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7시. '여의도 방송국 근처 아담한 카페의 문이 급하게 열렸다. 뛰어온 게 분명한, 숨을 몰아쉬는 남자의 눈이 실내를 부지런히 살핀다. 그리고 그 시선이 창가 구석진 자리에 새침하게 앉아 잡지를 들여다보는 여자에게 머물렀다. 순식간에 남자의 얼굴이 ‘난 이제 죽었다’ 로 바뀌었다. 남자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그대로 냅다 달려가 여자가 있는 테이블 위로 퍽 쓰러져 버렸다. 방금 42.195Km 마라톤을 마친 듯 가쁜 호흡소리도 쌕쌕 섞어가며.'습격(?)을 받은 여자가 놀라는 것도 잠시, 곧 그 눈이 기가 막힌다는 듯 휘어졌다. 그녀는 보던 잡지책을 못마땅한 듯 덮었다. '“오빠……지금이 몇 시야? 나 두 시간째 이러고 있는 거 알긴 해?”'그러자 방금전만해도 숨이 끊어져 가던 남자가 고개를 벌떡 세우며 ‘대꾸’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갑자기 회의가 길어지는데 낸들 어떡하냐. PD가 돼서 혼자만 빠져나올 수 없잖아.”'“그 방송국 PD는 오빠 밖에 없니? 인간적으로 결혼 앞둔 사람 예물 고를 시간은 좀 줘야 하는 거 아냐?”'여자는 주말도 없는 남자의 직장에 대해 툴툴거렸다.'“인마, 그러니까 이 오빠가 손이 발이 되게 빌고 있잖냐.”'그게 어디 손이 발이 되게 비는 거야? 여자는 테이블 위에 한번 엎어지면 모든 잘못이 끝나는 줄 아는 남자가 어이없었지만 지구에 안녕과 평화를 위해 이번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 '“담부턴 진짜진짜 지인짜 안 늦을게. 사랑하는 썬미, 울 자기야, 용서해주라. 응? 응? 용서해 줄 거지?”'“피이……됐네요.”'남자의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에 선미의 보기 좋은 입술이 삐죽거렸다. 하지만 퉁퉁거리면서도 남자에게 밀어주는 물 컵엔 애정이 담뿍 묻어난다. '남자는 그때서야 씩 웃으며 물 컵으로 손을 뻗었다. 숨도 안 쉬고 물을 들이켜는 남자. '선미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어차피 늦은 거 뛰긴 뭐 하러 뛰었을까.”'약속 시간에 늦은 주제에 한가롭게 걸어오기까지 했다면 절대 용서 안 했을 여자의 성격을 아는 남자는 속으로 픽 웃었다. '“무슨 소리! 울 자기가 기둘리는데. 당근 총알같이 튀어와야지. 근데…… 어쩌냐?”'남자가 말끝에 난감한 웃음을 짓는다.'“다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뭐? 왜, 또!”'“말도 마. 비상이다.”'“일 터졌어?”'남자가 딱 미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린다.'“혹시 이번 주 <그렇게 알고 싶다> 봤니?”'TV는 드라마밖에 보지 않는 선미다. 당연히 사회고발 프로그램은 딴 세상 얘기였다. 하지만 마치 꼭 보고 싶었는데 애석하게 놓쳤다는 듯 뻔뻔하게 되묻는다.'“못 봤지. 근데 왜?”'“이번 주 나간 내용이 우리 프로에서 준비하던 거랑 똑같았거든. 물 먹었다고 부장이 난리도 아니다 지금.”'“어떡하니……”'“뭐 어디 괜찮은 아이디어 없냐? 당분간 지랄 맞은 부장 성질 그대로 받아낼 생각하니까 골이 다 흔들거린다.”'남자가 미간을 찡그리자 선미는 엉뚱하게도 시계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그럼 오늘 괜히 약속 잡았잖아. 이 시간이면 민재 그 기집애 밥 한상 차려주고 설거지까지 다 했겠다.”'불쑥 남자의 눈이 의심스레 가늘어졌다. '“수상해…….”'“뭐가?”'“선미 너…… 민재한테 뭐 약점 잡혔지?”'“무슨 소리야 뜬금없이.”'“안 그럼, 왜 그렇게 걔 뒤치다꺼리를 못해서 안달이야? 너, 나한테는 밥 한 끼 제대로 해 준 적 있어?”'“어머머,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연애하는 7년 동안 싸다 바친 도시락그릇만 늘어놔도 불에 탄 숭례문 기와를 다 덮고도 남는다는 사실, 이 남자가 알려나?'“이사까지 나와서 그 녀석 밥을 챙기니까 하는 소리지. 나 기분 묘해지려구 한다. 내가 민재한테 밀리고 있는 거지, 지금?”'“이보세요, 아저씨. 민재하고 친구 먹은 세월이 벌써 12년이거든요? 일주일 전까진 눈 비벼 뜨자마자 한 상에서 밥 먹던 사인데,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넌 좀 심해. 애도 아니고 밥이야 지가 알아서 먹는 거지 뭘 그런 것까지…….”'“내가 안 챙기면 걘 굶어죽는다니까. 이건 사느냐 죽느냐 생존이 걸린 문제라구. 오빤 눈앞에서 꺼져가는 생명을 나 몰라라 할 수 있어?”'“누가 죽는다고? 그것도 굶어서? 푸핫! 지금 말하는 게 내가 아는 ‘구민재’ 맞아?”'남자가 상상만으로도 웃긴지 한참을 어이없는 얼굴로 허허거렸다. 도마에 오른 인물이 얼마나 지독한 식탐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 빼고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거다. 