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주거구역

#Ep.29 우리가 남입니까?

제이기획 홍보팀 사무실, 모두가 퇴근하고 유은과 태현만이 남아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

“과장님, 퇴근 안 하세요?”

“어, 태현 씨! 퇴근해야지. 간만에 여유로운 날인데 칼퇴까지 이어가야지!”

“혹시 약속 있으세요? 없으시면 오랜만에 골뱅이에 소주 한잔하고 가실래요?”

“골뱅이에 소주?”

“네! 오늘 영업팀 이 과장님이 쏘신다고 하셨는데 과장님도 시간 되시면 같이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 골뱅이가 좀 땡기긴 한데….”

“약속 없으시면 같이 가시죠!”

“약속 있습니다.”

태현이 유은에게 같이 가자고 계속 조르는 사이 뒤에서 묵직한 저음이 치고 들어왔다.

“이 실장님…!”

유은이 당황하며 어색하게 정한을 불렀다.

“김 과장은 오늘 나랑 볼 일이 좀 있어서. 김태현 씨는 먼저 퇴근하지?”

정한이 날이 선 목소리로 태현에게 말하자 유은이 눈치를 보며 태현에게 먼저 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어어! 고생했어, 태현 씨.”

태현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의아했지만, 신입사원이 낄 상황이 아닌듯하여 조심스레 짐을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뭐에요 정말! 여기 사무실이에요. 태현 씨가 눈치라도 챘으면 어쩌려고 여길 와요?”

“그럼 내 여친한테 딴 놈이 치근덕대는 걸 보고만 있어?”

“아니 무슨 치근덕이에요? 후배가 선배한테 퇴근하면서 소주 한잔하자고 하는 거고만?”

“일이 끝났으면 빨리빨리 퇴근하고 회사를 떠나야지! 감히 하늘 같은 선배의 개인 시간에 개입을 해? 그 시간은 내 꺼 거든요? 김유은 씨?”

정한의 어처구니없는 억지에 유은이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한참 어린 친구한테 질투 그만하시고 나가시죠, 이정한 씨? 나랑 사무실에만 있을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어서 나가요.”

유은이 정한에게 팔짱을 끼면서 묻자 정한이 입가를 올리며 유은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로 복귀한 이현은 윤현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윤현선배 말대로 태은기획이 우리 쪽 거래처들을 다 접촉하고 다닌다면….

“팀장님 퇴근 안 하세요?”

김 과장과 이 주임이 퇴근하고 얼마 후, 수민이 외투를 챙겨 퇴근준비를 하며 이현에게 물었다.

생각에 잠긴 이현이 고개를 들어 퇴근하는 수민과 자리에 앉아있는 석현을 보며 말했다.

“아 네. 전 조금 정리할 게 남아서요. 윤 대리 먼저 퇴근해요. 한 대리도 어서 들어가세요.”

“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현의 말에 석현이 힐끗 수민을 바라보더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두 사람이 함께 사무실을 나가자 이현이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주원과의 채팅창을 열고 한참을 망설이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현 : 퇴근 언제 해요?’

‘주원 : 미안, 오늘 먼저 들어가요. 약속이 있어서 밖에 나왔어.’

“벌써 나갔다고? 누굴 만나는 거지…?”

약속이 있는 날은 꼬박꼬박 미리 알려주던 주원이기에, 이현은 이미 누군가 만나기 위해 나갔다는 주원의 메시지에 의아했다.

“급하게 잡힌 약속인가….”

“집에 갑니까?”

엘리베이터를 내려 회사를 빠져나오려던 수민에게 석현이 물었다.

“네. 집에 가야죠.”

“저녁… 먹고 갈래요?”

“네? 한 대리님이랑요? 왜요?”

“…….”

“아! 그게 아니고.”

석현의 저녁 제안에 당황한 수민이 자기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고 아차 했다.

“그냥요. 저녁 안 먹었잖아요. 쭈꾸미 괜찮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한 석현이 길 건너 보이는 쭈꾸미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니, 내가 먹겠다고 대답도 안 했는데 어디가…? 하 참 나…! 쭈꾸미라 먹고 간다, 내가.”

앞서 멀어져가는 석현의 등에대고 혼잣말을 중얼대던 수민이 헛웃음 치며 석현을 따라갔다.

쭈꾸미집.

철판에 올려진 쭈꾸미들을 휘적거리던 석현이 쭈꾸미 하나를 수민의 앞 접시에 놓아주었다.

“…고마워요. 한 대리님도 어서 드세요.”

“네. 먹고 있습니다.”

“…….”

“…….”

두 사람 사이의 숨 막히는 정적과 반대로 식당 안은 북적대는 손님들 덕에 시끌시끌하였다.

“한 대리님.”

“네.”

