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놈들이 진정 환장을 하였단 말이냐!”'기다리던 소식은 아니었다.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듯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한다. 의강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하는 의친왕의 분노에 몸을 사리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사, 사람이 아니었다 하옵니다. 어찌 사람이 하늘을 날고 삼천 명의 군사를 홀로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수하가 전해온 소식은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누군가 개입되어 일이 파해 되었다 했다. 그것도 모자라 군사 삼천이 모조리 몰살당해 살아 돌아온 자는 거의 없었다. 정말 운이 좋아 도망친 것인지, 본보기로 놓아 준 것인지 알 수는 없는 일. 개중 돌아온 몇이 보고한 내용은 끔찍했다.'“사람이 아니라…… 그럴 리가 없다.”'의강은 분노와 두려움으로 뒤섞인 감정을 내리눌렀다. 냉정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이번만이 아니다. 잡으려던 중 번번이 놓치곤 한다. 거기다 제 수하들조차 모두 잃어야 했다. 게다가…….'‘악귀와 같은 살수.’ '현국에서 이리도 당당히 실력으로도 세력으로도 자신의 병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다. 설마설마 했다. 그럴 리가 없다 믿으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설핏 무언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광기와도 같은 두려운 검기.’'조금 짚이는 것이 있었다. 핏줄로만 따지면 황제와 자신은 그리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은 사촌의 관계다. 바로 아래 혈육, 친자만이 중요시되는 황손가운데 사촌은 황족 중에서도 높게 치지 않는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친인척이라고 하나 자신이 정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면 대권이 흔들린다. 황제가 자신을 살려둘 리 없었다. '알 듯 하면서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사촌. 그럼에도 황손이 귀한 현국에서 황제와 의친왕은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피를 나눈 사인데도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사이. 의강은 지난 기억을 되돌리는 와중에도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과거, 새 황제 유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당시, 의강은 황제와 독대하는 경험은 가진 적 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으며 고개를 들고 직접 마주하지도 않았으나 나긋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뒤로 느껴지는 위압과 공포는 아직까지 잊혀지지도 않는다. 가능하면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공포. 그렇기에 어쩌면 자신이 이따위 좁고 하찮은 영지에서도 두말 않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왜 하필이면 이럴 때 황제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의강은 어째서 일이 이렇게까지 불거졌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발단은 신비였다. 계집이 도망친 후로 수모는 모조리 자신이 겪고 있다. '“내가 직접 가겠다.”'“전하! 참으십시오. 지금은 몸을 사리는 편이 좋습니다.”'시종이 그를 막아서며 말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의 직속 수하들이 모조리 죽어 돌아온 것을 안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헌데 이제 자신의 병사 삼천이 정체도 알 수 없는 자에 의해 생사도 불분명하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더 이상 계집을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이 피부에서부터 느껴졌다.'“결코 빼앗겨서는 아니 된다.”'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제와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제 것을 누군가 탐하는 것도, 제 이외에 누군가가 그녀를 돕는 것도 참을 수 없다. '“호위만 남긴 채 사병들을 모두 데려가라. 계집을 찾는 즉시 내가 나설 것이다.”''* * *''딸깍. 새벽이 깊어가는 어두운 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잠에 든 고요한 시각이었다. 정적이 온몸을 휘감은 이 깊은 새벽녘, 한밤중의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을 지닌 검은 형체가 신비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소리 없이 들어섰다.'낮은 숨소리가 채우고 있는 침실, 유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즐겁지가 않았다. 심장을 타고 냉기가 흐른다. 대체 이런 기분을 얼마 만에 느낀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감정의 혼란이 언제부터 나타난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분노와 타오르는 불꽃같은 격정은 손에 놓으려야 놓기조차 힘들었다. '‘예언은 거짓인가 진실인가.’ '스스로 듣지 않았다. 