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오가 테이블에 놓인 물이 든 유리잔을 들었다. 오전부터 차가운 에어컨에 머리가 아파오더니 차가운 물 역시 역하게 느껴져 미간을 모았다. 감기가 오려나 보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러나 태훈의 모친은 그녀가 숨을 다스릴 잠깐의 시간조차 기다려 줄 여유가 없나 보다.'“돌려 말하니까 못 알아듣나? 내가 태훈이 누나가 온다는 것 조용히 해결하려고 말렸어요. 그 아이가 오면 회사 사람들도 많을 텐데 좋은 모습 못 보여 줄 것 같아서.”'말을 하던 그녀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윤오의 시선도 그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선 달리기 선수처럼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달려올 기세였다. 눈물 나게 고마운 배려에 그녀가 쓰게 웃었다.'그녀의 회사 건물 안 커피숍이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사람들 눈치가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에 준비를 하듯 천천히 말을 꺼내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시선을 돌리는데 커피숍의 투명 유리 밖으로 로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많은 회사들이 위치한 이 건물에는 항상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유로운 커피숍과는 대조적이다. 그들에게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들 사이 익숙한 누군가가 보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다. 김태훈.'반가운 마음과 초라한 자신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눈이 마주쳤다. 그도 그녀처럼 한 번에 서로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잠시 멈추는가 싶던 시선은 그대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단 몇 초의 시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며 손끝이 떨려왔다. 분명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 시선이 마주쳤다.'뭘 기대한 것일까. 뭘 바란 것일까.'그의 모친과 누나의 매몰찬 표정과 차가운 백 마디 말보다 잠깐 동안 마주친 그의 눈빛에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기분이다.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기에 그의 눈빛은 너무도 정직했다. 윤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신기하게 마음속 깊은 곳의 한 가닥 미련한 희망 때문에 초조하고 답답하던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김 선배님이 여러 가지로 많이 도와주신 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곧 결혼을 해서 감사함도 다 전하지 못할 것 같아요.”'태훈 모친의 눈빛에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녀가 그런 당황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물을 마시면서 그의 누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태훈의 누나에게서 나온 것인가 보다. 그 모습을 보며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전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김 선배님이 배려해 주고 계시긴 하지만 아직 신입이라 자리를 오래 비우지 못해서요.”'조금 전의 매서움을 감춘 인자한 웃음으로 태훈의 모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 그래요. 많이 바쁠 텐데 괜히 시간만 뺏었네. 그럼 결혼식 때 태훈이 통해서라도 꼭 연락해요. 이것도 인연인데……. 아. 놔둬요. 계산은 내가 할 테니.”'윤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계산서를 들고 나왔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여전히 그의 누나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그러나 신경 쓰고 싶지 않다. 태훈의 누나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건 지금의 상황이 사실이건 이제 그와는 상관없으니까. 그와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