐요.”

주임 선생님의 칭찬에 은지는 엷은 미소를 보였다.

아영이는 고모인 그녀가 근무하는 유치원에 다닌다. 일찍 출근해야 하는 고모 때문에 아영이도 덩달아 일찍 유치원에 온다. 더불어 저녁엔 하늘이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에 갈 수 있다. 그런 빡빡한 일상은 세 살짜리 아이에겐 분명 힘든 일이다.

아영인 몸집도 작고 앙증맞았으며 애교가 많아 유치원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들에게까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가끔은 시샘이 많은 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지만 아이는 언제나 밝고 명랑했다. 순하고 의젓한 아영이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언제나 웃어 주는 예쁜 아이다.

교직원 회의를 끝내고 교실로 돌아오니 잠에서 깬 아영이가 한쪽 구석에서 홀로 블록 쌓기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혼자 놀고 있는 아영이를 바라보는 은지의 마음은 쓰리고 아팠다.

“아영아.”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영이 고모를 발견하고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모!”

아영이가 활짝 웃으며 뒤뚱뒤뚱 은지에게로 걸어와 품에 폭 안겼다.

“아휴. 우리 아영이 일어나 있었어요?”

“꼬모. 지베 가?”

“응. 이제 집에 가자. 우리 아영이, 졸리지?”

“갠차나. 갠차나.”

작은 손을 활짝 편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고모를 위로했다. 그 마음에 감동받은 은지가 아이를 품으며 뺨에 길게 뽀뽀했다. 아이의 입에서 ‘까르륵’ 숨이 넘어갈 정도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브럭, 브럭.”

맑게 웃던 아영이가 품에서 벗어나려고 꼼지락거리자, 은지는 아이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몸이 자유로워진 아이는 가지고 놀던 블록 더미로 걸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나씩 자루에 넣기 시작했다.

어디서 이런 예쁜 천사가 나타났을까?

은지는 행복한 미소를 띠며 아영이에게로 다가가 함께 블록을 정리했다.

유치원에 남아 있는 선생님들께 일일이 배꼽인사를 한 아영이가 고모의 손을 잡고 유치원을 나섰다. 고맙게도 15분 정도만 걸으면 집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아영이의 입에선 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생기면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는 버릇이 있다.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음정도 맞지 않지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은지를 항상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영아, 노래 그만 불러.”

“시러.”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목 아프잖아.”

“아냐. 안 아파.”

아이는 몸까지 흔들며 싫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다시 노래를 불렀다.

아이의 노랫소리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감상하고 있던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영이의 노랫소리가 애써 감춰두었던 것을 빠르게 치고 지나갔다. 은지는 마치 노래를 막기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아이에게 급히 말을 걸었다.

“아영이 밥 뭐랑 먹고 싶어?”

고모의 손을 흔들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음…….”

심각한 표정까지 지으며 고민하던 아영이가 활짝 웃었다.

“개란마리.”

“계란말이?”

“웅.”

“그것만 있으면 돼?”

“음…….”

다른 걸 더 고르라는 고모의 주문이 어려웠는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아영이가 고민을 시작했다. 예쁜 이마가 구겨진다며 그러지 말라 해도 고민이라는 걸 하게 될 때면 어른보다 더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이였다.

“엄써.”

“없어?”

“응.”

고모에게서 고개를 돌린 아이가 크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계란 사야 하니까 잠깐 슈퍼 들렀다 갈까?”

“응!”

아이에게 슈퍼는 탐나는 것이 가득한 보물섬이었다. 그 보물섬의 보물을 전부 가질 수 없지만 아영이는 유치원과 놀이터 다음으로 슈퍼를 좋아했다. 슈퍼에 잔뜩 쌓여 있는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영이는 즐거워했다.

“아휴, 아영이 왔구나?”

“안녕하세여.”

반갑게 맞아 주는 아주머니에게 아영이가 배꼽인사를 했다.

계란 한 판을 챙긴 은지가 좋아하는 과자 하나를 고르라고 하자 아영이가 폴짝 뛰며 좋아라 손뼉을 쳤다. 과자가 쌓인 곳으로 쪼르륵 달려간 아이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고민이 되는지 과자를 집었다 놓았다 반복했다.

“아영이는 언제 아빠한테 간데?”

아이를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슬쩍 은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오빠가 아직 아이를 데려갈 처지가 안 되어서요.”

