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대는 평생 나 외의 남자 품에는 안기지 못할 것이다.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아란국 도한제의 유일무이한 외동딸 비(庇) 공주. 갑작스런 황제의 사망 이후, 황위를 이어받는 동시에 혼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녀의 정인이었던 연(戀)이 아닌 검은 잎새 가문의 장자 휘(揮)를 정실 지아비로 두라고 강요한다.

단지 권력에 눈이 멀어 혼인을 택한 줄 알았던 휘는 첫날밤 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을 내리는데…….

“나를 미워하여도 좋으니,”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 입술에 대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나를 떠나가지는 마라. 미워해도, 내 곁에서 미워하여주길 바란다. 내 눈앞에서, 내 손이 닿는 곳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리에서, 나를 실컷 미워하여도 좋다. 그저…… 떠나지만 말아다오.”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ebook)

엘핀느의 꽃(ebook)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ebook)

달콤한 말 세 방울(ebook)

푸른 단검과 흰 장미(ebook)

하우스(ebook)

맑은 하늘 푸른 잎새(ebook)

목련화(ebook)

루비아스 마티아스(ebook)

그해 여름, 우리는 이혼했다(ebook)

로맨스는 없다(ebook)

비밀의 숲(공저)

3. 차례

#17. 이유(理由)

#18. 상처(傷處)

#19. 결론(結論)

#20. 맺음

#외전. 그와 그녀의 이야기

#외전. 연의 이야기

#외전. 휘의 이야기

#외전. 또 다른 결말

#후기

4. 미리 보기

비는 궁을 나섰다. 경을 포함해서 그녀의 휘하 도합 다섯과 함께 무사히 붉은 꽃잎 가문에 도착하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도 인 수장은 차분히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조금 어수선한 느낌이다. 밤임에도 불구하고 은도 영도 보이지 않고, 어찌 된 일인지 인의 아내인 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찌하여 이리 인적이 없는 건가요? 기이하네요.”

“제 집안에 번잡스러운 일이 있어 그렇습니다.”

비의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빛났다.

“번잡스러운 일이라니요?”

“폐하께 말씀 올릴 만큼 큰일은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리 바깥 분위기가 흉흉할 때 궁 밖으로 나서시다니요, 부군께서는 알고 계시는 일이십니까?”

그 말에 비가 차분하게 미소를 띠며 인에게 말을 이었다.

“그 부군과 관련된 일이니, 부군도 용서할 것입니다. 내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어 왔습니다. 그대 집안의 일은 이 이야기 후에 이어 듣기로 하지요. 우선은 내 질문에 대답이 거짓이 없기를 바랍니다.”

은과 닮은, 올곧은 표정의 인에게 비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휘. 검은 잎새 가문의 장남이자 나의 첫 번째 부군인,”

비는 반듯하고 의연하게 앉아서 찌를 듯이 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인도 무언가를 느낀 듯 했다. 총기 어린 검은 눈동자가 물러섬 없이 그를 향했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인은 순간 한탄이 나오려는 것을 잠시 참았다. 그가 누구인지 몰라서 자신에게 물을 리 없다. 어찌 알았는가. 하늘 아래 비밀은 없다 하여도, 이리 혼잡스러우실 때 진실을 아시다니.

적어도 이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아시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을. 그러나 그는 대답을 해야 했다.

“짚이는 것이 있으셔서 저에게 그리 하문하시는 것 아닙니까?”

“나는 그대가 진실을 말해줄 거라 생각합니다. 휘, 그는…….”

마지막으로 확신을 담고 비는 인에게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던졌다.

“아바마마께서 정하신 정당한 황실의 후계가 아닙니까?”

인은 숨을 들이마셨다. 언젠가는 아시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은 너무 절묘하지 않느냐.

조금만 더 일찍이거나, 조금만 더 늦게였다면 좋았을 것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확신을 가지고 확인하시고 싶으신 것뿐이지 않습니까, 폐하.”

인의 친절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는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는 뜻이로군요. 인.”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서 폐하를 궁으로 모시지 않으면 곤란했다. 분명 비밀리에 발걸음 했음이다. 선황께서 안전을 생각해 너무 거동을 제재하셨기에 전에는 자신의 의지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시던 분이, 이제 진실을 알기 위해 이리 움직이셨다.

변화는 기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 무엇이 궁금하신 것입니까?”

인은 지금 돌려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화려한 돋을새김이 두드러진 촛대 위 촛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째서, 휘, 그는 그러함에도 나를 대신하여 황위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그가 황위에 올라 나를 취하겠다 말했다면 그로서는 오히려 간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것만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군요. 이 복잡한 길을 그가 왜 선택하였는지. 무엇을 버리면서 그 자리를 부여잡았는지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비가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그것은 그분이…… 폐하를 몹시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이, 어떻게 그리로 튀는지 알 수가 없군요.”

“선황께서는, 곧 죽어도 지금의 폐하를 권력의 중심에 놓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계셨지요. 그분이 어찌 그리 생각하셨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선황께옵서 청 마마님께서 가시고 그리 변해버리신 것은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입니다.

폐하, 폐하께옵서는 누구보다도 외견이 청 마마님과 닮으셨습니다. 하루하루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닮아가는 딸을 보면서, 선황께서는 다짐하셨습니다. 결코 자신의 아내처럼 권력의 정점에 자신의 딸을 두어 그리 일찍 힘겨움 속에 떠나보내시지 않겠다고. 그래서 선황께서 내리신 밀지에는 휘 공자님이 제위에 오를 때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대답이 필요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비의 검은 눈동자에는 인의 고뇌 어린 얼굴이 가득 담겼다. 정말이지 송구하다는 얼굴로 인이 대답하였다.

“자를 무천(茂千)으로 받은 그분, 휘 마마님께서 결코 지금의 폐하를 곁에 두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혼인으로서 절대 묶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 그것이 선황께서 가장 우선하였던 조건이었습니다.

선황께서는 생전에 폐하를 혼인시키고자 하였으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하셨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있을 일을 막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셨겠지만 말입니다.”

비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였는가. 그런 이유라니.

“그러나 휘 마마께옵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세 수장을 모아놓고 저희와 거래를 하였습니다.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포기할 테니, 대신에 비 마마님을 자신에게 달라 하였습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냉랭해 보이는 얼굴에 비치던 다정한 감정. 차가우면서도 자신을 배려해주는 손길. 검은 눈동자에 비친, 외면하고 피하려 해도 언제나 다가오는 그의 연심.

「우리는 분명 전에 만난 적이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