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상 나는 어머니에게 맞춰드려야 한다는 거지.”'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긴 했지만 납득 안 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정하원이 정말 입양되었고,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사람의 도리상 어느 정도 맞춰드려야 하는 건 인정할 수 있다. 내 일이 아니라면 100퍼센트 인정할 수 있겠지만, 내 일이므로…… 한 70퍼센트 정도는 인정 가능하다.'“그럼 지금 나랑 만나면서…….”'“어머니가 다른 여자를 만나라면 다른 여자도 만나야 해.”'“그러니까 정하원 씨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닌 건 아니지.” '“에?”'방금 한 말이 무슨 말이지? 아닌 게 아닌 건 아니지 아니하다고?'“정말 그러고 싶었다면 어머니가 어떻든 무시했을 거야. 한 번 해봤는데 내 맘이 좋지 않아서.”'정하원이 싱긋 웃었다.'“관두기로 했거든.”'5초간 머릿속에 공백이 있었다. '“미래를 장담 못해주는데 내 옆에 있으라고 말하기 나도 곤란하다고. 게다가 네가 상처 입는다고 말하면 더더욱 곤란하지.”'이 남자가 말하는 ‘곤란’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곤란’과는 좀 다른 거 같지만, 이 남자 자체가 보통사람과 다르기는 하다.'“그러면 결혼 안 해요?”'“못 하지.”'이제야 언젠가 화연이 제시했던 의문이 풀렸다. 완벽한 남자들은 모두 결혼했는데 어째서 완벽한 정하원이 남아있는가? 정하원은 결혼을 못할 아주아주 중대한 외부적인 장애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공개적으로는 연애한다는 말하기도 어렵고 너, 챙겨주기도 어려워. 공개적이지 않을 때는 뭐든 하지만.”'정하원이 싱긋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평상시와 똑같이 웃었는데 가슴께가 애잔하게 쓰려왔다. 늘 지나치리만큼 뭐든 쉽게 굴었던 건 이미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일까?'문득, 무척이나 위험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궁금해졌다. 이 남자는 얼핏 뭐든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뭐든 쉬워 보이고, 자신만만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도 정말 그런 걸까? 이 사람은 지금도 마치 무척이나 쉬운 것처럼 나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말 이게 이 사람의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갑자기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해졌다.'“뭐든이요?”'“응. 뭐든.”'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저 눈이 언제나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애당초 기대 같은 걸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놀라울 만큼 뻔뻔했던 것도 자신감이 아니라, 기대가 없기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진심이 없는 게 아니라 진심이 되기 어려웠던 거다.'“그럼 좋아요.”'“응?”'정하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 만나자고요.”'“응?”'“나도 정하원 씨, 맘에 들어요. 그러니까 제대로 만나 봐요.”'잠깐의 간격.'“하지만…….”'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었다.'“내가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그러기 싫어요?”'정하원이 눈을 깜빡였다. 검은 눈동자가 깊어졌다가 고요해졌다가 다시 깊어졌다.'“왜?”'한참 후 정하원이 제기한 의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왜.'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남자, 정말 싫다. '처음 이 남자를 만난 그날부터, 그 다음 만남, 그 다음…… 또 그 다음까지. 이 남자는 군더더기 없이 간단하게 나에게 파고들어오고 쉽게 나를 흔들고 단단하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 모든 과정은 지금 ‘왜’라는 단순한 질문처럼 고민이 없었다. 고민 없이, 주저하지 않고 나의 가장 연약한 부분까지 끄집어낸다.'“생각해봤는데 어차피 연애라는 게 보증서 받고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다칠 수도 있고 그런 게 맞는 거 같아요. 안전한 연애가 어디 있겠어요?”'정하원이 고개를 기울였다.'“내가 정하원 씨가 좋거든요.”'말하는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깨달았다.'인생이 어떤 건지 나는 아직 모른다. 사람이 왜 사람에게 빠지는지도 나는 아직 모른다. '나는 정하원의 단점을 100만 가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장점 100만 가지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떠나서 나는 정하원이 좋다. 정하원과 함께 있고 싶다. 그가 곁에 없는 동안 내내 그가 보고 싶었다. '화가 나고 괘씸하고 분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가장 깊은 곳의 진실 하나……. 나는 정하원이 좋다. '눈을 감았다 뜨자 바로 코앞에 정하원이 서 있었다.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터라 약간 움찔했는데 등 뒤에 팔이 감겼다.'정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내가 정하원의 품에 안긴 것은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살을 맞대는 면에 있어서는 꽤나 궁합이 잘 맞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지금의 포옹은 달랐다. 내 코가 그의 어깨에 파묻혀있다는 면에서, 그가 내뱉는 낮은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질인다는 면에서는 똑같을지 모르지만 그 어느 때와도 지금은 달랐다. '나는 처음으로 정하원의 마음에 닿은 것 같았다.'처음으로 정하원의 마음을 안아준 것 같았다. 쉬운 듯 의외로 어려웠던 그의 마음을.'물론 여기서 감동적으로 끝나진 않았다. 항상 말하지만 영화랑 실제는 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