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꼭 그 사람이어야만 해요. 그를 잡아야, 보석이 돌아오거든요.”

힘든 생에 사랑을 주던 ‘그’와 어린 딸 하원을 잃고 절망 끝에 자살을 택한 노하영. 죽은 그녀 앞에 나타난 풍요의 신 사누엘은 그녀가 이번 생의 기억을 가진 채 로맨스 소설에서 파생된 세계 데인에 환생하여, 환생한 ‘그’를 찾아내면 그녀의 딸 하원을 돌려주겠다고 말한다. 그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가 그를 정확히 찾아내는 순간 그에게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면서.

딸 하원을 만나기 위해 거래를 받아들인 하영은 원래 소설 속에는 없던 인물인 아일 공작가의 막내 공녀 하엘로 환생하여 전생의 ‘그’를 찾기 시작하는데……. 하엘의 주변을 맴도는 각양각색의 남자들 중 과연 ‘그’는 누구일지?

“리시안서스의 꽃말은.”

“…….”

“변치 않는 사랑.”

2. 작가 소개

올로로소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쓰고 싶습니다.

3. 차례

#70.

#71.

#72.

#73.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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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완결편

#90. 티앙 외전 1

#91. 티앙 외전 2

#92. 티앙 외전 3

#93. 카티 외전

#94. 신들의 이야기

#95. 엘티커플 꽁냥(?) 외전 1

#96. 엘티커플 꽁냥(?) 외전 2

#97. 결혼 외전

4. 미리 보기

“뭘 하는 건가!”

그러게, 도인아. 쟤…… 쟤가 지금 뭘 하는 거니. 티앙의 손이 가슴께를 지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요망한 단추는 툭툭, 옷을 빠져나왔다. 천진난만한 분위기는 얼굴뿐, 시선을 조금만 내리면 퇴폐적인 스트립쇼가…….

“넌 또 어딜 보는 거야!”

스읍. 나는 흘리지도 않은 침을 닦으려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김에 감히 내 눈을 가린 도인의 손을 있는 힘껏 꼬집어주었다.

아얏, 작은 비명과 함께 손을 뗀, 아니, 강제로 손이 떼어진 도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하! 비꼼이 가득한 감탄사를 날리는 도인에게 살기 넘치는 눈웃음을 선물한 후 나는 다시 티앙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에이. 헙.”

나도 모르게 뱉어진 실망은 고스란히 내 귀로 전달됐고, 나는 그제야 내 추태를 깨달아 입을 막았다. 젠장.

“왜? 맨몸일 줄 알았어?”

“…….”

“큭큭큭, 크하하하.”

눈꼬리를 살짝 내리며 새침하게 꺼낸 티앙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황파악 후 웃음을 터뜨리는 도인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격렬한 부끄러움에 내 동공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곧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그리고 속으로는 잘근잘근 현을 씹어대고 있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현.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멀쩡한 사람 변태를 만들어. 엉?

“나중에 엘한테는 따로 보여줄게.”

“흐익!”

순식간에 내 옆자리로 이동한 티앙이 쪼그려 앉아 귓속말을 했다. 불시에 닥친 접근에 내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찬 도인이 손을 뻗으려다 도로 접는다. 내 경고가 조금 먹힌 모양이었다.

아, 그나저나 도인 녀석. 발칙한 사상의 뿌리를 뽑았어야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본 실력을 들켜서는 제대로 마무리도 못 했다. 나도 화제 돌리기에 급급했으니까. 급하게 친해진 부작용일까. 내가 휘둘리는 것을 심하게 싫어하는 성격인 것을 그는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싫다는 말은 안 하네? 하하.”

“……티앙.”

“응?”

“너 언제부터 이렇게 능글이가 됐어?”

“지금부터?”

고개를 갸웃하며 새초롬히 대답한 요망한 티앙은 들고 있던 셔츠를 내 머리 위에 씌웠다. 나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몸을 굳혔다.

“여성의 머리 위에 옷을 얹다니, 상식이 없군.”

빈정거리는 도인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세계에서의 상식으로 따지자면 도인의 말이 맞았지만, 저 세계에서의 상식으로 따지자면 오히려 로맨틱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니까.

하나의 옷에 둘이 들어가 찰박찰박 빗속을 뛰어가는 영화가 있었다. 망각이 허락되지 않은 저 세계에서의 기억은 한낱 영화조차 이리도 또렷하다.

나는 조금 기대하는 눈빛으로 티앙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저 실드를 접고 내 머리 위에 걸쳐진 옷 속으로 들어오면. 그리된다면.

“이제 좀 괜찮지? 아무리 알아볼 게 있어도 그렇게 젖지는 마.”

“……응. 고마워.”

애써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내 실망한 기색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오히려 도인이었다.

“왜 그런 눈이야?”

“……내가 뭐.”

“뭐에 실망한 거지? 저 남자가 맨몸이 아니라서? 아니면 마법을 안 써주어서?”

