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지 않을 봄
호위무사들의 거처에서 함께 생활하던 비랑에게 거처를 옮기라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천태궁 황제의 침소와 가까운 곳에 따로 그녀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전례에 없던 특혜였다.
후궁이 아닌 이상 황제가 친히 거처를 마련해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이 일을 두고 황제가 독특한 취향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뭉스러운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언젠가 아진이 황태자였던 시절에 그가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잠깐 떠돌다 사라진 적이 있었다.
워낙에 아진과 비랑의 인물이 뛰어난 데다 비랑이 여인보다 고운 선을 가지고 있다 보니, 둘 사이에 묘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었다.
거기에 더해 아진의 가례마저 늦어져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 나갔었다. 그러다 대사성의 무남독녀 홍연이 황태자비 자리에 내정되어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알려지며 민망하기 그지없는 소문이 잠잠해졌다.
그런데 아진이 황제에 오르고 황태자비가 되었어야 할 홍연이 금혼령이 거둬지며 뜬구름 잡는 신세가 되어 버리자 다시 비랑과 아진에 대한 해괴망측한 소문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소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바로 비랑의 처소를 황제의 곁으로 옮긴 일이었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쉰 비랑이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문은 그녀의 귀에도 여지없이 들어왔다. 그래서 아진이 이번 일만큼은 조금 더 신중을 기하여 결정하시라 고하였다.
지금은 이런 하찮은 것에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황권을 견고히 다져야 할 때였다.
백성들이 새 황제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백룡의 후예 그 핏줄이 대대로 다스려온 나라 호연국은 모든 것이 평화롭고 풍요로웠다. 신비로운 영물의 보살핌으로 나라가 부강할 수 있었다고 백성들은 믿어 왔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새 황제도 태평성대로 이끌어 주기를 백성들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한데 등극하자마자 자신과 얽혀 아진이 추한 소문에 오르내리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비랑은 마음이 무거웠다.
하늘을 가득 채운 무성한 별빛이 오늘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심히 입술 주변을 손으로 쓸던 비랑이 움찔하며 손을 멈췄다. 문득 아진이 제게 입맞춤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에 입술이 화끈거리며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금단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을 가지겠다던 아진의 말이 귓속을 맴돌았다.
“아니 될 일이야.”
절로 들뜨기 시작한 마음을 비랑이 애써 짓눌러 없애려 했다. 가져서는 안 될 마음이며 해서는 안 될 생각이었다.
“그분은 나의 주군이시다. 내가 목숨을 다해 지켜 드려야 할…….”
부부의 연을 맺을 운명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에 의해 끊어져 버렸다. 군신의 관계.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숙연히 그를 받아들이기로 비랑은 다짐했었다. 신주국으로 떠나기 전 아버지 가운정의 말을 듣고 그리 마음을 굳혔었다.
하늘을 속였다 했다. 전대 황제를 속였고 지금의 황제를 속이고 있었다. 그것은 죽어 마땅한 죄에 속했다. 신하 된 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황태자비가 되지 않으려 했다는 것 자체가 역심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아진을 황태자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그의 비가 되는 것을 거부한 것이라 여길 수 있다는 뜻이다.
역심은 대역죄에 속했다.
비단 그것은 비랑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문과 그에 속한 식솔들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지켜야 할 비밀이었다.
마음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 여인인 것이 들통 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비랑은 스스로에게 무수히 채찍질을 했다.
하지만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비랑은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황제에게 속수무책으로 휩쓸리고 있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이리하면 아니 된다, 옳은 처사가 아니시다 아진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며칠 전 황명을 받은 자들이 호위무사의 거처로 들이닥쳐 비랑의 짐을 막무가내로 챙기려 했다. 막아서고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황명을 받고 온 자들이었다. 명령을 어기면 벌을 받는 것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무를 완수하려 했다.
어쩔 수 없이 비랑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들에게 짐을 빼앗겨 억지로 끌려가느니 제 발로 가는 것이 나았다. 잠시의 반항은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거역은 있을 수 없었다. 황제가 고집스럽게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비랑은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였다.
그리고 비랑의 짐 속에는 남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 없이 비랑은 황제의 명에 따라 거처를 아진의 침소 가까이로 옮겼다.
“밤 시중드는 애첩이라. 하아.”
교대를 하고 나오는 길에 궁인들이 모여 쑥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비랑은 듣고도 모른 척 무심히 제 거처로 들어섰다. 하지만 내내 그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동안은 그 어떠한 이야기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여인인 것을 알았고, 아직 저를 사내로 알고 있을 아진의 받아들이기 힘든 고백도 들었다.
그리고 연무장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 손가락에 흐르는 피를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빨아들이던 아진의 행동이 차례로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심장이 서걱거렸다. 제 얼굴을 손등으로 누르며 비랑이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려 애썼다. 무심해져야 한다.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수없이 속으로 되뇌어 보지만 그것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던가.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마음이고 절로 반응하는 몸인 것을.
암울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랑의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니 내일 날이 좋을 듯하구나.”
갑자기 들린 아진의 목소리에 비랑이 흠칫 놀랐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미처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번쩍 정신을 차린 비랑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었던 것이냐?”
아진이 비랑의 어깨 위로 손을 내려 지그시 눌렀다. 그대로 앉아 있으라는 뜻이었다. 하나 황제가 서 있는데 신하 된 자가 앉아 맞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폐하.”
곤란한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며 비랑이 제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잡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진이 시선을 내려 겹쳐진 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인 비랑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성급한 마음에 황제의 옥체에 함부로 손을 대고 말았다.
“송구하옵니다.”
비랑이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두려 했다. 어찌 이런 망극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는지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한데 손이 제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비랑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제 손을 응시했다. 그 손이 아진의 손에 갇힌 채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그냥 앉아 있으라 하였다. 한 번을 고분하게 듣질 않는구나.”
“하오나.”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비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예라는 것도 황제의 말보다 앞설 수는 없음이란 것을 깨달아서였다.
“어인 일이시옵니까?”
말머리를 돌리며 비랑이 물었다. 그사이 잡힌 손을 빼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아진이 오히려 잡은 손을 더 꽉 쥐며 아래로 내렸다. 그가 비랑의 곁에 붙어 앉았다. 비랑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만류하려 했다.
“바닥이 찹니다, 폐하.”
“찬 바닥을 삼가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니더냐?”
“예?”
그게 무슨 말이냐 반문하는 비랑에게 아진은 그저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곤 까만 밤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걱정스럽게 그의 앉은 자리를 힐끔 살피던 비랑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의 찬 냉기가 옥체를 상하게 할까 심히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거처 바로 앞 계단에 주저앉아 있던 참이었다. 워낙 아무 곳이나 가림 없이 앉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던 비랑이었다. 복잡한 심사를 다스리려 나왔다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계단에 철퍼덕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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