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위에서 시작된 두 남녀의 9년의 얽힌 사랑 이야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얼음을 지치는 일, 나는 어릴 때부터 피겨를 해왔다. 열네 살에 미국으로 건너와 스물두 살이 되기까지 나는 숙명처럼 얼음을 지쳤다. 그런 나에게 세계적인 피겨 스타이자 훈련 동료인 쥬드 그리피스가 다가온다.
몇 년을 기다리고 기다려온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내지 못하고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날, 쥬드와 보낸 불장난 같은 하룻밤은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쥬드 그리피스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바람둥이에 꿇릴 것이 없는 그의 배경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내게 이럴 이유가 없는데…….

어느 날 그녀가 내 마음 안으로 미끄러졌다. 오로지 얼음만 바라보는 너의 관심을 나에게로 붙잡아 두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이제는 기다리지 않는다. 너에게는 그날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만 자꾸만 나를 밀어내고 부정하는 너에게 단순히 훈련동료로서 순순히 물러나주고 싶지는 않거든.


*본문 중에서

남자 라커룸에 도착한 쥬드가 사물함을 열었다. 사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중요한 물품은 들고 다녔기에 사물함에 열쇠를 채우지 않고 다녔다. 때문에 열쇠를 지니고 다니는 것이 더 귀찮은 일이었다. 그만큼 사물함에는 중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넣어놓고 사용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쥬드는 달랐다. 스케이터에게는 중요한 물품인 스케이트화도 사물함에 넣어놓고 다니곤 했던 것이다. 물론 열쇠는 채우지 않은 채로.
“여기가 남자 라커룸이구나.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데?”
첼시가 자신이 한 농담이 웃겼는지 계속해서 깔깔 거렸다.
“이제 가자.”
쥬드가 앞장 서 라커룸을 나서자 첼시가 흥미로운 듯 내부를 둘러보며 뒤따라 나왔다.
그렇게 라커룸을 나올 때였다. 링크장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까부터 불빛의 정체가 궁금했던 쥬드가 발걸음을 돌려 링크장을 훤히 볼 수 있는 1층에 구비된 소파로 다가갔다.
“얼른 가지 않고 뭐…… 어머! 저기 사람 있네.”
첼시가 말했다. 호들갑스러운 첼시와 달리 쥬드가 이 야밤에 훈련 중인 여자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런 눈빛과는 달리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 여자의 스케이팅을 지켜보고자 작정한 듯했다.
“누구야? 저 여자는? 쥬드도 아는 사람이야?”
첼시가 질문을 퍼부었지만 쥬드가 대꾸를 하지 않자, 첼시 역시 쥬드의 곁에 얌전히 앉아 여자의 스케이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리 큰 관심은 없었다. 첼시의 관심은 어서 빨리 돌아가 쥬드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쥬드가 말이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첼시가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뭐야? 따분하게시리.”
링크장의 얼음 위에서는 유리로 벽이 쳐진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나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얼음 위의 스케이터는 연습에 몰두하느라 쥬드와 첼시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조명을 다 켜지 않아 실내는 어둠으로 푸르스름했다. 그 가운데 몸에 딱 붙는 연습복을 입고 여자가 얼음 위에서 스케이팅을 펼치고 있었다.
쥬드는 여자가 첼시와 자신의 존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스케이팅에 빠진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못마땅했다.
얼마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점프를 하다 넘어졌다. 아쉬운 듯 손바닥으로 빙판을 내리치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언뜻 보아 화가 난 듯 했다. 쥬드는 그녀의 얼굴 표정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유리벽에 바싹 다가섰다. 입을 앙다물고 그 예쁜 눈에 오기를 담아 얼음 위로 미끄러지는 여자의 표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돌아선 그녀는 다시 얼음 위에서 연기에 몰두해 나가고 있었다.
그때 첼시가 쥬드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에로틱하게 쓰다듬었다.
“자기야, 여기 왠지 스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쥬드는 첼시의 손길조차 느끼지 못하고 빙판 위에 선 스케이터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쉐린 리. 같은 에클레스턴 선생님의 문하생이었지만 그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TV나 잡지를 통해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은 그녀에 대한 정보랄 것도 없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비엘만 스핀이 가장 예쁜 스케이터 1위, 얼굴이 예쁜 스케이터 1위, 에지가 올바른 여 스케이터 1위. 그 정도일 뿐 그녀의 스케이팅은 상위권의 그것이 아니었기에 그녀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다. 알려진 정보도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녀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 맞았다.
