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샛별이 엄마로만, 프롤로그>

“앉으세요.”

그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 아니라는 듯 너무 자연스러웠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에 반해 나는 부자연스러움으로 어쩔 줄 몰라 했고, 초조했고, 떨렸다. 그가 먼저 자리에 천천히 앉았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맞은편에 자리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혼자 있을 때보다 거세어졌지만, 그저 내려앉은 어색함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맞선’이란 이름으로 남자를 만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에 설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떻게 이 자리를 자연스럽게 무마할 것인가 걱정되는 마음에서 심장이 그저 그런 초조함을 대신하는 것뿐이라고 애써 아무렇지 않게 치부해버렸다. 초짜인 나와는 정반대로 느껴지는 상대. 그동안 셀 수 없이 수많은 맞선을 봐 온 남자처럼 그는 느긋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내가 마시던 커피잔에 그윽한 눈길을 둔다. ‘너 먼저 와서 커피까지 마셨구나?’ 하는 눈빛으로 느껴져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먼저 도착해서 마시고 있었어요. 주문… 하세요.”

“그러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를 보며 ‘과연 저런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잠시나마 고민하게 된다. 이 남자의 딸인 샛별이도, 그런 샛별이의 조부모도 나의 눈에는 늘 나보다 더 많이 느긋했고 여유 있어 보였다. 그리고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 한샛별의 아버지이자 한선의 외동아들인 한성혁.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도 그는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여유 있게 등장해 자연스럽게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곧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내가 구태여 말을 보태거나 그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주문을 받은 직원은 홀연히 사라졌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자리한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물음이 먼저 들려왔다.

“저희 부모님의 제안을 승낙하시는 겁니까?”

얼마 남지 않은 커피가 담긴 잔을 아무 생각 없이 들어 올리던 나의 손이 그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흔들렸다.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그가 당황한 나머지 침묵해 버린 나의 반응을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그러실 수 있으시겠죠. 상황이 워낙 안 좋으시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듯 얘기해오는 그의 동정 어린 말이 슬쩍 귀에 거슬린다. 아니라고, 당신과의 결혼은 안 될 거 같다고, 너의 부모님께도 이미 나의 의사를 정확히 밝혔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말들을 커피잔으로 막아버렸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의 부모님께는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서 나온 자리였다. 거절도 당사자를 만난 후에 해달라고 부탁에 부탁하셔서 마지못해 나온 것뿐이다. 아직 이 남자가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무엇보다 아이러니했다. 뭔가 중간에서 오해가 있었나 싶어 좀 더 그의 말을 마저 듣고 내 생각을 정리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전 사실 송 선생님께서 이번 혼사를 거절하실 거로 생각했고, 바랬습니다.”

식어버린 커피는 많이 썼다. 거절했다고, 당신의 바람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해 주려는데, 이번에도 그가 빨랐다.

“저는 결혼 생각이 없거든요.”

순간적으로 커피잔을 든 손이 주책맞게 살짝 떨렸다. 실망스러운 이야기라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갑자기 나도 모르는 이유로 가슴 속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니까 당장 일어나서 각자 갈 길이나 가자고 차갑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맞선이란 이름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고, 그 맞선의 상대가 나에게 자신의 딸을 돌봐주는 대가로 월급을 주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예의는 갖춰서 이 자리를 없던 일로 좋게 마무리 짓고, 앞으로도 가능하다면 계속해서 샛별이를 돌보며 일을 하고 싶었다.

“저는….”

“저의 아버지께서 하신 제안에 끌리셨습니까?”

그러니까 이 남자는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게 자신의 부모가 제안한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자기와 결혼을 위해 나온 거라고 단정 지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호텔 직원이 그가 주문한 커피잔을 들고 다가왔다. 낯선 사람의 등장으로 잠시나마 나와 그 사람은 말을 멈추고 직원이 커피잔을 테이블 위에 놓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호텔 직원의 그렇고 그런, 틀에 박힌 형식적인 인사에 하마터면 웃음이 뿜어져 나올 뻔했다. 즐거운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어색한 자리란 것을 그녀는 정말로 몰랐을까. 그는 태연하게 앞에 놓인 자신의 커피잔을 들어 마치 CF 모델처럼 커피를 마신다. 그 모습에 또다시 나는 속이 꼬였다. 나를 이미 그가 생각하는 세상 속 그렇고 그런 여자로 단정 짓고 물어오는 이 남자의 삐뚤어진 말투가 싫었다.

“저에게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어요. 매일같이 허덕여도 줄여지지 않는 빚이 산더미거든요.”

꼬일 대로 꼬인 속을 여과 없이 그 앞에 툭 던져버렸다. 그래도 나는 그 빚을 과감히 스스로 감당하고 너랑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려는데 그가 커피를 마신 잔을 내리며 식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봐 왔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더니 단박에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결혼하지 않고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유혹이 일었다. 매일매일 샛별이를 돌보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일해도 아니 새벽까지 일해도 줄어들지 않는 통장 속 마이너스 숫자들에 어젯밤도 좌절하며 잠이 들었다. 솔직히 처음 샛별이 할머니인 송화와 할아버지인 한선의 결혼 제안에 나는 흔들렸다. 처음에는 눈 딱 감고 결혼하면 이 모든 게 해결될 거란 생각에 반쯤은 이 남자와 결혼이란 걸 하려고 결심했었다.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가는 심청이처럼, 부모님이 남겨주신 거대한 빚에 한성혁이란 남자에게 팔려 가려고 했다. 하지만 양심상, 그리고 애정과 사랑 없는 결혼을 마주하고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던 나의 마음이 다시금 그의 유혹적인 말에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냐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어보고 싶다.

