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야, 우리가 아는 앤워 공녀가 저 아가씨 맞냐?”

키 178센티미터에 이름처럼 우람하고 강건한 여자 강건.

그녀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는 것. 좋아하는 소설을 읽고 잠든 다음 날, 강건은 소설 속 주인공인 셀레나에게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미친개’ 레일라가 된다.

소설 속에서 마족과 계약을 맺은 레일라는 결국 온몸에 마기가 퍼져 죽고 마는 운명이다. 강건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성(聖)기사 키리에는 레일라에게 묘한 호감을 표시하고…….

“처음 봤을 때부터 레일라의 첫인상이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어. 지금껏 보지 못했던 유형의 사람이라 호감이 가는 줄 알았었는데 네가 다른 남자랑 친근하게 이야기하면 질투가 나고 점점 좋아지더라고. 날이 갈수록.”

“…….”

“매일매일, 좋아져.”

도무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2. 작가 소개

필명 : 추홍예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재미있는 글 읽는 것은 더 좋아하는 초보글쟁이입니다.

저는 어떤 작가님 글을 보고 재미있으면 다음 작품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믿고 보는데, 언젠가는 저도 독자님들께 그런 글쓴이가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매일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출간작

크로스 더 라인

레일라

3. 차례

#8

#9

#10

#11

#12

4. 미리 보기

비었다.

빈 공간이 있어.

최근 키리에가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다. 자신 안의 깊은 곳 어딘가가 뚫려 있다는 느낌. 가만히 있다가도 문득 낯선 ‘부재’가 ‘존재’하는 것을 깨달으면 그 싸늘함에 몸서리친다.

그렇다고 언제는 속이 미어터질 정도로 꽉 차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어도 뿌듯하지가 않고 헐겁기만 하다. 뭔가 있어야 할 게 없다는 건 확실했다. 이상한 것은 그것이 당최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형체를 갖추지 못한 채 희미하게, 하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언제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안개 같은 모호함이 그의 숨을 조여 온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낯선 감정에 휘둘리기 시작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며 아무문제 없이 지내온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자꾸 뒤를 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

키리에는 혀를 차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헛생각에 낭비할 시간 따위 없었다.

엘프의 영역은 광범위하게 결계가 펼쳐져 있어 의외로 마물들에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다. 거주 지역인 중앙을 제외한 외곽 지역까지 마물들이 침입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직접적으로 노출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셀레나 일행이 안전하게 들어오고 난 뒤, 외곽지대에서 상당한 무리의 마물이 떼로 포착되었다. 일단 추이를 지켜보다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서야 마물 소탕을 하려고 했는데, 조금 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마물이 결계를 밀어붙이던 움직임이 뚝 끊겼다.

지금 키리에는 자진해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러 나온 것이다. 만약을 위해 다른 동료들은 폭력에 취약한 엘프들과 셀레나를 지키기 위해 대기하기로 했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외곽지대를 살펴보던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감탄성을 흘렸다. 집단으로 몰려왔다던 마물들이 다 어디 가서 잠잠한가, 했더니 몰살을 당했던 모양이었다. 나무나 바위 뒤에 미처 태우지 못한 마물의 신체 일부로 보이는 것들과 불탄 흔적으로 미루어 추측컨대, 마물을 죄 죽이고 불까지 질러 사체를 태워서 뒤처리까지 깔끔하게 한 것 같았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니, 다른 성기사들이나 마물사냥꾼들이 온 건 아닌가 싶었다.

그때 그녀를 발견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었지만, 제일 처음 키리에가 인식한 존재는 여자였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거물급으로 보이는 ‘마족’ 여자.

즉시 속에서 확 치받치는 것이 있었다. 빈 공간이 노도처럼 차오르는 것으로 순식간에 꽉 메워진 느낌.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중심이 잡힌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상대는 마족이다. 벅차오르는 만족감 같은 것을 왜 느낀단 말인가.

키리에는 자신이 강한 적을 만나 호승심을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요즘 피가 끓어오를 정도의 위기감이 부족했던 모양이라고. 만만치 않은 적을 발견하자 빌빌대던 스스로가 정신을 차린 것이라고.

남자와 다정하게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얼핏 단란한 가족을 연상시킬 정도로 친근해 보였다. 그 친밀한 실루엣이…… 눈에 확 박히는 그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거슬렸다. 키리에의 표정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미세하게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족 여인만 인식하고 있을 때와 달리 저 셋을 한꺼번에 눈 안에 두자 또 다른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쩐지 꺼림칙하다. 속이 뒤집힌다.

