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졸업 축하드립니다, 영원 씨.”

이제 막 대학교 졸업식을 마친 그녀에게 웬 남자가 꽃다발을 건넸다. 영원은 이런 선물은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레 꽃다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모델처럼 큰 키에 서양인처럼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이목구비, 게다가 잘 차려입은 정장까지. 누가 봐도 근사한 남성이었다.

‘아빠 지인인가? 아니면, 내 팬?’

아무리 봐도 영원이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국내외로 유명한 지휘자이자 아버지인 수호의 지인인가 싶어 수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수호의 입에서 나온 설명은 영원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영원아, 이분은 앞으로 네 남편이 될 사람이란다.”

‘남편?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영원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름 모를 근사한 남성은 영원을 향해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영원 씨의 ‘남편’인 ‘연하늘’입니다. 반갑습니다.”

“남편이요?”

“그렇단다, 영원아.”

영원은 하늘을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 수 있는 정보가 딱히 없었다.

“아빠! 오늘 처음 뵙는 분이 제 남편이라니요?”

정신을 다잡고 수호에게 다시 물었다. 수호는 잠시 침묵 후 입을 열었다.

“하늘의 아버지 연음표는 나하고 죽마고우 사이란다. 음표와 나 사이엔 어린 시절에 약속한 일이 있어.”

“약속이요?”

뭔가 이상했다.

‘아빠랑 죽마고우라는데, 왜 내가 모르지?’

영원은 일단 수호의 설명을 들었다.

“결혼 후에 서로가 딸과 아들을 낳으면, 결혼을 시키기로 말이다.”

영원은 어이가 없어 수호를 멍하니 한참 바라봤다.

“아빠! 결혼이라니요?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랑요? 말도 안 돼요! 나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는 여잔데!’

그렇다. 나는 짝사랑 중이다. 대상은 바로, 과 선배 ‘민한량’.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영원은 수호와 하늘을 번갈아 쳐다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 꿈일 거야.”

그녀는 시선을 땅으로 내린 채 중얼거렸다. 너무 어이가 없었다. 제 얼굴을 제 손으로 꼬집어도 보았다. 아픈 걸 보니 분명 꿈은 아니었다. 그런 영원을 조용히 바라보던 수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원아, 네 어머니가 몇 년 전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잖니.”

“네….”

“아빠 혼자서 너를 키우기가 많이 힘들더구나.”

아빠가 힘드셨다니, 전혀 몰랐다.

“오늘 대학도 졸업했으니, 이젠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니 의심 말고.”

“아빠, 그래도 이런 상황은 말이 안 되잖아요!”

‘이 남자가 사기꾼이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영원이 마음속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수호는 어딘가를 급하게 가야 하는 사람처럼 손목시계를 빤히 응시했다.

“영원아, 지금 해외 스케줄이 급해서 먼저 가봐야겠구나.”

영원은 뭔가 이상한 느낌에 확인차 질문했다.

“아빠, 한동안은 해외 스케줄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수호는 설명 대신 핑계를 대는 듯이 답했다.

“시간이 다 돼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구나. 저기 정 비서도 오는구나.”

때마침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 비서가 고급 외제 차를 몰고 오고 있었다. 세 사람 앞에 멈춰 선 차 운전석에서 정 비서가 내렸다.

“선생님, 얼른 가셔야 합니다.”

그는 수호를 위해 얼른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래, 그 전에 잠깐만.”

수호는 하늘 앞으로 가까이 갔다. 수호가 하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하늘아, 내 딸을 잘 부탁하네.”

“네, 아버님.”

‘네, 아버님?’

수호는 마지막으로 영원을 한 번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바로 떠났다.

“아빠!”

떠난 수호는 답이 없었다. 차를 타고 떠나는 아빠를 뛰어서 쫓아가려는 영원을 하늘이 붙잡았다. 영원은 하늘에게 붙잡힌 손목을 얼른 뿌리쳤다. 그리고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하늘을 째려보았다.

“저기요, 혹시 사기꾼이세요?”

하늘은 말이 없었다.

‘한량 선배도 진짜 잘생겼는데, 이 남자도 잘생겼긴 하네.’

그래서 더욱 수상했다.

“대체 왜 저하고 결혼을 하려고 하세요?”

맑은 하늘인데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자신의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졸업식 사진을 예쁘게 찍겠다며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탓이었다.

‘다 들렸겠지?’

밀려오는 민망함에 먼 산만 바라보았다.

“배고프죠? 일단 우리 집에 가서 식사 먼저 할까요?”

영원은 화들짝 놀라서 말을 더듬거렸다.

“우, 우리 집이요?”

“네, 영원 씨와 저와의 집이요. 우리 집.”

‘이게 무슨 말이지?’

영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타시죠.”

***

‘방향제 향인가?’

대형 SUV 안에서는 목화솜이 연상되는 포근한 향이 났다. 하지만 방향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수군대고 있어서 일단 조수석에 타기는 했다.

