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그룹 뉴욕 본사 빌딩 외벽 유리에 붉은빛과 오렌지빛, 그리고 사랑스러운 핑크빛 구름이 가득한 청명한 가을 하늘이 고스란히 비쳤다. '맨해튼 한가운데 있는 62층의 초현대식 복합 빌딩은 전자제품 제조로 시작해서 투자금융, 보험, 부동산, 호텔체인 사업까지 광범위한 부야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기업인 챌린지 그룹의 뉴욕 본사 건물이었다.'그 건물의 58층에 위치한 챌린지 그룹 미주지역 담당 닉 개리슨 부사장 사무실 유리창 안으로 늦가을 오후의 햇살이 깊이 들어왔다. 유리창을 투과한 부드러운 태양빛이 컴퓨터 작업 중인 재인()의 크림빛 피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재인은 문득 고개를 들어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사이로 장밋빛 빛줄기가 부챗살처럼 퍼져 나가며 마천루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일몰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게 만들 정도였다. '헤이즐넛빛 눈동자에 황금빛 햇살이 투명하게 비쳤다. 일몰을 바라보는 아련하게 꿈을 꾸는 듯한 눈동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와 묘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멀리에서부터 검은 구름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게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뉴욕의 가을은 아쉬울 정도로 짧았다. 낮에는 덥다고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빌딩 숲 사이로 사라져 가는 태양을 조용히 지켜보던 재인은 곧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아련한 눈빛으로 불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던 가냘픈 여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냉정한 영민함이 드러난 이마와 조용히 한곳에 집중하는 시선은 새하얀 실크 셔츠와 펜슬 스커트와 더불어 그녀를 엘리트 커리어우먼의 표상처럼 보이게 했다. 키보드에 얹어진 긴 손가락이 신속하게 움직인다. '하늘에 어둠이 내리면서 아르 데코 양식의 크라이슬러 빌딩에 불이 들어왔다. 수천, 수만 개의 별빛을 뿌려 놓은 것 같은 야경이 펼쳐졌지만 재인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재인.” '예쁜 금발의 젊은 여자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재무 담당 이사 엘레인 스펜서의 비서인 캐롤이었다. 중역 사무실이 모여 있는 58층에서 캐롤만이 재인의 유일한 친구였다. 재인은 캐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지금까지 컴퓨터로 작업 중이던 파일을 저장하고 화면을 닫았다. 재인이 다루는 업무는 회사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이었고, 그녀의 상관인 닉 개리슨 부사장의 지시가 없는 한 같은 회사 직원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캐롤이라고 해도 함부로 보여 줄 수 없었다. '“퇴근 안 해?”'“퇴근?”'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재인에게 캐롤이 인상을 써 보였다. '“뭐야,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거야?” '캐롤은 재인의 책상에 엉덩이를 기댔다.'“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개리슨 부사장님도 안 계신데 너무 열심히 일한다. 뛰어난 보좌관은 요령껏 업무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너처럼 지나치게 유능하면, 상사가 얼씨구나 하면서 더 힘들게 만든다고.”'재인이 미소를 지었다. '“내일까지 필요한 자료라서 그래.”'캐롤이 안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봐. 네가 너무 능력을 드러내니까 개리슨 부사장이 몽땅 너한테 떠넘기는 거잖아. 너 혼자서 그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무리라니까.”'“오늘까지인데 뭐.”'“오늘까지 지옥이었으니까 문제지. 입사한 지 한 달도 안된 너한테 너무 지나친 처사라고. 하여간 개리슨 부사장님, 해도 해도 너무한다.”'“어쩔 수가 없잖아.”'재인이 개리슨 부사장의 보좌관으로 출근을 한 지 1주일이 되기도 전에 수석보좌관인 케이트 워크가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개리슨은 새로운 수석보좌관을 임명하지 않고 케이트가 회사에 복귀를 할 때까지 재인에게 책임을 맡겼다. 덕분에 재인은 케이트에게 일에 대한 전반적인 인계를 받을 겨를도 없이 막중한 업무를 떠맡게 되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재인은 퇴근시간을 지켜 본 적이 없었다.'캐롤이 안됐다는 얼굴로 재인을 바라보았다.'“전에 하던 일하고 완전히 달라서 힘들지?”'재인은 고개를 저었다.'“업무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적인 패턴은 같아. 자료 수집하고 분석하는 거니까.”'