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지금부터 사악한 마녀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도록 하겠다!”

“와아아아아!”

이번 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걸까? 내 본래 이름은 정수지, 하지만 스물한 살에 MT를 위해 모인 강당이 붕괴되어 허무하게 삶을 마감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지만 내 인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로체스터 가문의 공녀님이 마녀였다니 믿을 수가 없어.”

“매일 밤 남자를 유혹하고 귀족의 풍기를 어지럽혔다고 하나 봐.”

“죽을 사람이 죽는 거니 너무 놀랄 이유도 없어.”

여자들이 사형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날 바라보며 수군거리고 있지만, 이런 장면도 벌써 세 번째라 익숙하기만 하다.

정수지로서의 삶이 끝난 뒤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소설 『로열패밀리의 일기』의 조연이자 로체스터 가문의 공녀인 라이아 루체스터로 말이다. 하지만 공작의 딸로 삶을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인생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생각 외로 귀족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고 주변 사정에 밝지 못한 나는 언제나 악녀나 마녀로 몰려 잔인하게 죽어야만 했다. 라이아의 몸에 빙의한 첫 번째 삶에서는 함정에 빠져 유부남과 쾌락을 탐닉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두 번째 삶에서는 전염병을 퍼트린 마녀로 몰려 죽었다. 이번에 내가 죽는 이유도 앞선 죽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녀, 라이라 로체스터는 죽기 전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없습니다.”

“끝까지 당돌하구나, 그러면 죽어라!”

“잠시만요!”

“……!”

그 순간 익숙한 여자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루미 공녀님, 마녀의 곁에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쇠사슬에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불쌍한 제 동생이니까요.”

“하아, 또 너야?”

“왜 그러니 내 귀여운 동생아.”

내 언니, 아니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루미 로체스터는 날 품에 안는 척하며 내 귓가에 자신의 몸을 가까이 옮겼다.

“멍청한 년. 세인님은 내 거야, 그러니 함부로 덤비지 말았어야지.”

루미는 이렇게 아무도 듣지 못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면을 벗은 사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저분이 로체스터 가문의 장녀라며?”

“맞아, 동생과 달리 성품도 바르고 능력도 출중해.”

“동생이 비록 마녀로 밝혀졌지만 저렇게 마지막 인사를 해주는 걸 보면 대단하기는 하네.”

사람들은 루미의 정체 따위는 알지 못하기에 그저 보이는 걸로만 모든 걸 판단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루미야말로 진정한 대륙의 악녀 중에 악녀라고 밝히고 싶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라이아로서의 두 번째 삶에서 루미의 악행을 고발하다가 혀가 잘려 잔인하게 죽었으니까…….’

“내 가여운 동생아,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거니? 이제야 모든 걸 포기한 거야?”

“언니 다음엔 쉽게 지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간발의 차이로 졌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생각보다 독한 년이네.”

“마음대로 생각해, XX.”

“이제 그만 마녀에 대한 사형을 집행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루미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사의 재촉에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뒤로 물러났다.

“국가를 위해 중대한 일을 행해야 하는 귀족을 유혹해 직무를 방해하고 거짓으로 진실을 감춘 사악한 마녀, 모두 잘 봐라! 마녀의 최후의 어떤 것인지를!”

슈우우우웅!

‘이렇게 또 끝이구나, 다음엔 절대 죽지 않을 거야…….’

**

“허억, 허어억! 공녀님 큰일이 났습니다!”

“무슨 일이니?”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침대에서 눈을 떠 옆을 바라봤다. 어깨에 닿는 갈색의 머리카락 끝부분은 조금 푸석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얼굴을 보니 눈망울이 맑은 것은 물론 언제나 해맑고 에너지가 넘치던 로젠 그 아이가 확실하다.

‘이번 삶에서도 내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사람은 내 최측근 시녀인 로젠이구나.’

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공포가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왕성 주변에 전염병이 퍼져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다고 해요.”

