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흐릿했던 날씨가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오늘같이 새털처럼 맑은 날은 기상청에서도 아마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어린 한희는 오늘따라 모든 게 즐거웠다. 날씨도 좋았지만 엄마랑 오랜만에 재래시장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집안일을 돌봐주시는 아주머니가 두 분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종종 마트가 아닌 재래시장에서 손수 장을 보셨다. 매년 추석이 되면 엄마는 외롭고 힘든 직원들에게 손수 장만한 과일과 고기, 정성껏 직접 빚은 만두를 보냈기 때문에 이번 추석에도 이것저것 살 것이 많았다. 무거운 과일과 떡, 생선, 고기들을 정성들여 고른 다음 기사아저씨 편에 보내고 한희와 엄마는 여유롭게 제사상에 올릴 한과나 밤 약과들을 고르고 있었다. ''한희는 엄마와 팔짱을 낀 채 다정하게 장을 보면서 시장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골목골목마다 먹음직스런 음식들이 푸짐하게 쌓여 있었는데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자 삶아진 돼지머리들이 유쾌하지 못한 냄새를 풍겼다. 익숙하지 못한 역한 냄새 때문에 한희는 코를 부여잡으며 얼른 엄마를 끌고 골목을 나와 시장 한가운데로 갔다. 시장 한가운데에는 유치한 뽕짝에 박자를 맞추어 신명나게 가위춤을 추는 각설이 아저씨가 호박엿을 팔고 있었다. 옆에선 주름이 자글자글한 아저씨가 투박한 검은 기계를 돌리다가 ‘뻥이요.’하고 뻥 터지는 소리에 한희랑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엄마야’를 같이 외치고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재래시장의 신기한 이것저것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한희는 배가 고팠다. ''“엄마, 나 저기 있는 떡볶이랑 순대 먹고 싶어.”'한희가 가리킨 곳을 보니 시장 한쪽에 먹음직스런 순대랑 떡볶이를 팔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엄마 여기서 이것만 고르고.”'“나 많이 걸었더니 배가 너무 고파. 엄마.”'한희가 자꾸만 졸라대자 엄마는 고르고 있던 물건에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어린 딸을 쳐다보았다.'“아까 붕어빵을 그렇게 먹고서도 또 배고파?”'“그건 아까 아까 꺼졌지.”'한희가 입을 삐죽이 내밀자 엄마는 한희의 뺨을 쿡 찌르고는 어이없다는 미소 지었다. 엄마의 미소에 한희도 같이 미소 지었다. 언제나 포근한 엄마의 미소는 한결 같았다. ''친지분들의 말에 의하면 엄마. 아빠는 결혼하고도 한참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다들 걱정이 대단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몇 년 뒤에 힘들게 자신을 얻어서 모든 이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손이 귀한 집안의 무남독녀답게 한희의 사랑스런 애교는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고 했다. 물론 중요한 잘못을 했을 때나 버릇없이 굴었을 때에 엄마는 호랑이 선생님으로 돌변했는데 그럴 때마다 한희의 애교는 전혀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혼났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에 대해서는 한희의 애교에 껌뻑 넘어가셨다.'“그럼 엄마 여기서 대추랑 당과만 사고 갈 테니까 먼저 가서 먹고 있을래?”'“그럴까? 그럼 엄마거랑 같이 시켜놓을 테니까. 엄마 빨리 와야 해?”'“알았어.”'한희는 엄마에게 다짐을 받은 후 신나게 건너편으로 뛰어가 자리에 척 앉으며 순대랑 떡볶이를 2인분씩 시켰다. 척 보기에도 인심 좋은 할머니가 순대랑 떡볶이를 푸짐하게 주셨다. 바로 음식이 나왔지만 꾹 참고 엄마랑 같이 먹으려고 건너편에 있을 엄마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웬 남자가 술병을 든 채 엄마 옆에서 말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꽤 거칠어 보이는 남자는 한눈에도 술을 잔뜩 먹었는지 비틀거렸다. '“그러니까 사모님이 힘 좀 써 달라 이겁니다. 한 사장님 때문에 우리 집 쫄딱 망했다고요.”'입성을 봐서는 세련된 옷차림에 괜찮게 사는 형편의 남자 같았는데 얼굴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녹록치 않았던 세월들이 얼굴에 묻어져 나왔다. '남자는 며칠간 옷도 갈아입지 못했는지 형편없이 구겨진 양복을 입고 있었다. 