그것이 맞든 틀렸든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자신이 이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지도 않았다. '“천관녀 개화화.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겁니까! 그대가 나를 보았다는 것입니까? 아니 믿지 않습니다. 선택은, 나의 것입니다.”'마치 숨을 거둔 듯 누워 있는 신비를 보며 유가 건조하게 시선을 내렸다. 얕은 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잠든 신비에게 마저 영향을 주었던지 신비가 작게 인상을 썼다.'유는 서서히 신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렸다. 그녀의 얇고 가느다란 머리칼이 얼굴을 덮어 갑갑해 보인다. 유가 신비의 얼굴을 쓸어 살며시 정리해 주었다. 그의 손길에 부드러운 솜털이 느껴졌다. 아련한 듯 전해져 오는 간지러움.'턱까지 덮은 이불보를 천천히 걷어 내린 유의 눈에 유독 희고 가느다란 목선이 들어왔다. 턱에서부터 느리게 훑어 내려가며 귓불 아래를 쓰다듬자 미약하게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꺾여버릴 터.”'알 수 없는 충동이 느껴지자 유는 가까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거의 손끝에 다다랐을 때는 차가운 피가 머리에서 맹렬히 회전하는 짜증스런 기분을 느껴야 했다.'유는 살며시 손을 뻗어 신비의 손목을 약하게 그러쥐었다. 굵을 오랏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유난히 희고 보드라운 손목 주위에는 시퍼런 멍이 둥그렇게 퍼져 유가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아픔을 호소했다. 잠결에도 신음을 흘릴 정도로 손목을 꽉 동여맸다는 뜻이다. 유는 신비의 상태에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차디찬 심장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였다. 대신들이 뭐라 반발하고, 뭐라 상소가 오를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까짓 것에 연연하는 유는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확인하듯 유는 그녀의 눈가를 향해 살며시 허리를 숙였다. '유의 입술이 신비의 감겨진 눈 위로 닿았다. 나비가 앉았다 간 듯 간지럽고 부드러운 기분에 신비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허나 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눈 위에 닿았던 입술을 내려 살며시 콧잔등을 간질였다. 보송보송한 살내음이 유의 후각을 자극했다. 코끝에서부터 피어오는 아찔한 매혹의 향을 느끼며 다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미끄러뜨리듯 콧잔등을 내려온 입술이 신비의 입술 바로 위, 인중에 닿았다. 그녀의 숨결이 여지없이 유의 입술까지 퍼진다. 신비가 내쉬는 숨결이 계속해서 그의 육체를 자극했으나…….'“콜록.”'신비가 답답했던지 작게 헛기침을 하였다. 유는 느릿하게 그녀의 얼굴에서 입술을 떼었다. 그런 후 조금 장난이라도 치듯 긴 손가락을 신비의 입가로 뻗었다. 닿을 듯 닿지 않게 입술 근처를 노닐던 유의 손가락이 살짝 신비의 입술을 찍듯이 쓰다듬었다. 그녀의 연분홍 입술은 제 손가락에까지 물들일 것처럼 붉었다. '유는 신비의 입술에 닿은 손가락을 제 입술께로 가져다 대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아직이란 뜻인가…….”'중얼거리던 그의 입가에서 묘한 어둠이 피어오른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식은 채 신비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손가락을 느리게 핥았다. 붉은 혓바닥 사이로 알듯 모를 듯 그녀의 맛이 느껴지는 듯 했다. 신비가 보았다면 또다시 눈동자가 은회색으로 번뜩거렸다고 느꼈을 터였다.'잠시 얼어붙은 듯 움직임 없이 서 있던 그가 천천히 신비를 당겨 자신의 품에 안아들었다.'잠에 취한 중에도 공중에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자 생시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신비는 움찔거리며 눈을 뜨려 애를 썼다. 머리가 울리는 것인지 눈에 먼지가 낀 것인지 신비의 눈 안으로 빛이 흔들리며 들어왔다. 그 사이로 어렴풋하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유.”'그리운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신비는 설움이 북받쳐 양팔을 벌려 그를 꼭 끌어안았다. 신비의 몸이 유의 품에 꼭 들어맞게 안겨졌다. 유는 신비의 이마 위로 입술을 살짝 내렸다. 유의 턱 근처로 신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래색 눈동자가 불안한 듯 떨리며 동요하였다. 신비의 체온이 올랐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져 유의 입술 위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유는 그 이마 위로 심장박동을 느끼기라도 하듯 한참을 떼지 않았다. 신비의 가슴이 울컥거리며 코끝이 찡해졌다.'“유, 너무 보고 싶었어요. 정말요. 유는 저 안 보고 싶었나요?”'유는 어쩐지 슬픈 듯 미소 지었다.'“하긴, 저 지금 많이 추하긴 하죠?”'신비가 푸석해진 제 머리칼로 시선이 향했다. 유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더니 입을 맞춘다. '“그러지 말아요.”'그렇게 말하며 신비는 몸을 틀어 유의 손에 쥔 머리를 빼내려 했으나 유는 어떤 미동도 없었다. 신비는 약간 당황스러웠다.'“유?”'유의 얼굴에 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짐짓 화가 난 듯 보이는 그의 검고 짙은 눈동자에서는 차가운 불꽃이 자리 잡고 있는 듯했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