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들켜 버린 정체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서 생전 해본 적도 없는 눈 안대를 해보기도 하고, 백색소음이 좋다 해서 비 소리 어플을 깔고서 듣기도 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잠이 안 와서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렸다. 누워 있으니 자꾸만 잡생각이 몰려왔다.

“에잇!”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잠 안 올 때는 쓸데없는 짓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지숙은 거침없이 파우더룸으로 다가갔다. 화장대 서랍장을 열자, 갖가지의 명품 매니큐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한 대로 역시 이런 것도 명품이다 싶었다.

“이게 하나에 얼마야. 도대체.”

그중에서 맘에 드는 색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익숙하게 소파에 자리 잡고 앉아서는 발가락 사이에 화장 솜을 정성스레 끼웠다.

“오늘은 보라색 삘인데?”

펄 가득한 보라색 매니큐어를 집어 들었다.

“네가 내 대신 호강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20대 때는 화려한 색으로 네일 케어도 받기도 했던 것 같았다. 이런 추억마저도 만들어 낸 추억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매니큐어마저도 값비싼 명품이라서 그런지 괜히 발림도 좋은 것 같았다.

“이쁘당.”

엄지발가락에 보석을 박아 놓은 것 같았다. 한결 기분이 좋아져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역시 잠 안 올 때는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그때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주무십니까?]

그에게서였다. 메시지 알림에는 ‘차은호’ 석 자로 수정해 놓았다. 그 이름마저도 어떻게 ‘차은호’인지 그의 이름을 보자마자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뇨. 쓸데없는 짓 중이에요.]

[무슨 일하고 계신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비밀인데요.]

[무슨 비밀인지 궁금한데요?]

[궁금하시라고요.]

누구의 기억이든, 만들어 낸 기억이든 누군가와 이렇게 톡을 주고받은 지가 얼마 만인지…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두근두근. 찾아온다는 말이 이렇게 달콤했던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럴 수 없었다.

[안 돼요. 지금 머리도 엉망이고.]

[머리가 얼마나 귀엽게 엉망인지 보고 싶은데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장난기 가득한 답이 왔다. 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미쳤나 봐…. 웃음이 멈추지 않고 새어 나와 괜히 한번 정색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 한잔을 마시려다가 엄지발톱에 칠해진 매니큐어가 테이블에 묻고 말았다.

“…힝. 다 차 비서님 때문이잖아. 오랜만에 잘했는데.”

영롱한 빛깔에 흠집이 나 있는 것이 보자 아쉬운 마음에 입에서 볼멘소리가 절로 나왔다. 리무버로 지우고 있자, 그에게서 메시지가 또 왔다.

[전무님.]

[보고 싶습니다.]

살짝 간격을 두고 나뉘어 온 톡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가도 돼요?]

***

최대한 꾸민 티 나지 않게 메이크업을 하고서 그의 집 문 앞에 섰다. 그의 집에는 처음 가보는지라 조금 설레는 마음이 앞섰다. 딩동, 벨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까 싶었다. 제가 눌러 놓고 그 소리에 놀라 민망했다.

편안한 차림의 그가 말간 얼굴을 하고서 문을 열어 주었다. 항상 깔끔한 차림새의 그를 보다가 앞머리를 내린 그를 보니 한층 어려 보였다.

“머리….”

“…이상합니까?”

“아뇨. 너무 어려 보여서.”

“그래도 전무님보다는 한 살 많습니다.”

“아, 맞다. 제가 아직 하윤슬이라는 것이 자각이 안 돼서 서른여덟 살인 줄 알았어요. 너무 아기 같아서 놀랐네요.”

“아기요? 쪽쪽이라도 물고 있어야겠는데요?”

짓궂게 농담을 내던지는 그에게 귀엽게 눈을 흘기고서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손으로 두들겼다. 그러자 그가 그 손을 잡고서 끌어당겼다.

“안에는 안 들어오실 겁니까?”

“이렇게 보니까 좀 짓궂어요?”

“전무님의 이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은호가 뾰로통한 지숙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서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여태 어떻게 참았데요?”

“그래서 전무님 집 앞을 서성거렸는데, 모르셨어요?”

“제가 인격이 여러 개이긴 해도 투시 능력은 없어서요.”

등 뒤로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외간 남자 집에 오셨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여러 개 인격이 있어서 어떤 인격이 나올지 몰라요. 조심해요.”

지숙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여전히 마주 잡은 손을 잡고서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끔 잡아끌었다. 힘없이 그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가면서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와. 무슨 모델 하우스인 줄?”

“재미없죠?”

“네. 생각보다요. 막 다른 여자 흔적이 있을 줄 알았는데,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깨끗한 거 아녜요?”

같은 집이 맞는 건지, 딱 필요한 가구만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진초록색의 몰딩이 집 자체 분위기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앉으세요.”

“안방 구경해도 돼요?”

“감당하실 수 있으시면요.”

“헐. 무슨 짓을 하려고?”

“글쎄요. 가보시면 아시지 않을까요?”

“그러면 내가 못 갈 줄 알고요?”

지숙은 콧방귀를 뀌고서 안방으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것 봐요. 감당 못 하실 거라고 했잖아요.”

분명 거실과 같이 심플한 침대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안방에는 온 사방이 책들로 가득했다.

“책 냄새. 작은 도서관 같아요.”

곳곳에 꽂혀 있는 서적들에서 희미한 인쇄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도서관에 가면 맡을 수 있는 그리운 냄새였다.

“왜 이렇게 책 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안정이 되는 걸까요?”

“…좋은 기억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자신의 기억이 만들어진 허구의 기억인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경험한 기억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말대로 도서관과 좋은 기억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편안하게 진정되는 느낌을 받았다.

“전 언제쯤이면 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조만간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그가 안아 왔다. 목 뒤로 그가 숨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야릇한 느낌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결혼은 어떻게 될까요?”

목 뒤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간지러운 느낌에 다시 한번 몸을 살짝 비틀었다. 그래도 그는 안은 두 손을 풀지 않았다. 단단한 그의 팔이 주는 안정감이 기분 좋게 만들었다.

“윤진우 대표님.”

“자꾸 제 앞에서 딴 남자 얘기하실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가 지숙의 몸을 돌려 서로 마주 보았다. 입은 여전히 세상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은 수컷의 눈을 하고 있었다. 지숙은 그의 색다른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흐렸다.

“제가 딴 남자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계속 들이대니까.”

“그래서 마음이 좀 흔들리셨어요?”

“뭔 소리예요? 절 어떻게 보고.”

“흔들리셨다면, 저도 들이대 보려고요.”

두근두근. 원래 이렇게 직설적이었나 싶을 정도로 감정에 솔직했다. 재미교포라더니 감정 표현하는 게 거침이 없는 건가 싶었다.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는 것만큼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이댈 건데요?”

그녀의 도발이 끝나자마자, 그는 그녀의 턱을 끌어당겨 입을 부드럽게 맞춰왔다. 그의 달콤한 혀가 집요하게 지숙의 입을 가르고 들어왔다. 지숙은 수줍지만 그가 리드하는 대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들이댈 겁니다.”

“이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요.”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에 은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반칙 아닙니까?”

“반칙이라면 저 잡혀 가나요?”

“저한테 잡히시겠어요?”

지숙은 대답 대신 그의 품에 힘껏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