너 결혼하고 나서도 때만 되면 그 녀석 밥 챙겨주러 갈 거냐?”'선미는 그 대목에서 할 말이 없는지 주춤하더니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그러게. 오빠도 민재 상태 알지? 글 쓴답시고 집에만 콕 틀어박혀 있는 거. 어제 꿈엔 걔가 앰뷸런스에 실려 가더라. 솔직히 그 아파트에서 누구 하나 죽어나간들 알기나 하겠어. 요즘엔 누구누구 시체가 한 달 뒤에나 집에서 발견됐더라는 뉴스가 남 일 같지 않다니까.”'남자는 확신했다. 이 정도면 자신의 약혼녀가 제대로 ‘구민재 바이러스’에 감염된 게 분명하다고. 그것도 중증. 한숨만 나온다. 이거 치료약 개발하려면 오래 걸리는데.'상대방의 심드렁한 반응에 선미는 오히려 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저번에 일본 여행 간 적 있잖아. 세상에……근데 갔다와보니까 얼굴은 누렇게 떠가지고 컴만 하고 있더라고. 이틀 내내 굶었다는 거야. 뭐에 하나 꽂히면 다른 건 잊어버린다니까, 그 바보가.”'“설마…….”'“진짜라니까. 죽고 싶어 환장했냐고 내가 그날 얼마나 악을 써댔는데. 걘 병이야, 병. 그거 뭐더라? 방 안에만 콕 틀어박혀가지고…….”'“히키코모리?”'“그래. 그거. 그 기집애가 딱 그거라니까.”'“너 민재 녀석 앞에선 그 소리 하지 마라. 뒤집어진다.”'“그게 그런 정상적인 반응이나 있으면……. 방바닥 구르면서 웃지나 않음 다행이지.”'그건 수긍이 간다는 듯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린다.'“하긴……민재 놈 4차원 같은 구석이 있지. 왜, 대학 다닐 때 UFO에 미쳐서는 우르르 몰려다니고 그랬잖아.”'그러자 선미가 말도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그거? 우리학교에도 만들었잖아. 남에 학교에 동아리 만든 애는 걔가 첨일 거다. 내 친구들은 졸업할 때까지 민재가 우리 학교 학생인 줄 알더라고. 요즘엔 하다하다 UFO나오는 시나리오까지 쓰고 있어요. 누가 그딴 걸로 영화를 만들 거라고.”'“그래도 사무실엔 출근하나 보네? ‘사상누각’인가……그 녀석 거기 회원이었지?”'“이름만 있는 유령회원? 우리 사촌 언니도 거기 출근하는데 민재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냐고 묻던데.”'선미가 외모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콧방귀를 뀌며 빈정거렸다.'“어제 포차(포장마차)에서 보긴 했는데. 먹을 때 아는 척하면 살인 날 것 같아서 곱게 지나쳤다만.”'남자는 먹을 것 때문에 과거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일련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모르는 척 지나친 건 이 근래 들어 제일 잘한 일 같다.'“어제부로 비상식량 바닥났나 보네. 거기서 죽치고 있는 거 보면. 으휴, 그 비정상.”'“진 여사님, 지금 심하게 오버센스하고 있거든?”'“뭐?”'그러자 남자가 따박따박 단어에 힘을 주며 다시 말했다.'“오.버.센.스.”'선미는 자신을 과민성환자 취급하는 남자를 지그시 노려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내가 오버센스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면 되겠네.”'뭘 증명씩이나 하냐는 듯한 남자의 표정에 여자의 결심은 더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선미는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구민재가 비정상인 이유를 쫘악 나열하며 입을 열었다.'“첫째, 오빤 같은 동네 살면서 민재가 거기 벗어나는 거 본 적 있어?”'“일일이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낸들…….”'“둘째, 민재가 추리닝 말고 다른 옷 입은 거 본 적 있어?”'남자가 잠시 기억을 떠올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추리닝 차림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도 왜 이제껏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지? 하긴, 사시사철 추리닝을 교복처럼 입고 사니 다른 옷을 입었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을 거다.'“셋째, 민재가 언제 미용실 가거나 화장하는 거 본 적 있어?”'남자가 또 고개를 흔들었다.'“넷째, 민재가 쇼핑하러 다니거나 문화생활 하는 건?”'남자의 고개가 세 번째로 흔들렸다.'“다섯째, 이게 제일 중요해. 민재가 남자 만나는 거 한번이라도 본 적 있어?”'남자의 고개가 이젠 자동머신처럼 흔들렸다.'“여섯째, 걔가 나 말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남자는 이제 고개를 저어야겠다는 생각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댔다.'