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색 세단이 금세 보미 앞에 다가왔다. 보미는 경욱에게 고맙다는 표시의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랐다. 어색했지만 마음이 푹 놓였다.
“고맙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인사도 못 드렸어요. 일은 잘 되시고 잘 지내셨죠?”
잘 못 지냈어. 너 때문에.
“난 잘 지냈어. 너는 잘 지냈어?”
“저야, 뭐 항상 잘 지냈어요.”
잘 지냈다고? 어떤 일을 했니? 경욱은 보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니 아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미의 본래 성격이 어떤지, 취향은 어떤지, 살아온 환경에 대해서, 지금껏 어떻게 지내왔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직장생활을 잘하는지,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어떤 친구들을 만나는지…….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었다.
알고 싶다. 너를 속속들이.
“……선생님, 죄송해요.”
“괜찮아.”
“오해하지…… 않으시죠?”
“오해하지 않아.”
경욱의 말투가 단호했다.
당연히 오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묻고 싶었다. 무슨 일인지, 그놈이랑 얼마나 알고 지냈는지, 그놈이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놈이 얼마나 보미를 힘들게 했는지, 그놈이랑 사귀었었는지. 경욱의 내부를 열어보면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막혔다. 차가 막히는 게 좋을 때도 있구나. 빨간 신호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지금 이 시간을 뚝 떼어내어 가둬두고 싶었다. 두 사람만 있는 이 공간 이대로 둥실 떠서 어디론가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보미는 피곤한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려 차창을 보고 있다.
“창문 좀 열어도 돼요? 속이 아프고 머리도 아파서요.”
“그래.”
보미가 차창을 열었다. 차갑게 식혀진 바람이 안락한 차 안으로 밀려든다. 그러자 보미의 향기가 차 안 전체에 감미롭게 감돌기 시작했다. 경욱은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차 안이 꽉차있는 느낌이다. 보미가 다시금 시트에 몸을 묻으며 멍하니 복잡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경욱은 눈길을 살짝 돌려 보미의 턱을 바라본다. 고집스럽게 다문 도톰한 입술이 매력적이다. 둥글고 살짝 이중이었던 턱이 지금은 보기 좋은 선을 이루고 있었다. 턱부터 목덜미까지 이어진 선이 부드럽고 여성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선생님. 정말 죄송했어요. 그때는.”
그때 일을 생각했었구나. 내 생각했었구나.
“아니야. 내가 미안했어. 내 생각만 했다고 후회 많이 했어.”
“그 일이 있던 날 정말 힘든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선생님 생각을 많이 못하고 지냈어요.”
“그래?”
“그래도 가끔씩은 생각이 나곤 했어요.”
“그랬겠지. 충격이 커 보였으니까.”
“믿을 수 없었어요.”
“……뭘 말이야.”
“그때 그 고백이요. 마음이 아팠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선생님이 싫었거든요. 선생님 왜 저를 좋아하셨어요? 정말이세요? 장난이시죠? 왜 그러셨어요…….”
잊지 못했으리라고는 생각 못하는 것 같다. 아직도 경욱이 보미를 좋아하는 걸 알면 그런 식으로 물을 수는 없을 테니까. 경욱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니? 아니면 나를 탓하는 거니? 내가 자책하느라 정신이 빠질 것 같은 교사생활과 네가 그리워 몸부림치던 그때의 괴로움을 알 리가 없지.
“장난으로 그런 거라 생각해? 사람 좋아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면 아까 네 앞에 서있던 놈은 왜 그렇게 네 앞에서 절절 맸을 거라 생각하니? 싫다는 사람 왜 붙들고 안달하며 애원했을 거라 생각해? 사람 좋아하는 건 생각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건 충족되지 않으면 힘든 감정이기 때문이야.”
“그렇게까지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감정이 어떤 건지 실감이 안 나요. 어쨌든 이제 예쁜 분 만나셔서 다행이에요.”
아니야, 아직 아니야. 아직 못 잊었다고 어떻게 말할까. 아직도 그때와 같다고 하나도 달라진게 없다고…….
경욱은 입 앞까지 나오는 말을 삼키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혹시 향수 써?”
“향수요? 냄새 나요? 고등학교 때 시집간 큰언니네 집에 잠시 있었을 때 언니가 저에게 작은 통으로 하나준 걸 계기로 그 브랜드 지금까지 써요.”
“혹시 울트라 바이올렛?”
“네, 아 그 향수 아세요? 여자향수인데. 옛날에는 아끼느라고 아주 조금씩 뿌리고 다녔었어요. 이제는 제가 구해서 쓰지만…… 손목이나, 목덜미에요. 매일 사용해요. 오늘도 뿌렸는데…….”
보미는 자신의 목덜미를 돌려 만졌다. 예전부터 있던 습관이다. 그 바람에 쇄골아래까지 목덜미가 살짝 드러났다. 운전이 위험할 정도였다. 이토록 사람 흥분시킬 수 있을까. 이대로 어딘가 데리고 도망가고 싶다. 확 안아버리고 싶다. 품 안에 가두고…… 아, 젠장 나는 짐승이다.
보미는 경쾌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 남자. 대학 2학년 때 만나서 딱 3개월 사귀었었어요. 처음 사귀었던 사람인데 저한테 상처를 줘서 그 사람 만난 이후로 아무도 만나질 못했어요.”
“무슨 상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헤헤, 말씀드릴 순 없어요.”
보미는 어색한지 차창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정말 싫어요.”
보미가 여러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진 않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그럴까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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