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모여 살게 되면 한복이랑 베개에 보풀이 생길 때까지 같이 자고 같이 놀 거예요. 아주 가끔은, 풀 먹인 베개와 한복이 너무 까끌까끌해서 사람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게,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거든요.”
한산 이씨 공무공파 문중의 종손녀, 이열아.
오래된 고택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첫 사랑.
그녀의 키스를 도둑맞았던 그날 밤의 기억이 씁쓸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꿈도 꾸어선 안 되는 건가.”
……안 되는 건가.
도연백화점의 후계자, 윤하준.
아버지와 절친의 잇따른 죽음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던 그에게 다시 찾아온 첫 사랑.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그날 밤의 기억이 씁쓸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본문 중에서-
그의 방에 몸을 들인 열아는 구석에 놓인 짐 가방에 잠시 시선을 던진 후 정갈한 몸짓으로 바닥에 앉았다. 치마를 단정히 여민 그녀가 쟁반을 내려놓자 하준이 맞은편에 자리하며 앉았다. 열아가 찻잔의 뚜껑 하나를 열자 방 안에 순식간에 국화 향이 가득 들어찼다.
“이제 많이 바쁘실 테지요?”
“아마도.”
“백화점 일도 이제 하셔야 하고요.”
“그래야지.”
하준은 희고 가느다란 열아의 손가락이 찻잔 위를 오가며 차분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에 내내 눈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들자, 저 몰래 입술 끝을 깨물며 더 이상의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곤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열아가 마음 편해질 수 있게, 그가 그녀의 마음을 대신 읽어 준다.
“여긴 네가 있어야 할 곳이지. 네가 한 시간을 비우면 주방이 티가 나는 집이니까.”
나머지 잔의 뚜껑을 열던 열아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 애써 평정을 되찾았다.
“찬 서리를 보름 정도 맞은 국화를 따서 말린 거예요.”
“두 시간을 비우면 마당이 티가 나고.”
“잘 씻어 말린 것을 꿀에 재워 두었지요.”
“세 시간을 비우면 마을이 티가 나지.”
“머리가 맑아지실 것이고, 몸이 따뜻해지실 거예요.”
“너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고, 네게 소중한 곳이지.”
열아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잔에서 손을 거두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 한마디에 그녀의 가슴이 아프도록 암전이 되어 갔다. 말 대신 겨우 힘을 넣은 손을 찻숟가락으로 가져간다.
“하고 싶은 말, 해. 다 들어 줄 테니까.”
하준의 낮은 음성이 새카맣게 타 버린 가슴에 내려앉았다.
“하고 싶은 말은…….”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찻숟가락을 천천히 집어 들고 노랗게 우러나고 있는 찻물을 젓던 열아의 손목을 그가 붙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말이 멈추어졌다. 아무런 단언을 하지 말라는 그의 뜻에 열아의 입술도 금세 닫혀 버렸다. 아프도록 손목을 움켜쥔 그의 악력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마음에서 쏟아 내고 있는 잿빛 눈물처럼 굵은 작달비가 하염없이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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