강적을 만났기 때문이다. 키리에는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상기시켰다. 불쑥불쑥 비집고 솟아오르는 감정들이 유독 강렬한 것은 그만큼 강한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여자는 고위급의 마족이라고 짐작 되었고 그녀가 안고 있는 아이도 아마 마족인 듯싶었다. 마족들과 태연히 붙어서 다정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남자는 인간으로 보였다.

계약자임이 분명하다. 계약자가 아니라면 어찌 마족과 저런 식으로 밀착해 있을 수 있으며, 어찌 스스럼없이 만지겠는가. 계약자가 마족 여인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감싸 안는 모습에 심사가 복잡하게 얼크러지며 짜증이 났다.

……살의가 치민다.

그 순간 키리에는 이미 단검을 던지고 있었다. 그 방향이 마족이 분명한 여자 쪽이 아니라 남자 쪽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아차 싶었지만, 마족 여인이 그 날을 가볍게 잡아채버리자 또 무언가가 울컥했다.

“보호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군. 그쪽이 계약자인가 보지?”

키리에가 던진 단검과 비아냥거림에 마족 여인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키리에는 그때부터 마족 여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시선끼리 맞부딪친 순간 작살에라도 꽂힌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족 여인은 아이를 남자에게 넘겨주고는 뒤로 살짝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명백히 둘을 보호하려는 몸짓이었다.

하, 마족이 저렇게나 배려심이 깊었었나?

키리에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마족 여인의 시선을 마주 보며 속으로 트집을 잡았다. 안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게 마족을 향한 살기인지 분노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격렬한 감정이란 것은 확실했다.

마물이나 마족을 발견한 즉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격해 없애던 키리에는 자신이 평소와 완전히 다른 반응을 하는 중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마족 여인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레일라는 ‘숨이 멎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볼 기회가 없었다. 키리에를 만난 후로 이 정도로 길게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거의 매일 훈련한답시고 하루에도 몇 시간이나 붙어 있었으니까.

……저 남자는 왜 저렇게 잘생겨가지고.

레일라는 속으로 괜히 투덜거리면서 새삼 그를 구석구석 관찰했다.

아주 짧게 다듬었다가 지금은 조금 자란 흑발이 자연스레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라든가, 또렷한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표정이라든가, 잘 단련된 신체, 190에 육박하는 키라든가.

특히 눈동자. 성별을 떠나서 정말 아름답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파란빛에 섞여든 은빛이 마치 단 하나뿐인 진귀한 보석처럼 시선을 사로잡았다.

레일라는 그동안 키리에의 외모에 꽤 단련됐다고 여겼는데, 좀 떨어져 있었다고 내성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심장이 탭댄스를 추고 난리도 아니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째 살이 좀 빠진 듯 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날카로워졌다는 것이다. 레일라가 그동안 속된말로 ‘빡세게’ 마물들을 때려잡고 다닌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키리에와 셀레나 편하라고 그랬던 것이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묘한 죄책감도 들었다.

레일라는 천천히 다가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어서 더 다가가고 싶은 발을 억지로 붙들어 맸다.

너무 멀어.

키리에가 봤을 때는 난처해하는 듯한 표정이 읽힐 정도의 거리였지만, 대화건 공격이건 주고받기에는 아직 터무니없이 먼 거리였다.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런 어중간한 거리에서 뭘 하자는 거지?”

불편한 심기를 가득 담아 약간 큰 소리로 외치는 말에 레일라도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것도. 우린 공격의사 없으니까 이대로 갈 거야.”

레일라는 이미 말을 맺기도 전에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서있던 키리에는 그녀가 몸을 다 돌리고 정말 그냥 가려는 모습에 얼른 앞으로 움직였다.

“이봐, 잠깐!”

“왜?”

레일라는 다시 키리에를 돌아보다 기겁하며 손짓을 했다.

“거기 멈춰! 거기 서서 얘기해!”

양손을 앞으로 쭉쭉 뻗어 밀어내는 몸짓을 하며 질색을 하는 모습에 키리에는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마족과 성기사들은 원래 철천지원수이긴 하다. 특히나 키리에 본인이 소속된 가브리엘 휘하의 기사들은 더욱더 그렇다. 마주치면 둘 중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게 정상이란 말이다.