“에구. 사정이 어떤지 몰라도 그렇다고 혼자 사는 동생한테 애를 떠맡기는 오빠가 어디 있데? 아무리 동생이 유치원 선생이어도 그렇지, 너무했어. 아니면 오빠가 이리로 이사를 오면 좋잖아. 그 오빠는 동생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도대체 몇 년째야? 애 양육비는 넉넉히 챙겨 주나?”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고 궁금한 것 천지인 아주머니 때문에 은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동네의 모든 소문은 이 아주머니에게서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가 아영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소문이 이미 동네 열두 바퀴를 돌고 돌았다.

그리 크지 않은 동네라 간단한 부식 거리를 살 수 있는 곳이 이 슈퍼뿐이어서 그렇지, 마음 같아서는 절대 들르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은지는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 아이가 과자 하나를 골라 계산대로 왔다. 은지는 얼른 계산을 마치고 슈퍼를 나왔다.

은지의 손을 잡은 아영이가 제 손에 들려 있는 과자 봉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흥얼거렸다. 은지는 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다시 찾아온 세 번째 가을도 아영이와 함께라면 잘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 *

“대표님이 알면 난 죽음이야.”

치수가 운전하는 내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도 모자라 엄살까지 피웠지만 재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우리 그냥 가자.”

“죽는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재훈의 한마디에 치수의 얼굴이 심각하게 구겨졌다.

“대표님한테 죽는 것보다 형한테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치수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성질 나쁜 박재훈이 아니라 박영훈 대표이었다.

“그럼 그냥 지금 죽어.”

“아야!”

재훈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치수가 핸들에 몸을 바짝 붙이고서 재훈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운전 중인데 때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 같이 죽자는 거야?”

치수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재훈은 못 들은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3년 만에 다시 와 보는 동네다. 은지는 아직 있을까?

“은지 누나 이사 갔다니까.”

치수가 그의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시끄러워.”

재훈의 시큰둥한 대꾸에 치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에이! 내 말 못 믿어?”

“그래, 못 믿어.”

재훈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흠칫 놀란 치수는 운전대에 바짝 붙으며 앞 유리창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차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좌석에 늘어져 있던 재훈이 몸을 곧추세웠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몇 채의 집을 지나자 낯익은 슈퍼와 세탁소가 눈에 들어왔다. 재훈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빨간 우체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잠깐, 멈춰!”

재훈의 외침에 차가 급정거를 했다. 조수석의 문이 벌컥 열리고 재훈의 몸이 반쯤 나갔다.

“형! 선글라스!”

운전석에서 치수가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귀찮다는 표정의 재훈이 치수가 건네주는 선글라스를 꼈다.

‘젠장, 저녁에 선글라스 끼는 게 더 웃긴다.’

차에서 내린 재훈은 조금 전 발견한 그 우체통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심장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우체통이지만 그에게는 잊지 못하는 기억 중 하나다.

‘넌 그대로구나.’

시간이 흘러 색깔이 바래긴 했지만 분명 3년 전에 보았던 그 우체통이 맞았다. 재훈은 그 우체통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누구세요?”

재훈은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동그란 단발머리에 안경을 낀 여자가 한 꼬맹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아마도 집주인인 듯 했다.

“뉴구세요?”

아이가 여자의 말을 따라 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한 그가 대답을 못 하고 있는 사이 여자는 불쾌한 표정을 드러내며 쌀쌀맞게 말했다.

“그만 비켜 주시죠.”

여자의 힘에 옆으로 떠밀리면서도 그는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외모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여자가 김은지라는 것을. 재훈은 대문 안으로 사라지려는 그녀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김은지?”

파삭!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봉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은 깨진 계란으로 엉망이 되었다.

“왜 이러세요!”

그녀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화를 냈지만, 재훈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김은지 맞지?”

“사람 잘못 보셨어요.”

“김은지 맞잖아.”

“저리 가!”

두 사람 사이로 아이가 불쑥 끼어들더니 그의 다리에 주먹질을 했다.

“으앙!! 아찌 나빠! 저리 가! 저리 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아이가 놀란 듯 겁을 먹고 울기 시작했다. 당황하기는 재훈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김은지가 맞다면 이 아이는 누굴까? 그녀를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아이의 존재는 그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거기 누구요?”

밖의 소란을 들은 옆집 할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가씨, 괜찮은 거야?”

