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부

#1) 역모(逆謀)의 잔재들

‘까아악, 까아악, 까아악…….’

산속도, 들판도 아닌데 까마귀가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저잣거리, 사람들이 많음에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고 매서운 눈으로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까마귀 눈에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자기의 먹잇감인 장대에 걸린 피범벅인 머리통이 보일 뿐이었다.

“어머니…….”

인파(人波) 속에서 장대에 걸린 머리를 보며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복 씨 옆으로 열대여섯으로 보이는 도령이 다가왔다. 눈길이 장대로 간 도령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빨리 참수형에 처해지다니…… 분명 뭔가가 있는 게다. 아무리 한들 잡아들인 지 며칠이 지났다고 벌써 참수(斬首)한단 말이냐.”

복 씨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장대의 맨 위를 보다가 웅성이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웃는 얼굴로 세책점에서 인사 나눈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지아비의 죽마고우(竹馬故友)로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다. 그런 이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네 아버지가 한양에 있었더라면 이리 허망하게 보내지 않았을 것을…….”

복 씨는 지방관으로 가 있는 지아비의 빈자리를 느끼며, 아무것도 못 한 자신을 자책(自責) 하였다.

“어머니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집에서 증좌까지 나왔으니 말입니다.”

“……서신 하나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너무 성급한 처사가 아니더냐.”

복 씨는 낮게 날고 있는 까마귀에게 가 있는 시선을 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헌데 식솔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역적으로 몰렸으니 불 보듯 뻔하지 않겠느냐, 참형이 아니면 관비가 되겠지.”

복 씨는 예 씨 부인의 얼굴을 떠올린다. 정실부인이 죽고 몇 년 전 후처 자리로 들어온 예 씨 부인은 얼마 전부터 복 씨가 만든 모임 ‘낙서(樂書)’에 나오기 시작했었다.

“딸은 도망쳤다는데…… 붙잡히지는 않겠지요?”

“……그게 걱정이구나. 그 어린 것이 어미도 없이…….”

다행히도 다섯 살 난 딸은 현장에 없어 잡히지 않고 몸을 숨겼다 들었다. 허나 어디로 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예 씨 부인이 ‘낙서(樂書)’모임에 딸아이를 데리고 온 건 두어 차례, 어미보다 아비를 더 좋아해 자신이 굳이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며 웃던 예 씨 부인이었다.

아비, 어미를 닮아 용모(容貌)가 예쁘고 활달한 아이로 복 씨는 기억한다.

‘투두툭…….’

차가움과 함께 얼굴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복 씨는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허나 곧 도령, 복 씨 큰아들 호헌이 제 손에 들린 지우산을 펴 복 씨 머리 위로 씌웠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빠르게 뜨기 시작했다.

“비가 올지 어찌 알았느냐?”

복 씨는 호헌의 얼굴과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지우산을 쓴 이는 자신들뿐이다.

“그냥요.”

“싱겁기는.”

복 씨는 제 미소를 닮은 아들의 얼굴을 보며 슬쩍 웃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았다. 휑해진 주위, 장대에 걸린 머리 위로도 비가 내렸다. 머리카락이 젖고 눈에 빗물이 스며들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가자.”

복 씨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돌아섰다.

몇 발자국 가지 않았는데 빗줄기는 굵어져 땅을 사정없이 때렸다.

**

꼿꼿하게 세워진 붓은 주인의 의지를 담아 위아래로 움직였다. 하얀 종이 위로 먹물이 스며들며 한 자, 한 자 글이 써 내려져 갔다.

글이 종이에 채워지자 붓이 내려졌다. 종이를 들어 훑어보는 눈빛이 빛난다.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종이를 경상 위로 내려놓은 이는 꽃다운 나이로 보이는 소녀이다.

소녀는 종이를 조심스레 접어 봉투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순아! 끝순아!”

방문을 열면서 종비(從婢-계집종)를 부르는 소리가 컸다.

“어디 간 거지?”

소녀는 당혜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서 안채 여러 곳을 살폈다. 허나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안성댁만 보일 뿐이었다.

“무슨 일로 그러세요. 아가씨?”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을 나오며 안성댁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소녀는 서찰을 급히 뒤로 숨기며 말했다.

“어머니, 나으리께서 술상 봐오라 하세요.”

마침 중문으로 들어서는 끝순이는 소녀의 뒷모습에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서찰을 보고 웃었다.

“누가 오셨느냐?”

“처음 보는 분이셨어요.”

안성댁은 알았다는 듯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리 와봐.”

안성댁 모습이 사라지자 소녀는 얼른 끝순이 팔을 낚아채 마당 구석으로 갔다.

“왜 이러세요?”

끝순이 물음에 소녀는 답 대신 서찰을 얼굴에 들이밀었다.

“……휴우.”

“어찌 한숨인 게야?”

소녀는 봉투를 보자마자 한숨 먼저 쉬는 끝순이에 눈썹이 휜다.

“몰래 서찰 전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들킨 뻔한 게 벌써 세 번째라구요.”

“들킨 뻔, 하였지 들키지 않았지 않았느냐.”

“예에?”

끝순은 소녀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끝순아,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단 말이다. 응? 제발.”

올라갔던 눈썹을 축, 내리고 콧소리를 내는 소녀의 모습에 끝순이 이내 웃고 만다.

“비밀을 알고 있는 쇤네가 잘못이네요.”

왜 자기가 이 비밀을 알게 되었을까 하는 표정으로 서찰을 건네받은 끝순은 중문으로 향했다.

“도련님께 다른 전할 말은 없지요?”

“응, 며칠 뒤 만날 거니까…….”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갔다 올게요.”

끝순이는 익숙한 소녀의 표정을 보다가 중문을 빠져나갔다.

“끝순아.”

소녀가 막 섬돌로 올라서려는데 부엌에서 안성댁이 술상을 들고 나왔다.

“내가 심부름시켰는데…… 술상 내가라 부른 거지? 내가 내가겠네.”

소녀는 도로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닙니다. 아가씨.”

“괜찮네. 이게 뭐 어렵다고.”

소녀는 술상을 들고 사랑채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고적(孤寂)늑한 마당을 지나 소녀는 사랑채 섬돌에 발을 올렸다.

“아버…….”

“정말인지 자네 대단허이. 일이 이리 쉽게 마무리될지 몰랐네.”

“과찬의 말씀입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사랑방에서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튼, 박 현령(縣令-종5품, 외관직)이 오기 전에 연호, 그자를 처리해서 다행이네. 박 현령이 오면 일이 꼬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낯선 이의 입에서 아는 이들의 이름이 나오자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불어 술상을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