그녀와는 단 한 차례도 연습을 같이 해본 적이 없었다. 스프링턴 내에서도 자신이 어울리는 선수들은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녀와 인사를 해볼 기회도 없었다. 우연히 라도 마주친 적이 있었을까?
쥬드가 얼음 위의 채린을 훑었다. 윤기 나는 까만 머리를 틀어 올려 동그랗게 묶었다. 티 하나 없을 것 같은 새하얀 얼굴. 청아하지만 새치름해 보이기도 하는 치켜 올라간 눈매. 앙증맞은 코, 도톰하고 붉은 입술. 예뻤다.
쥬드가 그녀의 모습을 이리 훔쳐보는 것도 모르고 채린은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심술이 살짝 섞인 장난기가 쥬드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적당한 시기를 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리라. 자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면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의 주특기라는 비엘만 스핀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애절한 연기. 하얀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가 슬픔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가 연습을 멈추었다. 붉은 조그만 입술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무언가를 생각하며 그녀가 얼음을 천천히 맴돌았다.
한여름에 그렇게 얼음 위에서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채린의 얼굴은 그러나 땀방울 하나 흐르지 않는 매끈한 모습이었다. 얼음 위를 지치는 그 매혹적인 모습이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는 한 마리의 새 같았다. 다시 연습이 시작됐다. 허리를 뒤로 젖힌 이너바우어. 순간 쥬드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이어진 더블 악셀 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 점프. 마지막 토룹 점프에서 채린이 랜딩에 실패하며 미끄러졌다. 그녀가 한동안 차가운 얼음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쥬드는 빨려들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표정일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때였다. 얼음 위로 무언가가 반짝 떨어졌다. 눈물이 얼음 위에 점점이 뿌려졌다.
쥬드는 안쓰러움과 함께 스케이터로서 저런 노력을 얼음 위에 쏟아 붓는 여자에 대한 동경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가 어서 자신을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났다. 누구에게도 느껴보지 못한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일어나 다시 얼음을 지쳤다. 순간 쥬드의 뱃속이 뜨거워지며 하반신에서 시작된 열기가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녀를 취하고 싶다는 욕구가 피어오른 것이다. 쥬드는 순간적인 자신의 반응에 놀라 채린에게서 눈을 뗐다. 첼시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애교스럽게 말했다.
“쥬드, 그만 가자. 응? 여기 정말 따분하다고.”
“알았…….”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자, 쥬드가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말했다.
“알았어. 곧 갈 거야.”
그리고는 다시 얼음 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없다! 그녀가 사라지고 새하얀 얼음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쉐린이 스케이트화를 어깨에 맨 채 펜스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쥬드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갈 듯 벌떡 일어나자 첼시가 참았던 짜증을 분출했다.
“뭐야? 쥬드. 설마 저 계집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 자기가 저 동양인 여자를 어떻게 쳐다봤는지 알고 있어?”
첼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어두운 공간으로 사라지는 쉐린이라는 저 여자에게 자신이 그녀를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해 쥬드는 갑자기 안달이 났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 그녀를 따라잡아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것은 너무도 이상하고 유치해 보일 것이 뻔했다. 쥬드는 자기도 모르게 허공에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런 쥬드를 바라보던 첼시가 요염하게 웃으며 냉큼 쥬드의 팔짱을 꼈다.
“빨리 가자, 자기야.”
여름 밤, 쥬드가 아쉬운 발걸음을 떼고 있다는 것을 파트너인 첼시도 몰랐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쥬드는 얼음 위의 그녀에게 강렬하게 사로잡혀 그 잔상이 머릿속에 내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전자책 <너를 사랑해>. <도도>, 가 있음.

송여희라는 이름으로 두 권의 종이책 <십년지기>와 <안개바람의 저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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