“하늘색 정장 입은 남자 봐봐!”

“저런 색이 어울리는 사람도 있구나~.”

“엄청 잘생겼다.”

“연예인인가?”

“저 사람, 티비에서 본 거 같은데? 누구더라~?”

등등. 사람들은 조용히 수군거렸지만, 귀가 밝은 영원에게는 꽤 크게 들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 집’에 간다니.

‘그럼, 신혼집이라는 뜻인가?’

영원은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늘은 그런 영원에게 말을 붙였다.

“어디 아파요? 혹시, 멀미하나요?”

“네? 저 야한 생각 안 했는데요?”

때마침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다. 차는 잠시 멈췄고, 하늘은 영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영원은 그의 눈빛 앞에 얼음이 되었다.

‘뭐야,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기긴 했네.’

아니다, 지금 잘생긴 하늘의 외모가 문제가 아니다.

‘내 마음속엔 한량 선배가 있는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영원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영원은 애써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바보야, 나는 바보.’

눈을 질끈 감고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한탄했다.

“야한 생각 자주 하세요?”

하늘의 질문에 놀란 영원은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농담입니다.”

하늘은 입가에 연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자 영원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야, 내 심장 왜 이래? 나 요즘 외로웠나?’

신호등 불빛이 바뀌자 하늘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영원은 처음 겪는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혼란스러웠다. 영원은 운전 중인 하늘을 슬쩍 보았다.

‘이 남자, 정체가 뭘까? 아니,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그나저나 내가 이 남자 집에 가도 안전하긴 한 걸까? 나이는? 직업은?’

영원은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남편 주장남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여보’라고 하셔도 됩니다.”

“네?”

“‘자기’라고 불러도 되고요.”

영원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너무 멋진 말을 해서 할 말을 잃었나 보군요. 하긴, 나 같은 남자가 오늘부터 남편이라니, 정말 황홀하지 않나요?”

‘생긴 건 멀쩡한데, 어디 아픈 사람인가?’

영원은 겨우 정신을 다잡은 후 다시 말을 꺼냈다.

“저기요, 무엇 때문에 계속 제 남편이라 주장하고 계신 건가요? 이건 엄연한 납치와 허위사실 유포, 그리고 명예훼손 아닌가요? 그리고.”

‘잘생기면 다예요?’

영원은 마저 하려던 속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남편인 게 황홀하지 않냐는 남자에게 무슨 말이 통할까 싶었다. 그런데!

“잘생기면 다 아닌가요?”

하늘이 영원의 속마음을 읽은 모양이다. 영원은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하늘은 아랑곳없이 하던 말을 계속 이었다.

“게다가 나처럼 영앤리치 톨앤머슬인 남자가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시죠.”

‘뭐지? 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지?’

수상하다. 그것도 잔뜩.

“다른 여자들은 날 유혹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왜 영원 씨는 저를 이렇게 경계합니까? 내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말 모릅니까?”

“네.”

영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당황스럽네요.”

하늘은 즉답하는 영원이 어이없었다. 졸업식 후 줄곧 당황스럽기는 영원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정말 당황스럽네요. 그리고 저와 아버지에게 사기를 칠 생각이라면, 얼른 정리하시는 게 좋을걸요?”

Rrrr-

차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하늘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하늘은 블루투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얘기하세요.”

차 스피커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부장님, 디자인팀 인턴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솔로 여가수 ‘한령’의 데뷔 미니앨범 커버 디자인 투표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화를 건 남자는 하늘을 ‘본부장님’이라고 불렀다.

‘본부장님? 이 남자가?’

영원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령이라면, 음표 엔터에서 데뷔를 앞둔 그 미모의 한령?’

영원은 음표 엔터에서 대대적인 홍보 중인 한령을 알고 있었다.

‘잠깐, 그러면, 아버지의 죽마고우라던 연음표라는 분이, <음표 엔터테인먼트>의 설립자인 그 연음표 회장님이란 말이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결과가 어떻게 나왔죠?”

[김산우 인턴사원의 디자인이 사내 직원들의 무기명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았습니다.]

“다른 인턴사원들의 디자인은 반응이 어땠나요?”

[김산우 인턴사원의 디자인이 워낙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다 보니, 다른 인턴사원들의 디자인은 별 반응 없었습니다.]

“제 생각과 같은 결과가 나왔군요.”

[그렇습니다.]

“인턴 기간 3개월 중 남은 1주일이 지나면 예정대로 정직원으로 전환된다는 공지, 되었나요?”

[네, 투표 결과 공개 후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최종 디자인 선정 시 지급되는 인센티브 금액도 정확하게 공지했습니다.]

“1주일 뒤 인턴들의 근무 기간이 종료되는 그 날, 인턴사원들을 데리고 스타호텔 뷔페에서 법인카드로 점심 식사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굳이 떨어지는 사원들까지 포함하여 뷔페를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