“송 선생님의 빚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네?”

미쳤냐고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궁금했다. 대체 왜 내 빚을 당신이 갚아주려 하느냐고. 그것도 결혼이란 조건 없이.

“왜 제가 아무런 조건 없이 샛별 아버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나는 아직 결혼하겠다, 하지 않겠다 그에게 답하지 않았는데 이미 결혼하려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어버린 그는 너무 많이 앞서간 듯했다.

“그럼 왜 저의 아버지 도움은 받으시겠다고 하신 겁니까?”

나는 도움을 받으려고 한 적이 없다고 말하려고 입을 뗐다.

“사실, 처음에는… 음… 그러니까… 제가 샛별이를 키울 수 있고, 샛별이 할아버님, 할머님께서 너무 원하시고… 결혼을 통해서….”

오늘따라 말이 너무 꼬인다. 생각이 머릿속에서 단박에 깔끔히 정리가 안 되다 보니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도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모르게 엉켜버리고 말았다. 결국은 끝을 맺기 전에 그가 먼저 횡설수설하는 나의 말을 가로채고 들어왔다.

“그럼 저도 송 선생님 빚을 대신 갚아드리는 조건으로 송 선생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말씀드리면 됩니까?”

그의 말이 하나하나 따갑게 귀에 거슬린다. 아니라고, 제발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눈빛을 보내야 하는데 째려보듯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날카롭게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을 보고서는 입이 차마 떼어지지 않았다. ‘그냥 일어나서 나와 버릴까’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동안, 그는 느긋하게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고, 손에 쥔 찻잔을 천천히 내리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따로 조용히 만나죠.”

이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가 입가에 쓴 웃음을 걸치고 바라보더니 너무나도 명확하게 덧붙였다.

“잠자리 파트너. 모릅니까?”

놀라움보다는 모멸감이 더 컸다. 그쪽 부모님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나와서 거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나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그는 너무 나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그래, 우리 사이에 예의는 여기까지다.

“샛별 아버님, 참 무례하시네요.”

손에 땀이 나고 부들부들 떨려 주먹을 꽉 쥐어본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마주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보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말을 마치고서 쓰러질 듯한 걸음으로 커피숍을 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제 정말 다시는 샛별이를 보지 못하겠구나. 다른 일을 구해야 하는구나.’

이 와중에도 나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해야만 했다. 그 순간, 호텔 입구 쪽으로 걸어가면서 유리창 너머로 바라본 남자는 나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태연했다. 남아있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는 여유로운 모습에 더없이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친다. 내가 받는 월급은 푼돈인 남자. 너무 돈이 많아서 주체가 안 되는 남자. 돈으로 여자를 사고, 잠자리를 갖는 비열한 놈. 쓰레기.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그 순간, 후회할 복수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그리고 나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호텔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짝!”

막 일어나 계산서를 집어 들고 있던 남자를 향해 매섭게 뺨을 올려붙였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 시선이 우리를 향해 일제히 모여들었다. 웅성웅성, 수군수군. 호텔 직원들은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나 서로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수군거림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매일같이 허덕거리는 이 고단한 생활의 무게를 욕망만이 자리하는 잠자리로 더럽게 그리고 가볍게 바꿔버린 쓰레기 같은 남자를 향한 복수심만이 가득했다.

“저도 댁 같은 쓰레기랑은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얘기하려고 나왔어요. 너무나도 간절히 그쪽 부모님이 원하시길래 예의상 나온 자리였다고요. 난요… 혹시나 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어요. 샛별이와 헤어지는 게 너무나도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래도 서로 좋게 마무리 짓게 된다면 샛별이만은 계속해서 돌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고요!”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말을 멈췄다. 놀라 나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던 남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치밀었다.

“그래요. 나 돈이 필요해요. 매일매일 죽어라 일해도 줄지 않는 빚이란 이름의 기막힌 숫자를 당신이 알기나 해요? 당신에게는 하룻밤 그저 욕정을 푸는 데 사용하는 그 돈이 나에게는 삶이고 목숨인데….”

나의 목소리는 떨렸다. 여기까지 하고 그만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한번 폭발한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법.

“당신의 그 더러운 돈을 받고 잠자리 파트너가 되느니, 당신 부모님께서 제안하신 걸 다시 한번 더 고민해보는 게 훨씬 깨끗할 거 같네요. 없어도 자존심은 챙기자고 결심했는데….”

조금씩 주변 사람들은 흥미로운 티브이 속 드라마를 보듯이 집중해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다음 나올 말이 뭘까 다들 흥미로운 눈빛이었다. 그들의 궁금증을 단박에 해결해 줄 만한 폭탄을 그에게 던져줬다.

“제대로 복수해 드리겠습니다, 한성혁 씨!”

나는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금방 쓰러질 것만 같이 휘청이는 다리를 간신히 이끌며 커피숍을 나왔다. 혹시라도 호텔 입구 근처에서 그와 마주치거나 그가 쫓아 나올까 봐 호텔 앞에 세워져 있던 택시 안으로 부랴부랴 몸을 실었다. 몇 년 만에 탄 택시 안에서 나는 엄마가 돌아가시던 날보다 더 서럽게 엉엉 울었다.

#<오직 샛별이 엄마로만, 1부>

그를 등지고 나온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샛별이의 집 앞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늦은 오후 시간에 샛별이를 봐주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대문을 들어섰다.

“어서 와요, 송 선생.”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인자한 미소와 말투로 샛별이의 할머니가 나를 반기셨다. 택시 안에서 울어 살짝 부어있는 눈이 신경 쓰였지만, 어른의 눈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는지 그녀가 나를 살펴보는 눈길은 평소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