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륙과 착륙. 비행기의 가장 위험한 순간. 사랑 역시 그랬다.

이륙은 악마의 유혹처럼 달콤했고, 그 끝. 착륙은 비련의 시작이었음을.

모조리 바꾸고 싶었다. 세상에 믿을 사랑이 있기나 했나.

사랑한단 착각.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은 이미 산산이 깨졌다. 이번 생에서 잘 못 짚은 사랑은 이것이면 되었다.

그렇게 강하게 맘먹은 어느 날, 완벽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를 거부할 수 있을까. 그를 믿을 수 있을까. 영혼마저 사랑할 그런 사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데자뷰였다. 사랑에 데자뷰를 느낄 수만 있다면 진정한 영혼의 짝을 찾아내리라. 꿈과 섬광과 같은 인연이 시작된다. 그 모든 것은 의지와 상관없이 철저히 영력의 의도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모든 인생이 그러했다. 기억조차 없는 오래된 연인의 전생 흔적을 찾아 헤매듯. 지구를 한 바퀴 돌고.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다 다시 그 자리에 서면 그리운 사랑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음 생에 서로를 알아본다는 거 말이다.

믿고 싶어졌다. 이렇게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며 구름 속 넘어 그가 사는 세상에 다다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정혜주.

한국 완 그룹의 종합병원 기획조정본부 국제사업팀 에이스

경제경영,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 작가.

당차고 시원시원한 목소리, 완벽한 업무능력. 때로는 신비한 비밀을 간직한 듯한 지적인 미모를 겸비했다.

유쾌한 성격에 정 많고, 엉뚱한 면도 있지만,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 자존심이 강하며, 생각이 너무 많아 힘들어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여린 속마음을 감추며, 혼자 있을 때는 감성에 하염없이 빠져들고, 비밀스럽고도 조용한 세상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최연소 팀장으로 사내외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에서도 탐내는 업계 스카웃 0순위. 커리어우먼으로 또래 후배들과 동료들의 워너비였지만, 완벽한 여자에게도 상흔은 있었다.

잊기 위해 일 중독에 빠져 산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바닥까지 고갈된 그녀는 해외 출장 어느 날,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에 다시 열정을 보이게 되고, 천재 화가의 젊은 시절의 자유로운 영혼과 그림 속 신념과 알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그 흔적을 따라 깊게 다가갈수록 낯선 이방인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상처를 메우기 위해 일 중독에 걸린 여자가 다시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극복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쌓아둔 벽은 높았고, 격정적 사랑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보다 일과 자신의 미래에 전력을 다하고 싶었다. 사랑이 그리웠지만, 굴레는 싫었다. 어느 날, 전생의 끌림으로 진짜 사랑을 찾고자 하지만, 미궁에 빠져든다.

보수적인 가톨릭 신앙을 가진 그녀에게 격정적인 사랑은 유혹이었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다가온 새로운 사랑은 알 수 없는 강력한 시공간으로 그녀를 이끌어 갔다. 이로부터 깊고도 우아한 사랑이 시작된다.

이우.

세계적인 미국의 억만장자

이국적인 귀공자

균형 잡힌 훌륭한 피지컬, 이지적이고 남자다운 중저음 목소리, 세련된 화법, 귀공자 자태와 걸음걸이. 전형적인 엘리트 수재,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냉철함과 강력하고 공격적인 추진력을 가진 세계적인 억만장자, 공과 사가 분명한 철두철미한 기업가이자 투자자.

미 공군—출신이자, 미국 명문 MBA 졸업자. 부동산, IT, 바이오 생명공학, 우주공학에 관심이 많다. 소년 같은 호기심을 가졌으며, 낭만적인 면도 있으며, 신세대의 소탈하고 평범한 일상을 즐기기도 한다.

투자의 귀재로 수많은 벤처기업과 스타트업 천재들이 그의 투자를 얻기 위해 찾아들었다.