사실 남자는 경찰들의 눈을 피해 다니다가 힘들게 한 사장 부인을 만나게 되자 그동안 겪었던 모진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울컥한 상태였다.'“우리 남편일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거든 남편에게 얘기하세요.”'“네 남편하고는 얘기가 안 통하니까 이렇게 온 거 아니야? 썅.”'남자는 엄마와 말이 안통하자 바로 상스럽게 말을 놓으며 답답하다는 듯 거칠게 언성을 높였다.'“전 잘 모릅니다.”'“모른다고 하면 다야? 처음엔 다 같은 가족이다 뭐다 착한 척 다 해 줄 것처럼 알랑거리더니 이젠 안면몰수하고 사람을 범죄자 취급을 해? 당신 남편이 우리 가족 다 죽여 놨다고. 어쩔 거야? 엉? 모른다고 하면 다야? 내 처자식들 당신 남편 때문에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어. 그리고 네 남편은 나 몰라라 해외로 튀어? 한사장이 책임 못 지면 당신이라도 책임져야 할 거 아니야. 우리 가족들은 다 죽여 놓고 니들은 맘 편하게 턱턱 몇 박스씩 과일이며 고기 사면서 너희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이거야?”'지금까지 한희와 인선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지 지금껏 두 사람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다 아는 말투였다. 하지만 인선이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남자는 제풀에 흥분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선도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남자를 달래기 시작했다.'“저, 여기서 이러지 마시구요. 제가 남편한테 얘기를 해놓을 테니까. 흥분을 좀 가라앉히세요.”'“뭐라고? 내가 지금 흥분 안하게 생겼어? 뭐 이런 개념 없는 것들이 다 있어? 남편이고 마누라고 똑같네. 니들 때문에 난 이제 끝났어. 끝났다고.”'남자가 쉽게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자 엄마는 웅성거리는 주위를 의식한 듯 남자를 달래려 했지만 이미 흥분한 남자는 자포자기한 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한희는 갑자기 무서워져 엄마에게 달려가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남자는 벌써 엄마를 잡고 무지막지하게 어디론가 끌고 가려고 했다. 엄마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하려다가 가지고 있던 장바구니로 남자의 얼굴을 후려치자 휘청거린 남자가 순간 욱했는지 들고 있던 술병을 엄마의 머리에 내리쳤다. 거기에 끝나지 않고 남자는 깨진 술병으로 엄마를 여기저기 찌르고 있었다. 엄마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건너편에서 달려오는 한희를 애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Episode) 10년 후'''한희는 지난 20시간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이 너무나도 뻑뻑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던 인공누액을 눈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차가운 물방울이 눈에 들어가자 시원해서 잠이 확 달아나는 듯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주머니에서 줄기차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또 호출이 뜬다.'“젠장, 잠시도 쉴 틈을 안 주는구나. 이번엔 또 어디야?”'한숨을 푹 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Nurse Station이다. 한희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부랴부랴 Nurse Station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에요? 누가 콜한 거예요?”'잠이 덜 깬 목소리로 간호사들한테 물어보자 박 간호사가 눈짓으로 웬 신사분 한분을 가리켰다. 박 간호사의 시선을 따라가자 깔끔한 정장에 중후하게 보이는 아저씨가 병원 창밖을 바라보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절 찾으셨나……요?”'“네. 희 아가씨.”'아가씨란 말에 간호사들은 어리둥절해 했고 중년 남자를 본 한희는 얼음이 되었다. 한희는 잊고 싶었던 과거 속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