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연모해선 안 될 사람

선화는 이불을 깔고 누웠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도 한숨도 못 잤는데…… 조금이라도 자 둬야 오후엔 일하러 나갈 텐데…….

슬그머니 의식이 가라앉는다. 복잡한 생각이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꿈결인가? 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선화는 눈을 뜨지 않았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 것도 있지만 침을 삼키는데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고뿔에 걸린 것 같다. 눈을 떠서 해정에게 약이라도 지어 달라고 해야 하는데…….

흠칫. 선화는 차가운 것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희미하고 몽롱한 시선 끝에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짙은 눈썹이 모여 있고 어두운 눈빛은 가늘게 좁혀 있었다.

서동…….

“미안. 깼어?”

“…….”

목이 아파 대꾸할 수가 없다.

“열이 있어.”

알아. 그리고 난 네가 왕자라는 것도 알아.

“기다려 봐. 유 실장 데려올 테니.”

서동이 일어서려 한다. 선화는 힘없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가 멈췄다. 선화는 아픈 목으로 간신히 소리를 냈다.

“괜찮아. 좀 더 쉬면 나을 거야.”

“허세 부리지 마. 유 실장한테 말해서 약을 지어…….”

“그리 생각해 주는 척하지 마.”

서동의 눈빛이 흔들렸다. 선화는 어두운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신라의 공주야. 그리고 넌 백제의…… 왕자고.”

고뿔 때문이었으리라. 머리가 너무 아프고 어지러워서 의도하지 않은 말들이 튀어나온 이유는.

“우린 절대 서로를 걱정해 줘선 안 되잖아. 서로를 지켜 주는 게 아니라 서로를 죽이려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거잖아.”

“…….”

“여기가 다른 세상이라 해도 근본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 우린…… 원수야.”

그의 눈빛은 짙었다. 너무나 어둡고 깊어서 아파 보였다. 선화는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왜 하필…… 네가 백제의 왕자인 것이냐?”

몰랐다. 그 사실이 이리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은. 원수라고 쏘아붙이며 백제 놈이라고 욕하고 거리를 두려고 일부러 인상 쓰고 화만 냈었는데…… 언제 나는 이렇게 저 사내에게 의지하게 되었던가.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르지.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사내의 지켜 준다는 말 한마디에 나는 어리석게 마음을 주었었나 보다. 안 되는 걸 알면서 자꾸만 달려가는 마음을 다잡지 못했었나 보다.

백제 상인. 어차피 나도 궁에서 쫓겨날 처지의 공주다. 허울뿐인 공주라는 자리, 훌훌 벗어 버리면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겠지. 그러면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왕자란다. 그것도 다음 대 백제의 왕이 될 왕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엮은 책이 아닌 역사의 기록을 남긴, 있었던 일을 기록한 근거로 작성된 책에서 읽은 것이니 부정할 수도 없다.

이 세상의 역사책에서 확실하지 않은 건 나, 선화 공주에 대한 기록뿐이다. 신라 현왕에겐 여식이 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 같은 건 역사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백제의 무왕의 왕후가 선화 공주라는 건 이야기책에 불과하다.

선화 공주는 그저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인물인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질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선화는 그의 옷자락을 놓고 눈을 감았다. 그때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쉬고 있어. 유 실장 데려올 테니.”

그가 나간다. 선화는 깊게 호흡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소리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가까이해선 안 될 사내와 벗이라니…… 그러고 보니, 내 처지가 서동의 처지보다 더 못하구나. 같은 처지라 마음이 가는 대로 두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으면 된다. 저만치 거리를 두고 지금껏 그래 왔듯이 원수 대하듯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그러면 되는 것이다!

해정의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 가지고 계단을 올라가던 선화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옆집 옥상에 서동이 나와 있다.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는 것이 보이자 재빨리 몸을 숙였다.

벽 쪽에 찰싹 붙어 몸을 숙인 채 숨을 골랐다.

내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선화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서동과 마주치는 것이 어색하다. 이젠 대놓고 반말하기에도 그렇고 그렇다고 말을 높이기는 싫다.

‘몸은 어떻습니까?’

‘어, 괜찮아졌어. 선화가 여려 보여도 강단이 있다니까. 하룻밤 끙끙 앓더니 금방 저렇게 팔팔하게 살아나네.’

서동의 걱정 어린 물음에 해정이 대답하는 것을 들었을 때도 선화는 나서지 않았다.

‘왜 하필…… 네가 백제의 왕자인 것이냐?’

바보. 왜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했을까?

선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고개를 내밀어 보니 서동이 모 실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선화는 몸을 최대한 벽에 붙이고 숙인 채 나머지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재빨리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