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루한 일상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출근 준비를 마쳐야 할 시간인데도 승현은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않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

잠시 잠든 승현의 얼굴을 내려다본 승진은 곧장 걸어가 커튼을 젖히고 다시 승현의 침대로 돌아왔다.

“승현아, 한승현.”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무겁게 내려앉은 승현의 눈꺼풀이 위로 떠졌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형의 모습이 보였다.

“왜?”

“왜라니. 몰라서 물어? 출근해야지. 빨리 일어나, 늦었어.”

“몇 신데 그래?”

“6시 30분.”

물어보나 마나였다. 한 번도 자신이 정한 규칙에 어긋난 적이 없는 형이었으니.

“역시 형이군.”

“무슨 소리야?”

“아버지가 있으나 없으나 한결같다는 소리야.”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빨리 일어나기나 해.”

승진이 재촉함에도 불구하고 승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피곤해.”

“뭐?”

“피곤하다고, 그러니 나 30분이라도 더 자게 형 먼저 출근하라고.”

아버지가 없는 동안만이라도 자유롭고 싶었고 자신의 말대로 피곤하기도 했다.

“너, 정말.”

동생의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승진이 승현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빨리 일어나 씻어. 형 늦었어.”

“그러니 먼저 출근하라고 하잖아. 내가 회사 가는 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왜 이래?”

조금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내가 욕실까지 데려다줘?”

“숨 좀 쉬면 안 돼?”

“뭐?”

“숨 좀 쉬면 안 되냐고. 형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또 능력이 출중해서 일이 미친 듯이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거든. 형은 다르다고 생각하지? 내가 보기엔 형도 똑같아. 자신의 틀에 맞추어 사람 숨도 못 쉬게 하는 건 아버지와 똑같다고.”

자신을 올려다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승현에게 승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만 잠시 동생을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출근 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는 것, 알지?”

지키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승현은 일단은 알았다고 대답을 했다. 승현이 다시 침대에 눕자 승진은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알람시계를 들어 시간을 7시로 맞추어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승현은 역시나 형이다 싶어 피식 웃었다.

7시 50분.

평소라면 벌써 회사에 출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자식들이 게으른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인 아버지가 있었다면 이 시간에 출근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런던 지사에 출장을 가 있었고 모든 것이 못마땅한 자신이 지금에서야 집을 나선다는 걸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두터운 신망의 대상인 형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형인 승진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 지금쯤 임원급 회의를 하고 있을 것이다.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한 번도 저버리지 않았고 총애를 받은 그답게 회의실에 모인 다른 임원들의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을 서슴지 않을 것임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지만 그들은 훨씬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나 보다. 큰형인 승진, 그리고 쌍둥이 형인 승훈 또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느끼기 시작한 질투, 열등감. 이러한 감정들은 언제쯤 사라지는 걸까. 영원히 자신과 함께 한다면 끔찍할 것 같았다.

차고로 걸음을 옮기는 승현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눈동자만큼이나 우울하고 서늘한 미소가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탁.

차 문이 닫히고 차에 올라탄 승현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냈다. 자그마한 사진과 함께 해성전자 경영기획팀 팀장이라는 직함이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사원증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승현은 조수석으로 그것을 휙 던졌다.

회사의 핵심 부서라 할 수 있는 경영기획팀의, 그것도 팀장이라니. 아버지는 과연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고 이 자리를 배정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그래, 한승훈 대신이겠지. 그렇게 아꼈던, 그 감정의 깊이만큼 그리운 한승훈 대신이겠지.’

차고를 빠져나온 승현의 차가 집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다시 차를 출발하려는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시은이었다.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한 번 더 시은이 그를 부르자 승현은 차를 멈추었다.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시은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내려진 차창 사이로 시은의 까만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이제 출근하는 거야?”

“보면 몰라?”

“잘됐다.”

하얀 얼굴의 아이는 해맑은 눈동자로 방긋 웃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승현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잘되다니, 뭐가?”

얼마 전, 같은 반인 유나가 오빠의 차를 타고 등교를 했었다. 교문 앞에서 다정한 남매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내심 부러웠던 시은은 자신도 유나처럼 오빠의 차를 타고 다정히 얘기를 나누며 등교를 하고 싶었다.

“오빠, 나 학교까지 태워 주면 안 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명백히 싫다는 대답이었지만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시은은 어깨에 멘 가방에 손을 얹은 채로 한 번 더 물었다.

“나, 학교까지 태워 주면 안 돼?”

“너, 시계 있어?”

“응, 여기.”

시은은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승현에게 보였다. 둥근 원을 따라 예쁜 보석이 촘촘히 박힌 시계였다.

“못 보던 시계네.”

“아, 이거. 지난번 해외 출장 때 아빠가 사다 주신 거야.”

“그래?”

“응, 예쁘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시은이 물었다.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더욱 차가워진 표정으로 승현이 말을 했다.

“지금 몇 시니?”

“응?”

“지금 몇 시냐고 묻잖아.”

“아…….”

시은은 시선을 시계로 돌렸다. 시간은 정확히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8신데, 근데 시간은 왜 물어?”

“그래, 8시. 그럼 그것도 알겠네.”