수민이 무표정으로 쭈꾸미를 휘적거리던 석현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피며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 팀장님이랑 한 이사님 관계에 대해서 뭐 아는 거 있으시죠?”

“…그게 아직도 그렇게 궁금합니까?”

“아니, 대리님은 뭐 알고 계신 것 같아서요.”

“모릅니다. 그러니 남의 연애는 그만 관심 끄시죠.”

“그럼 혹시 대리님이 팀장님 좋아하세요?”

“커헉…! 켁…!”

수민의 갑작스런 질문에 석현이 쭈꾸미를 먹다가 사레들린 채 기침을 했다.

한참을 기침하는 석현을 수민은 혀를 쯧쯧차며 물을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콜록! 고맙… 켁… 습니다!”

수민이 건네주는 물을 마신 석현은 가쁜 숨을 내쉬며 붉어진 얼굴로 수민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질문입니까?”

“그게 그렇게 놀랄 질문입니까?”

“네?”

“대리님이 정 팀장님한테 관심 있으신거냐구요.”

“…….”

“한 대리님 하루에 몇 번씩 멍하니 팀장님 보고 계시잖아요. 그것도 되게 아련하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그 모습만 보면 어휴, 무슨 드라마 남자 주인공인 줄?”

신입으로 입사해서 대리를 달기까지 석현은 이현을 동경했고 존경했다.

그러다 보니 좋아하는 마음도 남몰래 싹트게 되었고, 저도 모르게 힐끔힐끔 바라 본 적도 종종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녀를 짝사랑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보다.

수민이 눈치 채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일단 이 상황을 모면하고 봐야겠다.

“아닙니다.”

“그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 팀장님이 어렸을 때 잃어버린 친누나라도 되세요?”

“그저 상사로써 존경하는 마음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시죠.”

“저 오해 안 해요. 제가 직접 보고 느낀 점만 머리에 남길 뿐이죠.”

“윤 대리님 머리엔 온통 남들 연애만 가득합니까?”

“뭘 또 그렇게 비약해요?”

“매번 남의 연애 이야기만 하시길래….”

“남이라뇨? 우리가 남이에요?!”

석현의 비난에 수민은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소리쳤다.

쭈꾸미집은 수민의 외침에 일순 조용해졌고 두 사람 근처에 앉아있던 손님들은 힐끔힐끔 두 사람을 쳐다보며 수근거렸다.

수민이 주변을 의식하곤 물을 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러자 식당 내 사람들 사이에 웅성대는 소리가 커지며 각자의 대화로 돌아갔다.

“우리가 남이 아닙니까?”

석현은 붉어진 얼굴을 식히며 숨을 고르는 수민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제 말은…! 같은 팀원끼리 서로 연애를 하면 응원도 해주고! 남처럼 딱딱하게 굴지 말고 인간미 있게 좀 살자는 거죠!”

“제 연애에 윤 대리님 응원 필요 없습니다. 다 드셨으면 이만 일어나시죠.”

석현이 표정을 굳히며 벗어둔 자켓을 들고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이게 그렇게 정색할 일이야? 어휴 저 예민왕자!”

수민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석현을 따라나섰다.

정한과 유은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은 서로 맞잡은 채 공원을 걷고 있다.

“정한 씨, 요즘 한은 백화점이랑 우리 회사 안 좋은 거야?”

“음… 계약이 순탄하진 않지. 뭐 그래도 이사님이랑 정 팀장님이 잘하실 거야.”

“안 그래도 이현이 요새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한 이사님도 그래?”

“주주들 만나고 다니느라 정신없지.”

“근데 정한 씨는 같이 안 가 봐도 되는 거야?”

“보통 낮에 만날 땐 같이 가는데, 퇴근 시간 이후에 만나는 건 혼자 가는 게 더 편하다고 따라오지 말라셔. 눈치도 빠른 우리 상사님은 내가 약속 있는 거 같은 날은 주주들 약속도 그냥 직접 잡으시더라고. 난 이렇게 데이트하다가 이사님이 술을 많이 마시는 날에만 모시러 가는 거지!”

“역시 한 이사님. 얼굴도 능력도 배려도 진짜 갑이다! 그런 남자는 대체 누가 만나려나?”

“자기. 다른 남자 이야기하는데 눈이 너무 초롱초롱하고 맑은 거 아니야?”

“응? 내 눈이 그랬어?”

“어! 완전 반짝거리고 초롱초롱하잖아 지금!”

“에이, 아니야. 내 눈 원래 늘 초롱초롱하거든요? 아무튼, 이현이는 좋겠다. 그런 상사랑 프로젝트도 같이하고….”

정한이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유은을 노려본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런 정한의 표정을 발견한 유은이 피식 웃으며 까치발을 들고 정한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