한국-일본계 아버지와 미국 유학파 출신 사업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완벽한 최상류계층의 미국인. 미술품 수집을 하며 낭만적인 감상에 빠지기를 즐긴다.

공학적이고 예술성이 강한 한국인과 치밀한 분석력을 가진 일본 DNA가 만들어낸 정체성이 더해져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해외 출장이 잦아질 즈음이 되면 어김없이 어떤 악몽을 꾼다. 그런 이유인지 그는 전용 제트기를 두고, 대형 항공기 퍼스트 클래스를 이용한다.

그가 그 악몽의 순간에서도 잊을 수 없는, 놓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꿈속 반복해서 나타나는 한 여자의 존재였다.

한 몸인 듯 일체감을 느끼는 꿈속의 그녀에게 점점 의지하게 된다. 시대는 달라도, 얼굴은 달라도 그를 한순간에 끌어당기는 여자를 우연히 연달아 보게 된다.

모든 것은 무의식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은 기업투자보다 어려웠다. 산 넘어 산. 어떻게 사랑을 찾을 것인가.

#1화 기억흔적은 마법 가루처럼

관제탑과 조종실에 콜사인이 오가고, 수백 톤의 육중한 무게의 슈퍼 에어라인은 착륙을 앞두고 있었다.

“Ladies and gentlemen, We are now approaching Pudong International Airport. Please fasten…… Thank you.”

여느 때처럼 하늘을 날며 푸둥 국제공항에 다가가고 있었다. 좌석벨트를 착용하고,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원위치로 해달라는 영어안내방송과 경고등에 불이 들어왔다.

이 사인(sign)이 들어오면 언제나처럼 비행기가 추락이나 사고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는 순간이다. 하지만 착륙은 남아있었고, 이상적인 3도 각도로 땅에 우아하게 착지하기 위한 은밀한 고투는 이어졌다.

다행히 상하이의 폭우 등의 기상악화로 재착륙을 시도하는 고어라운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과 사랑과 삶에 있어 이륙과 착륙, 그 사이의 여정은 실로 태양 빛처럼 다채롭고, 별빛 넘치는 밤처럼 드라마틱하리라.

‘후-훅.’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한 단계, 한 매듭 지어가며 살아가는 것. 정혜주. 그녀에게 사랑도 일도 그랬다. 아직 젊었고, 과도기에 있었다.

상하이, 3년 만의 출장이었다.

공항 구석구석 어김없이 풍겨오는 샹차이(고수)와 향신료, 중국만의 특유한 냄새가 대학 어학연수 시절 향수를 불러왔다. 비행기마다 다양한 국적의 이방인 승객들이 쏟아져 나갔고, 공항 안팎으로 수많은 인파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드나들었다.

공항 밖 온도 43도. 푹푹 찌는 상하이 여름은 여전했다. 디디추싱(중국의 우버)을 타고 공항을 빠져나와 50여 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차체가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자 난징동루의 빌딩 무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높이 솟은 첨단 빌딩 숲, 그 사이사이에 미로처럼 얽혀 있는 도로, 밤이면 더 빛날 현란한 색상의 디지털 LED 전광판들 그리고 반가운 난징루(南京路)의 수많은 사람. 와이탄(外灘)의 근사한 건축 양식들은 분명 서구의 건축양식이었지만 지극히 동양적이었다.

혜주는 그 점이 좋았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엉켜 있는 이 상하이라는 거대 도시는 마음 한구석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추억을 소환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 추억이라는 것에 젖어 들다 보면 지우고 싶은 기억도 줄기줄기 떠올라 그녀가 몇 년간 다잡아놓은 심장을 휘갈길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반된 복잡한 내면 탓인지 혜주는 센티멘탈해졌다.