재인은 다국적기업인 챌린지 그룹에 입사하기 전에는 국제적인 기업형 로펌인 L&J의 공동 경영자 제프 개리슨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뛰어난 경력과 능력을 가진 초 엘리트 인재들이 수두룩한 회사에서 재인은 몇 명 안 되는 동양계 직원 중 더더욱 극소수인 동양계 여자 직원이었다. '캐롤이 책상에서 엉덩이를 뗐다.'“우리 ‘위스키’에 갈 건데 같이 갈래?”'‘위스키’는 타임스 스퀘어 W 호텔 바로 근처 커리어우먼들과 비즈니스맨들이 몰려드는 우아한 분위기의 바(bar)로 챌린지 그룹의 임원 보좌관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재인의 입사 축하 파티가 열렸던 곳도 그곳이었다.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고개를 저었다.'“미안. 아직 일이 좀 더 남았어.”'캐롤은 재인이 커피를 따르는 것을 보며 속으로 부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여자가 보아도 재인은 은은한 관능미를 풍기는 신비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 맑은 눈동자는 늘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었고, 조용한 울림의 투명한 목소리는 가슴이 시릴 정도로 푸른 호수를 연상시켰다.'동양 여자 특유의 섬세한 이목구비와 헤이즐넛빛 테두리의 투명한 눈동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재인이 책상에서 일어섰다. 168센티미터의 늘씬한 키는 좁은 어깨와 한숨이 나올 정도로 가는 허리 때문에 더 크게 보였다. '“하여간에 워크 여사께서 빨리 돌아와야 네가 숨을 돌릴 수 있을 텐데, 큰일이다. 개리슨 부사장님은 언제 귀국이지?”'닉 개리슨 부사장은 LA로 출장 중이었다.'“오늘 밤 비행기로 도착한다고 연락 왔어.”''푸른 번개가 어두운 하늘을 갈라놓았다. '재인이 방대하고 복잡한 자료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마침내 결과를 도출해 냈을 때, 창 너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일하는 것을 닉은 좋아하지 않았다. 닉은 재인의 안전을 늘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뉴욕 시장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로 도심의 치안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뉴욕은 여전히 거친 도시였다. 닉은 늦은 밤 여자 혼자 텅 빈 사무실에 남아 있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챌린지 그룹의 뉴욕 본사 빌딩은 최첨단 보안 시스템을 갖춘 복합건물이고, 특히나 58층은 그룹 내 최고 임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허가받은 ID 카드 없이는 출입을 할 수 없으니 안전한 곳이라 할 수 있었다.'그런데도 닉은 재인의 안전에 대해서 예민했다. 그는 회사의 상사라기보다는 마치 아버지처럼 그녀를 세심하고 돌보고 챙겼다. '마치 아버지처럼…….'닉은 65세의 나이보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나이를 먹어 가면서 품격이 더해지는 중후한 매력을 지닌 남자였다. 한 달 전, 재인이 닉의 보좌관으로 전격 스카우트된 이후 회사 내에서는 그녀와 닉 개리슨 부사장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스물여덟 살의 그녀와 닉은 아버지와 딸 정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닉은 아직도 남성적인 매력을 지닌 남자였고, 재인은 다른 백인 여자들보다 핸디캡이 많은 동양 여자였다. 닉은 재인을 L&J 로펌에서 챌린지 그룹으로 전격 스카우트해서 자신의 보좌관으로 만들었고, 의심이 갈 정도로 재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중대한 업무를 일임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는 닉과 그녀의 관계가 충분히 의심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맨해튼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비에 젖은 창문 앞에 서서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 오후 58층과 57층의 중역 보좌관들이 휴게실에 모여 ‘재인의 소파 승진’이란 주제로 열심히 수군거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자신을 두고 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장 안으로 차마 아무렇지 않게 등장할 수가 없었다. '친구인 캐롤이 다른 보좌관들에게 오해하지 말라고 열심히 변호했지만, 재인은 조용히 휴게실 문고리를 놓고 돌아섰다. 사실은 캐롤 역시 내심 개리슨 사장과 재인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미간 사이에 주름이 새겨졌다.'의혹, 질투, 그리고 멸시의 시선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뉴욕이든 서울이든 마찬가지였다. ''''비, 그리고 맨해튼'시선이 닿다'다가오는 사람'물결치다'거부할 수 없는 유혹'차갑게 얼어 버린 열정'부딪치는 시선'너를 향한 마음'진실의 얼굴'기다려 온 운명'새로운 운명의 시작'뜨거운 열정'작가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