“그러니? 이번엔 대략 1년 전으로 되돌아온 모양이구나. 2년 전이나 3년 전으로 되돌아갔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라이아의 몸에 들어온 세 번째 삶에서는 함정에 빠져 수세에 몰리기 전 루미가 좋아하는 남자를 유혹해 주도권을 쥐고자 했지만, 세인은 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일이 이상하게 꼬여 또 허무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번엔 과연 내가 반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계속 스무 살의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있는 비극적인 운명, 이제는 더 이상 죽고 싶지 않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 봐야 해…….’

왕성 주변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금방 그치지 않고 대륙 전역으로 퍼져 수많은 사람들을 죽고 병들게 한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시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번에도 내게 1년 남짓한 시간이 주어진 셈인데 오늘부터 내가 벌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내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기에 신중해야 한다.

“공녀님?”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하자 로젠도 덩달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전염병은 왕성 주변에서 시작되었지만, 머지않아 다른 나라에도 퍼지게 될 거야.”

“네? 그게 정말인가요?”

“한낱 공녀 따위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 누구도 내 말을 믿어 주지 않겠지, 여태까지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거야.”

“공, 공녀님?”

“언니는 뭘 하고 있니?”

“약속이 있다고 외출을 하셨습니다.”

“그래?”

루미 로체스터는 머리가 뛰어나다. 어쩌면 회귀를 반복하지 않는 라이아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판세를 읽는 눈치도 빠르고 괜찮은 품평으로 인맥도 넓어 도움을 받거나 고급 정보를 얻는 것에서도 나보다 훨씬 유리하다. 그나마 내가 루미를 앞지를 수 있는 것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 정도인데, 그동안은 미래를 알고 있어도 폭넓게 적극적으로 활용을 하지 않아 자꾸만 죽게 되었다.

‘너무 광범위하게 나서면 오히려 명줄을 재촉할 거라는 공포심이 스스로 날 위축시키고 소극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그것도 다 언니에 대한 막역한 두려움 때문이겠지…….’

“로젠, 외출 준비를 하렴.”

“예? 밖에 전염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하루도 낭비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거든.”

“아, 알겠습니다!”

**

“허억, 목이 말라.”

“으으윽, 누가 살려 주세요!”

“추워, 왜 이렇게 춥지?”

로젠과 함께 거리를 활보하자 골목길 어두운 곳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이번에 창궐한 전염병은 감기와 유사해 시름시름 앓다가 사람을 죽이는 것도 무섭지만, 전염력이 매우 높다.

“공, 공녀님 위험하지 않을까요?”

나는 로젠의 만류에도 골목길 바닥에 한 명이 쓰러지자 그곳으로 걸음을 살짝 옮겼다.

“걱정 마,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을 테니.”

“아? 네.”

철커덕!

“지금부터 아픈 환자들은 따로 격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감염자와 접촉을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마침 왕성에서 온 기사단이 나타나 사람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지금쯤 왕성에도 전염병의 존재가 보고가 된 모양인데, 나는 무조건 루미보다 빠르게 행동에 나서야 한다.

“공녀님 저희는 이만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곳에 계속 머물면 감염자와 접촉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렴.”

“아? 네.”

전염병이 창궐한 후 반년이 지날 무렵 치료제가 나타나 조금은 상황이 나아진다. 특히 로체스터 가문은 치료제의 원료가 되는 약초를 공급하는 일을 맡아 활약하는데, 그 과정에서 루미는 수많은 귀족들과 교류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명성까지 드높인다. 특히 병에 걸리지 않은 귀족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료제를 사재기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루미 그 악독한 년은 뇌물과 비슷한 느낌으로 귀족들에게 치료제 재고를 팔아넘기는 더러운 일까지 벌이는데 애석하게도 그동안 내 여러 차례의 삶에서 루미의 비리를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말을 믿으려 하기보다는 관계가 엮여 있으니 루미의 악행을 덮으려고 했던 거겠지…….’

반복되는 삶 속에서 얻은 교훈이라고는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앞서 나가 위치를 선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고 또 같은 인생을 반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