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대는 평생 나 외의 남자 품에는 안기지 못할 것이다. 내 허락 없이는 절대로.”

아란국 도한제의 유일무이한 외동딸 비(庇) 공주. 갑작스런 황제의 사망 이후, 황위를 이어받는 동시에 혼례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신하들은 그녀의 정인이었던 연(戀)이 아닌 검은 잎새 가문의 장자 휘(揮)를 정실 지아비로 두라고 강요한다.

단지 권력에 눈이 멀어 혼인을 택한 줄 알았던 휘는 첫날밤 비에게 거부할 수 없는 언령을 내리는데…….

“나를 미워하여도 좋으니,”

나지막한 저음의 목소리. 입술에 대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나를 떠나가지는 마라. 미워해도, 내 곁에서 미워하여주길 바란다. 내 눈앞에서, 내 손이 닿는 곳에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거리에서, 나를 실컷 미워하여도 좋다. 그저…… 떠나지만 말아다오.”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ebook)

엘핀느의 꽃(ebook)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ebook)

달콤한 말 세 방울(ebook)

푸른 단검과 흰 장미(ebook)

하우스(ebook)

맑은 하늘 푸른 잎새(ebook)

목련화(ebook)

루비아스 마티아스(ebook)

그해 여름, 우리는 이혼했다(ebook)

로맨스는 없다(ebook)

비밀의 숲(공저)

3. 차례

#0. 서시(序詩)

#1. 혼례(婚禮)

#2. 초야(初也)

#3. 대가(代價)

#외전. 은의 이야기

4. 미리 보기

「한 달 후 혼례는 검은 잎새 가문과 하셔야 합니다. 검은 잎새 가문의 휘 공자와.」

여러 가문이 있었으나, 현재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가문은 셋이다.

검은 잎새 가문. 붉은 꽃잎 가문. 푸른 줄기 가문. 아란국의 시조 시절, 이 나라를 든든하게 지탱하라는 의미에서 그리 지었다 들었다.

검은 잎새 가문의 장자인 휘(揮).

이름만 들어봤을 뿐, 얼굴 한번 본 적 없다. 우연이라도,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뒤늦게, 권력에 탐이 났던가. 연을 만나기 전, 혹은 만난 후에도 수없이 애정과 관심을 표하던 다른 남자들이 외려 순수하게 느껴질 정도다.

비는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붉은 빛깔의 성장을 차려입은 그녀의 섬섬옥수가 소매 속에서 분개함으로 굳게 쥐어졌다.

지독한 싸움이었다. 한 사람의 지아비만을 두고 싶다면 검은 잎새 가문의 혈통으로 하라는, 그러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대신들의 의지는 하늘을 찔렀다. 그들 입장에서는 백번 양보하여 연 공자를 받아들인다는 입장이었다.

그것도 검은 잎새 가문의 휘 공자와의 혼례 후에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모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지지세력이 거의 없는 비의 입장에서는 힘겨운 싸움이었다. 검은 잎새 가문을 중심으로 대신들이 뭉쳐 있었다. 중립을 지키는 입장도 있었지만, 기반이 약했다. 투쟁 끝에 그녀는, 문서화된 약조를 얻어내었다.

그녀가, 원하는 바를, 겨우.

연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싸우지도 않아. 연과 함께하지 않는 인생이란,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황실의 혈통이기는 해도, 황제의 자리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그런 자신이 황위에 오른다는 건, 참으로 어불성설이었다. 대대로 아란국 황실은 대대로 손이 귀하다. 지금은 희미해져 거의 사라졌다는, 그들만이 지닌 특수한 능력 탓이라 하였다.

그러나 비는 그것마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를 황위로 올리지 않겠다는 선황의 의지가 워낙에 확고하여, 선황의 생전에는 황위 계승순위에 이름이 오른 적도 없었다. 그녀 외에 다른 후계자를 갖겠다는 선황인 도한제의 결심은 분명하여 늘 침소에 여자가 끊이지를 않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태기도 없었다.

그의 후손은, 도한제가 열렬히 사랑하던 청(淸)과의 아이인 비뿐.

도한제에겐 흔한 황위다툼은커녕, 형제조차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후계자를 찾는다는 것은 몹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이 그립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품에 안겨서, 다친 마음을 위로받고 싶다.

다정한 목소리. 차분하고 기품 있는 태도. 옅은 갈색의 머리는 언제나 단정히 하나로 묶여 있었다. 여인보다 더 고운 얼굴이지만, 그래도 마음 하나는 단단한 사람.

내 사람.

언젠가의 꽃놀이에서처럼,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안심이 되는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었다.

「날이 몹시도 맑군요. 우리의 혼롓날도 그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꽃과 같은 신부를 맞으니 다들 몹시도 질투를 할 것입니다.」

「연 공자님이야말로 저에게는 과한 사람입니다. 실권이 없는 공주임에도 황실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인재라 칭함 받는 연 공자님 앞날에 오히려 폐가 될까 두렵습니다.」

그때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저, 신생 귀족가문 출신인 연이, 공주인 자신을 처로 맞아 그 재능을 모욕당할까 봐 염려했을 뿐이다. 그는 기재(奇才)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이로,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날 뭐라 했었던가.

「그렇다 생각하십니까?」

다정스레 웃는 연의 눈초리가 장난스럽게 휘었었다. 좋아하는 미소. 그는 늘 자신에게 꽃과 같다 이야기하지만, 그녀에게는 연이야말로 활짝 만개한 꽃과 같이 귀한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건 실리가 아닌 애정으로 자신을 선택해준 고운 내 사람. 그의 재능은 보석과도 같았고 그의 인품은 따스한 햇볕 같았다.

이 남자라는 큰 나무 그늘에서 계속해서 쉬고 싶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면, 정말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늘.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그런 일들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면 좋겠다. 그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만 아바마마가 돌아가신 후, 무엇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비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잠시 숙였다.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표정변화가 별로 없었다. 자기주장을 하는 법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