“아앙!”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마치 도와 달라는 듯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할아버지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잠시 흐트러지자 여자가 한 번 더 그를 밀쳐냈다.

“비켜요!”

“은지야.”

여자가 앙칼지게 항의했지만, 재훈은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경찰을 불러야겠네.”

두 사람의 실랑이를 심각하게 생각한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며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형!”

부리나케 달려온 치수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여자와 떨어뜨렸다. 그가 치수에게 붙들려 있는 사이 여자는 우는 아이를 안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김은지!”

“형! 어서 가자. 경찰 오면 큰일 나!”

“놔! 이 새끼야. 안 놔?”

그가 당장 한 대 칠 기세로 주먹을 휘둘렀지만, 치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지금, 치수는 어떻게 해서든 재훈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여자가 은지라는 것을 확신한 재훈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김은지! 야! 너 왜 모르는 척해! 그런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야! 김은지!”

“형! 그만 좀 해!”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집 안으로 들어온 은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이는 아영이를 꼭 안았다.

“아앙. 꼬모. 아찌 이상해. 어엉.”

“미안……. 고모 때문에 그래. 미안해, 미안해.”

“으앙!”

아영이 매달리며 목 놓아 울자 은지도 아이를 안고 숨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집 앞에 불쑥 나타난 그를 확인한 순간,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경련이라도 난 듯 온몸이 떨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넋이라도 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나타난 것일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는데 왜 온 것일까. 뭐 하러.

“은지 처녀.”

한참 동안 겁에 질려 훌쩍이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이고 있는데 밖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그녀를 도와주었던 옆집 할아버지였다. 은지는 아영이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이미 돌아간 듯 밖은 조용했다.

“괜찮아? 정말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되겠어?”

구부정한 자세로 뒷짐을 진 할아버지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정말 괜찮은 게야?”

할아버지가 작게 훌쩍이는 아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네, 괜찮아요.”

“아는 사람인가 봐?”

은지의 표정을 살피던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가 본데…… 혹시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얘기해. 우리 아들내미 시켜서라도 내쫓아 줄 테니까.”

은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쯧쯧. 이 아까운 계란을 어쩌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계란 봉지를 본 할아버지가 허리를 굽히며 혀를 찼다. 은지는 아영이를 내려놓고 할아버지보다 먼저 봉지를 손에 들었다.

“그래도 아영이한테 해 줄 계란은 남았네요.”

제 이름이 나오자 아영이가 얼른 은지의 다리에 매달렸다. 할아버지는 이상한 일 있으면 언제라도 부르라는 당부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영이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은지는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아이를 씻기고, 먹고 싶다던 계란말이를 해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낮의 일 때문인지 유독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잠들 때까지 품에 안고 계속 토닥였다.

드디어 잠이 들었는지 아이의 낮은 숨소리가 들려오자 은지는 방으로 들어가 아이를 이불에 눕혔다. 옆에 같이 누워 아영이의 가슴을 토닥이던 은지는 아이의 잠든 얼굴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부르던 그의 노래, 리멤버. 아이는 그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집 앞에 서 있던 그의 반듯한 옆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지만 어째서 한 번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남아 버린 그인데 어쩜 그리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단 말인가. 바로 알았다면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도망이라도 갔을 텐데……. 너무도 바보 같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둔함을 탓했다.

또르르. 은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지금까지 참다 지쳐 외면해 버린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때 느꼈던 고통과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떠올라 심장을 옥죄어 왔다.

“아웅.”

그녀의 훌쩍임을 들었는지 아영이가 몸을 뒤척였다.

“자자.”

바로 잠들길 바라며 아이의 가슴을 토닥였지만 아이는 눈을 번쩍 떴다.

“꼬모.”

“코오 자자.”

몸을 토닥이며 자라고 강요했지만 잠에서 깬 아이는 눈을 비비더니 눈물이 가득한 고모를 올려다보았다.

“꼬모. 아찌 맴매해야 대.”

“맴매?”

“웅. 아찌. 아녀이랑 꼬모랑 울려써.”

“훗.”

아영이가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진지하게 말했지만 은지의 입에선 웃음이 흘러나왔다.

“응. 나중에 고모가 보면 왜 우리 아영이 울렸어! 이러면서 맴매할게.”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아이가 환한 얼굴로 웃더니 은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은지가 아이를 꼭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때려 주는 건 둘째 치고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