“뭘?”

“내가 이미 출근 시간에 늦었다는 거.”

“안 되는 거야?”

“안 돼.”

“정말 안 되는 거야?”

시무룩한 표정으로 묻자, 짜증이 확 났다.

“도대체 내가 몇 번을 대답해야 하는 거니? 아침부터.”

“미안해, 오빠.”

‘미안해, 승현아.’

이제는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와 겹쳐 짜증은 더했다.

“됐어,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어.”

“오늘도 열심히 일해, 오빠.”

엷게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하고는 시은이 차에서 물러나자 승현은 차창을 올리고 차를 출발했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승현은 힐끗 백미러를 보았다. 시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로 물끄러미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뭐야. 사람 마음 불편하게.’

정말 화를 낼 줄 모르는 건지, 아니면 화를 꾹 눌러 참는 건지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차갑게 말을 툭툭 내뱉어도 어린 시은은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예전 승훈이 그랬던 것처럼.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정차한 사이 승현은 차창 너머로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지극히 푸른 하늘이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

이런 날씨에 답답한 사무실에 앉아 딱딱한 보고서나 들여다보고 있어야 한다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지만 그 감정은 쉬이 가시지 않고 회사가 가까워질수록 더해만 갔다.

‘또 시작인가?’

내일은 괜찮겠지, 또 내일은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한 것이 벌써 한 달째였다. 아직 회사 생활에 적응을 못해서라고 치부하기엔 그 기간이 너무 길었다.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해성그룹을 상징하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하늘에 맞닿을 듯이 높이 솟아 있는 빌딩, 그 안에서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차를 멈춘 채로 그곳을 올려다보던 승현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차장으로 향하지 않고 빌딩을 지나쳐 갔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출근 시간에 늦으면 안 된다는 것, 알지?’

불과 몇 시간 전 자신에게 당부하던 형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그것을 떨쳐 내려는 것처럼 승현은 차를 더 세게 몰았다. 지금 자신의 이 행동으로 아버지에게 그리고 형에게 어떤 말들을 들을지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불호령도 냉기가 뚝뚝 흐르는 형의 차가운 말들도 자신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이 답답함을 누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무단결근.

자신이 지금 벌인 일은 무단결근이었다. 사춘기 소년의 충동적 행동이라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지금 자신은 사춘기 소년도, 그리고 이 행동이 충동적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모범생은 결코 아니었지만 학교 다닐 때도 무단결석은 하지 않았다. 승훈의 일을 겪으면서도 다른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갔었다. 무슨 오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문제아군, 회사가 가기 싫은 문제아. 아니, 문제 어른인가?’

시간은 10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임원급 회의도 끝났을 테고 형인 승진에게도 자신이 무단결근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거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연락이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까. 피식,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형이 그럴 리가 없었다.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해성그룹의 제1 황태자인 형이 아닌가.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런던 지사에 가 있는 아버지가 보고를 받았다면 전화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못난 녀석.’

‘그 녀석이 그러면 그렇지.’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왔던 그 말을 했을 것이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시선을 든 승현은 마주한 강물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은 은빛 물결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네 자리는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너를 주시하는 눈이 한둘이 아니라는 건 너도 알 거야. 네 행동 하나에 여러 말이 나올 수 있으니 모든 행동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회사에 첫 출근하는 날 승진이 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랬기에 그 자리가 더 싫었는지도 몰랐다.

목적지 없이 차를 타고 달리던 승현은 차를 멈추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넓고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승현은 자신 쪽으로 온 직원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차를 주문했다. 차를 주문받은 직원은 승현을 힐끔 쳐다보더니 가볍게 미소 짓고는 자리를 떴다. 시간이 흐르고 향긋한 차향이 감돌았지만 찻잔은 손에도 대지 않은 채 시선을 창가로만 두었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오가는 생각들을 싹둑 잘라 버린 채.

볼일을 끝내고 카페를 나서려던 하연은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남자를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고급스러운 양복을 멋스럽게 입은 남자는 화려한 연예계에 오래 몸담고 있는 그녀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카메라를 갖다 대고 찍어도 유명한 스타들의 화보가 부럽지 않을 만큼. 톱모델 강주원의 팬인 딸이 그를 일컬어 늘 하는 말이 생각났다.

‘엄마, 강주원 그 사람은 일상이 화보야.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도, 부스스한 얼굴로 사진을 찍어도 빛이 나. 화려한 배경이나 조명 다 필요 없다니까.’

하연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보고 있는 남자는 톱모델인 강주원의 외모를 능가하면 능가했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화려하지만 조금은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가 단점인 주원에 비해 자신의 눈에 들어온 남자는 화려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지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하연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남자는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었다. 찻잔에 손을 대지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일행이 없는 것인가? 뭐 하는 사람인 거지?’

의문들을 뒤로 하고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겨 승현의 테이블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승현은 여전히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미 식어 버린 차향은 자취를 감춰 버렸고 그에게서 풍겨 오는 은은한 향만이 감돌고 있었다.

“기다리는 일행이 없으신가요?”

작은 목소리로 물은 것도 아니건만 승현의 시선은 움직일 줄 몰랐다. 하연은 목소리를 더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