“이런데도 구민재가 비정상이 아니야?”'“듣고 보니 좀……다른 건 그렇다 쳐도 왜 우리 자기 말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지? 그 녀석 하는 걸로 봐선 누구든지 1분 만에 친구 먹자고 할 타입인데. 나한텐 10초 만에 선배 선배 그러더니 한 달을 빈대 붙어선 점심을 벗겨 먹은 애야, 걔가.”'“구민재 변죽 좋은 거야 유명하지. 근데 걔 친해지기 쉬운 타입 아냐. 겉으로야 천연덕스럽지. 근데 정작 정 주는 법 없어. 그게 남자든 여자든 가까워진다 싶으면 일단 선을 긋고 물러나는 거야, 구경꾼처럼……. 오빤 걔가 지 속내 털어 놓는 거 한번이라도 들어본 적 있어? 민재 걔, 얼마나 머리 좋은데. 어렸을 때부터 영재소리 들으면서 자란 애야 걔가. 근데 그 좋은 머리 썩히면서 저러고 사는 이유, 아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 그거 나한테도 말 안 해.”'“아유, 그래서 우리 자기야가 섭섭했구나.”'“안 섭섭하다면 거짓말이겠지.”'그러자 남자가 위로하듯 선미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생각 같아선 이 길로 민재 녀석에게 달려가 뒤통수를 한 대 딱 갈겨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좀 내 갈비뼈 걱정시키고 철 좀 들라고.'“그런데 난 너희 둘이 친구라는 것 자체가 안 믿겨. 것도 ‘베프’라니. 미스터리야.”'남자가 화려한 외모의 자신의 약혼녀와 얼빵한 외모의 구민재를 동일선상에 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보통은 끼리끼리 논다는데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있을까.'그러자 선미가 옛 생각이 나는지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고딩 때 내가 친구 먹자고 죽어라고 쫓아다녔다면 믿으려나?”'그러자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한국여대 메이퀸 진선미가 누굴 쫓아다녔다고?”'그 후로 몇 분간 선미는 하소연 하듯 계속 걱정거리를 쏟아냈다. 물론, 대부분 그녀의 웬수 같은 친구 구민재 양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듣는 둥 마는 둥 대체로 반응이 없다.'“오빠……지금 내 말 듣고 있어?”'그러자 갑자기 남자가 씩 웃는다. 마치 음모라도 꾸미는 모사꾼 같은 표정.'“이거 얘기 좀 되겠는데? 좋았어. 다음 주제는 이게 좋겠다. ‘히키코모리, 병인가 선택인가’”'“뭐?”'갑자기 남자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 여자의 손을 덥석 움켜잡는다. '“선미야.”'“왜?”'선미의 눈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서 이래? 하는 듯 좁아졌다.'“너, 민재 녀석 좀 취재해야겠다.”'선미는 즉시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미쳤어! 내 친구를 지금 동물원 원숭이를 만들자 이거야?”'“어이 마누라, 자료 조사라니깐? 그리고 너, 언제까지 그 앰뷸런스 악몽을 꾸면서 살 거야? 이젠 그 녀석도 좀 바뀔 때가 됐잖아.”'반신반의한 선미의 표정을 보며 남자는 굳히기 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번 기회에 ‘구민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보자 이거지.”'“대놓고 취재한다고 하면 걔가 얼씨구나 잘도 받아들이겠다. 우리말은 씨알도 안 먹힐 텐데.”'“모르게 하면 되지.”'“모르게? 모르게 어떻게?”'두 사람은 이제 작전을 짜는 것처럼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렸다.'“남자를 붙이자.”'그의 말에 선미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를 붙여? 어떻게, 누굴? 설마, 방송국 기자?”'“에이, 그럼 들키게? 마침 이 일에 적임자가 딱 하나 있지.”'“믿을만한 사람이야?”'“걱정 붙들어 매. 만인이 보장할 만큼 사교에 능한 녀석이니까.”'남자는 벌써 휴대폰을 꺼내 교섭할 상대방 번호를 찾고 있었다. '“이러다 민재한테 들키는 날엔…….”'선미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러자 남자가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우리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몰라.”'“그, 그럴까……?”'선미는 애써 불안감을 감췄다. 취재든 뭐든 좋으니까 민재의 일상을 변하게만 해준다면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