도인과 나를 크게 감싸는 실드가 머리 위로 떠올랐다. 토토톡, 빠르게 실드를 두드리는 빗방울의 소리가 어쩐지 처연하다. 진심을 말할 수도, 설령 말한다 해도 공감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알고 있으면서, 뼈에 사무치게 잘 알고 있으면서, 나는 왜 이리 실망했는가.

찰나의 순간, 나는 극도로 지쳐버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엘.”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개인적인 일이니까.”

다소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잡는 티앙에게 조용히 웃어주었다. 두 남자가 동시에 움찔했다. 이 순간 나를 감싸고 있을 극렬한 거부 오오라 때문이리라. 안 봐도 비디오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의 기분까지 고려할 정신이 없었다.

팔꿈치까지 늘어진 티앙의 셔츠 자락을 양손으로 살짝 붙들었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혼자 지치고. 가장 어이없는 것은 그 와중에도 이것을 돌려주고 싶지 않다는 스스로의 미련함이었다. 쯧, 짧게 혀를 찬 후 나는 방을 향해 달렸다.

“엘!”

“엘!”

차마 붙들지는 못하고 안타까이 이름만 부르는 두 남자의 목소리를 빗속에 흘렸다.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어줘. 나를 따라오지는 마. 때마침 강하게 퍼붓는 빗줄기 덕분에 끈적하게 따라붙던 목소리가 씻겨내려 갔다.

조금 더 가벼워진 몸으로 나는 쑥쑥 앞으로 치달았고, 이윽고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 ◆ ◇

하엘이 떠난 후, 두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강한 빗줄기로 흐려진 시야를 필사적으로 가다듬으며 그렇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에르도인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것도.”

짧게 끝나는 파르티앙의 말에 에르도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의 제국이었다면 이 시건방진 이의 혓바닥을 즉시 잘라버렸을 터다. 하지만 눈앞의 치는 겨우 5년 만에 스플렌 제국까지 그 명성이 전해질 정도로 역사상 가장 재능 있는 이. 고작 열다섯 나이임에도 꿈의 8서클까지 고작 수년밖에 남지 않았으리라 전해지는 천재 중의 천재다.

그런 이와 척을 지는 것은 마법 제국 스플렌의 황제가 될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전 대륙의 마법사들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치솟는 분기를 억지로 가라앉힌 도인이 재차 물었다.

“헌데 그녀가 왜 저런 표정을 짓지? 분명 그대가 옷을 덮어준 직후였다. 그녀가 상심한 것은. 아니, 절망이라고 봐도 좋을까.”

마지막 말은 꺼질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 에르도인이었지만 파르티앙에게는 충분히 전해졌다. 그녀의 급격한 감정전환에 놀란 것은 에르도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입술을 짓씹던 파르티앙은 나름의 정중함이 묻어 있는 고갯짓을 한 후 곧 몸을 돌렸다. 무슨 실수라도 했는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파르티앙이라고 했나?”

뒤에서 들려오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 우뚝 몸을 세운 파르티앙은 상체만 틀어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심하는 것이 좋아. 난 목표로 한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기어코 한마디 경고를 날린 에르도인은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그동안 그녀 옆에 있던 어떤 남자에게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제 눈앞에 있는 이 남자만큼은 다를 것이다. 오랜 기간 지고한 자리에서 암투를 겪어온 그의 감이 강력하게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아직 라드벨 제국의 황태자를 만나보지 못했지만, 최대 적수는 아마도 이 남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직감했다.

“그러니 그녀를 위해서라도 허황된 마음은 접는 것이 좋아.”

“……제가 마음을 접는 것이 엘을 위하는 거라고요?”

완전히 몸을 돌린 파르티앙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사납게 일그러진 눈이 에르도인을 직격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했다.

“제국의 황후이다. 어느 쪽이 그녀를 위한 길일지 계산할 필요가 있는가?”

오만하게 내뱉어진 말에 파르티앙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춰왔던 마음을 제대로 건드리는 탓에 발끈한 것이 우스울 정도로 어리석은 대답이었다. 무시하고 지나는 것이 이로웠으나, 상대의 오만함이 불안했던 파르티앙은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상 가장 어리석은 것이 연적에 대한 동정이라지만, 한마디 하지요. 당신.”

살짝 피로감이 몰려오는 미간을 한번 꾹 눌러준 파르티앙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무슨 말이지?”

파르티앙은 더 이상의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연적이 될 이에게는 이 정도 충고도 사치였다.

천천히 발을 떼는 그의 몸은 이미 푹 젖어 있었다. 엘이 떠난 후 실드를 치운 탓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눈이 그 실드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 이유를 이해할 틈도 없이 본능적으로 없애버렸다.

머리를 때리는 비는 정말 인정사정없었다. 고민으로 휩싸인 머리가 순간 멍해질 정도로 퍼붓는 비에 파르티앙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중얼거려보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왜.”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한탄이었지만 하늘만은 공감한 듯 더 세게 비를 퍼붓는다. 온전히 그것을 감당하던 파르티앙은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