서로 한 공간에 있는 상태에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물러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두려움을 가감 없이 드러내다니. 키리에는 그녀의 거부반응이 어쩐지 일종의 공포에 질린 모습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마족이란 폭력과 파멸에 환장한 존재들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며 추구하는 즐거움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그건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 아무리 강한 존재에게도 앞뒤 재지 않고 덤벼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싸워서 이겨 상대를 파괴해도 좋고 자신이 죽어도 좋다는 게 마족들이었다.

적에게 두려움을 숨기지 못하고 싸움을 회피하는 마족이라니.

키리에가 당황해 침묵하는 사이 레일라 역시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키리에다. 당연히 공격할 마음 따위 없었고, 괜히 근처에 갔다가 마킹인지 뭔지 때문에 생긴 체취가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 아닌 마족이 됐는데도 여전히 마킹의 효과가 있을까?

지금까지 하도 정신이 산만해서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레일라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 효과가 완전히 사라졌기를. 만약 정말 사라졌다면 마족으로 변한 것이 쓸모없지만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레일라는 슬금슬금 뒤로 이동하며 말했다.

“할 말 없으면 갈 거야.”

당장 키리에가 성큼 한 발을 내딛었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말라니까!”

“그럼 너도 더 이상 움직이지 마. 왜 자꾸 뒷걸음질을 치는 거지? 도망이라도 치려는 건가? 마족 주제에?”

그래!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 싶다고!

레일라는 키리에가 의도적으로 비꼬는 말에 반응할 정신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말 좀 들었다고 화가 나 맞받아칠 만큼 본인에게 마족이라는 프라이드가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 정신적인 면에서라도 스스로다운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레일라는 억울함에 소리 지르는 대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멈출게. 자, 멈췄잖아. 댁도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거기에서 말해.”

“알았다.”

“…….”

“…….”

휘이잉. 둘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유난히 거셌다. 손에 만져질 듯한 침묵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멀뚱멀뚱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레일라였다.

“……말을 하시라고요.”

“아…….”

“할 말이 있어서 불러 세운 거 아니었어?”

물론 따져보면 할 말은 많았지만 키리에가 레일라를 붙잡았을 때는 특별히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잡았다. 뒷모습을 보이자 다짜고짜 놓칠 수 없다는 마음이 일었던 것이다.

키리에는 그런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는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이곳이 엘프의 영역인 건 알고 있겠지. 조금 전의 마물들은 네가 불러냈나?”

“아니.”

“너 정도의 고위마족이 불러낸 게 아니라면 누가 그랬다는 거지?”

“……이미 마물을 불러낸 게 나라고 확신한다면 새삼 확인할 거 있어? 그냥 공격을 하지 그래?”

“그래. 사실 지금 이 상황도 말이 안 되지. 일부러 물을 필요도 없이 우린 서로 싸우고 있어야 해. 그런데…….”

키리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보기 드문 강력한 고위마족이다. 먼 거리에서 보자마자 강한 마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럼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살의가 일어나기는커녕 먼저 공격해야겠다는 의지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저 여자를 보자마자 불붙은 화산마냥 폭발하던 감정은 호승심이 아니었단 말인가?

키리에는 혼란에 빠졌다. 시선은 여전히 레일라의 두 눈동자에 고정시키고, 겉으로는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레일라는 그녀대로 내부에서 격렬한 갈등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한 발만 잘못 디디거나,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왠지 왕창 잘못될 것만 같은 느낌에 당장이라도 제이와 루비를 데리고 달아나고만 싶었다.

한편으로는 발이 땅에 붙박인 것처럼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또 다른 마음도 존재했는데, 오랜만에 정면으로 키리에를 실컷 볼 수 있어 좋다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흐뭇해하고 있다는 점이 스스로를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조금이라도 더 키리에를 마주 보고 싶다는 매우 정신 나간 것 같은 감정과 일 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이성이 머릿속에서 엎치락뒤치락 난동을 부리는 중이었다.

일행을 떠나오며 키리에의 기억까지 조작해달라고 부탁했을 때에는 그게 옳은 일이라는 생각에 한 점 망설임이 없었다. 레일라는 뒤돌아보지 않고 단호하게 그들을 떠났다. 그 뒤에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될지 생각해본 적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셀레나가 더 걱정되고, 키리에가…… 이렇게까지 그리워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외로움이라는 놈이 이렇게 사람 갉아먹는 잔인한 것인지 몰랐고, 불안이란 녀석이 한번 들고 일어나면 얼마나 거친지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쥐고 흔드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지금, 귀신에 홀린 것마냥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자기 자신 또한 제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