먼발치의 황포강의 금빛 물결은 낭만적이었지만, 눈 앞에 펼쳐지던 반짝거리는 광경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한여름 햇빛은 차창 유리를 통해 레이저처럼 집광하며 그녀의 피부를 따갑게 파고들었다. 멍하게 바깥을 바라보던 그녀를 깨워 현실을 자각하도록 했다.

‘그래. 출장도 일상 탈출이라 할 수 있겠지.’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가 잊고 싶은 기억의 흔적들이 결국 허락도 없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 원망과 환멸감이 아직 남았다니 혼란스러웠다. 그래, 잊히는 게 아니라, 무뎌지도록 기다리는 것임을.

지금, 이 순간 오로지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나면 후련해질까? 퇴사 대행사라도 쓰고 잠적할까. 생각만이라면 무슨 짓을 못 하랴. 잊기 위해 더욱 미친 듯 일 중독자가 된 그녀는 많이 지쳐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단 생각을 했다. 더는 안되었다. 인내심이 다 한 듯 눈을 감았다.

(……)

눈을 감은 것도 잠시 ‘쿠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 진동이 쿨렁댔다. 혜주는 앞으로 갑자기 쏠린 상체를 서서히 들어 올리며 앞창을 바라보았다.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 상하이 택시기사들의 운전은 여전히 거칠었다. 흔들리는 감성의 유리잔을 사정없이 깨트려버렸다. 택시 문을 박차고 나왔다.

***

이우.

하양 린넨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핸들을 잡은 그의 팔 근육은 강인함으로 잘 단련되어 있었다. 검정 머리카락 리젠트 컷에 검정 선글라스는 잘생긴 이목구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미국 서부 1번 도로. 캘리포니아 몬터레이(Monterey)에서 모로베이(Morro Bay) 사이. 카브리요 하이웨이(Cabrillo Highway)를 질주하고 있었다. 황홀한 바닷가 절경이 펼쳐진다.

7월, 해안가 절벽에는 노랑꽃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강렬한 태양 아래 갈매기들이 곱디고운 하양 빛 꼬리와 날개 깃털을 일자로 활짝 펼치며 유유히 날았다.

이우는 빅스비 크릿 브릿지 Bixby Creek Bridge를 지나간다. 웅장함 아래 태평양의 파도는 절벽에 시원스럽게 부서지고 있었다.

절벽의 아찔한 광경들은 비행하는 듯 착각이 들기도 했다. 캘리포니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대양과 고귀한 하늘과 따뜻한 대륙이 맞닿는 곳. 바다 안개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낼 때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 몽롱해지며 빠져들었다.

그에게는 희망이기도 했고, 알 수 없는 세상의 힘에 대한 존재를 상상하기에 좋았다.

언제나처럼 하늘과 바다와 땅은 이우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듯 강한 끌림을 주었다. 번잡하고 새침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올 때면, 그는 항상 이곳 카브리요 하이웨이 드라이브를 즐겼다.

빅스비 만(Bixby Creek)을 따라 깎아지른 협곡 사이 79미터(260피트) 높이의 그 짜릿한 상공의 다리를 지나는 동안 모험과 도전을 즐겼다. 사업투자 영감을 떠올리기에 좋은 시간이었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장소였다.

이우는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크릿 브릿지의 석양을 등지며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의 내면의 어딘가에서 울리는 대로 달려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언젠가 나에게 뮤즈가 있게 된다면, 지금이 적기가 아닐까.’

뭐, 이곳 태평양을 넘어 만나게 될 대륙과 하늘이 닿는 곳에 나의 반쪽이 있을지도.

***

혜주는 심란했던 마음은 어디로 간지도 모르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일사분란하게 바로 떠올렸다.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

택시에서 내려 완 그룹 상하이 국제병원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과 눈에는 힘이 넘쳤다. 완 그룹이 한중 합자한 국제병원이었다. 혜주는 중간에 투입되었던 프로젝트였지만 병원 구석구석 이곳 사람들과 정이 많이 쌓였다. 관리자들과 악수를 하며 큰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