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아리엘일 것이다.

은빛기사단의 최연소 단장 아리엘 폰 하트하르스는, 반역으로 대화재가 일어난 황궁에서 제 오랜 짝사랑인 제2황자 라트니히 칸 비네시스가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갈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다 죽음을 맞이했는데…… 눈을 뜨니 5년 전, 열일곱 살로 돌아와 있다!

지난 삶을 후회한 아리엘은 이번 생에선 그의 행복만을 지켜주기로 다짐하고, 그런 그녀에게서 라트니히는 위화감을 느낀다. 소유물로만 생각했던 아리엘이 저를 떠나버릴까 두려워하다 제 곁에 묶어둘 방법을 생각해냈으니, 바로 그녀가 저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

아름답지만 미친 황자라고 불리는 라트니히와, 검술은 뛰어나나 다른 데선 둔하디둔한 아리엘의 마음은 언제쯤 통할 수 있을까.

“너, 내가 아는 아리엘이 맞는 거지? 그렇지?”

“나는 아리엘이 맞아. 나는 앞으로도 네 곁에 남아 있을 거니까.”

“약속한 거야?”

“그래.”

“내 손발 주제에 날 배신하면, 두 번 다시 햇빛을 못 보게 될 줄 알아.”

“응. 내가 널 배신하면 그땐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2. 작가 소개

3. 차례

#Chapter 1. 돌아왔습니다

#Chapter 2. 비네시스의 악녀

#Chapter 3. 언제까지나 아이로서 살 수는 없습니다

#Chapter 4. 너는 모르는 이야기

#Chapter 5. 각자의 사정

#Chapter 6. 의문

#Chapter 7. 경계

4. 미리 보기

그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내 허리를 껴안았다.

“……!”

예민한 나조차도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상대는 실력자였다. 화들짝 놀라 침대에 놓인 보검을 빼들었는데 검을 들고 고개를 돌린 순간 익숙한 자색 눈이 내 눈과 맞물렸다.

“어서 와, 아리엘.”

귓속을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

“……라트니히?”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마주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최상급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운 자색 눈동자가, 그 어떤 음악보다도 감미로운 목소리가 전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아니, 어떻게…….’

“보고 싶었어.”

충격에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하트하르스 가문의 보검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서 처참하게 굴렀지만 나는 그저 멍청하게 입만 딱 벌리고 서 있었다.

“라트니히…….”

따스한 온기를 띤 라트니히의 손이 내 볼에 닿자 그제서야 지금 이것이 꿈이나 환상 따위가 아닌,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너야?”

목소리가 절로 떨리며 시야가 뿌예졌다. 그토록 마음을 다스리고자 노력했는데, 겨우 마음의 안정을 조금 찾은 줄 알았는데, 이런 내 노력과 기분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전부 허사가 되어버렸다. 언제부턴가 심장은 어느새 고장난 듯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진짜로, 살아 있는 라트니히인 거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마주한 그가 눈살을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당연히 나는 살아 있는 라트니히이지. 설마 너,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죽었을 거란 생각이라도 한 거야?”

더 이상 환상 속에서라도 그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했었다. 내가 아는 라트니히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살짝 찡그려진 미간과 못마땅하단 듯이 올라간 눈썹, 삐딱하게 기울어져 비웃는 입술까지 내 눈앞에 있는 그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가진 그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라트니히 자체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로 너구나…….”

두 손을 들어 내 볼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아, 그래. 이렇게 따스하고 생생한 온기를 어떻게 환영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는 네가 이 세계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네가 없으면, 라트니히 네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리엘 폰 하트하르스일 수 없는데 말이다.

이건 현실일 수도 있는 게 아닌, 정말로 현실이었다. 그를 앞에 두자 강한 확신이 나를 강타했다.

“전부 진짜였어…….”

그의 말 한마디에, 아니 라트니히의 손짓 한 번에 절대로 내가 아는 그를 만날 수 없을 거라던, 정체 모를 것이 내게 걸어놓은 언어의 주박이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마침내, 드디어 나는 온전히 땅에 발을 디디고 서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지금 살아 있어. 여기, 이렇게 내 앞에!’

내내 확인하기 두려워했던 것이 사실이 아님을 깨닫고 안심했기 때문일까? 그대로 다리에서 힘이 스르르 풀려버렸다.

“아리엘?”

울면서 웃고 주저앉아버리는 내가 이상했는지, 라트니히가 부루퉁하던 표정을 풀고 걱정스러운 기색을 띠며 나를 붙들었다.

“너 괜찮은 거야?”

“……응.”

이렇게 온전히 그의 시선을 받아본 게 얼마 만의 일일까? 다시금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나는 맞잡은 그의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저…… 악몽을 꿨을 뿐이야.”

그래, 나는 그저 나쁜 꿈을 꾼 것뿐이다. 전부 다 거짓이었다. 하르힌 벌판에서 깨어나기 전의 일들은 내 머릿속이 만들어낸 헛된 망상일 것이다. 라트니히는 지금 이렇게 멀쩡히 나와 같은 하늘 아래서 숨 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라? 잠깐…….’

라트니히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던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대로 딱 굳어버렸다. 지금 이곳이 현실이고 내가 겪은 일이 꿈이라면, 어디까지가 꿈이고 또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 전에 여기가 진짜 현실이라면…….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한 충격이 내 마음을 울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라트니히를 바라보았다.

“라트니히…….”

“음?”

“지금이 성력 몇 년이지?”

라트니히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352년인데…….”

성력 352년.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나 여긴 5년 전, 과거다. 그동안은 단순히 환영이라 생각했던 세계가 현실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은, 폰투스 백작의 반역이나 밀러너스 영애의 존재는 뭐였나 싶었다.

‘나는 분명히 성력 357년에 죽었을 텐데…….’

게다가 지금이 성력 352년이라면, 357년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그때 나는 분명 죽음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그래, 그 대화재 속에서 살아남을 리 없었다. 분명 죽었을 터다.

하지만 지금,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숨 쉬고 말하며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은 분명 성력 357년인데, 눈을 뜨니 그 5년 전인 성력 352년인 것이다.

“나 열일곱 살이야?”

내 질문에 라트니히의 표정이 꼭,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때의 린의 그것처럼 기이하게 변하였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내 이름은 아리엘 폰 하트하르스고?”

“…….”

이제 라트니히는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짚었다.

“가서 노엘을 불러오지.”

“……어어?”

“그러는 김에 의사도 불러오라 해야겠군.”

그제서야 그가 생각하는 바를 깨달은 나는 새하얗게 질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라트니히의 팔을 붙들었다.

“아냐! 나 괜찮아!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의사를 불렀다간 어머니에게 흉터를 들키고 말 것이다. 이 세계가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자 그녀에게 이 상처를 들키면 더더욱 안 된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강하게 지배하였다.

언젠가 들키긴 할 테지만, 그게 막 집으로 돌아온 이 순간이고 싶지 않단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

하지만 이런 진심 가득한, 더 정확히는 어머니가 혼절하여 집안이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한 내 말에 라트니히는 코웃음을 치곤 심각한 얼굴로 다시 내 체온을 재기 시작했다.

그의 이마와 내 이마가 맞닿자 나는 아픈 것과는 다른 의미로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천하의 아리엘이 악몽을 꿨다고 하질 않나, 이상한 헛소리를 하지 않나……. 그런 건 네가 아리엘의 탈을 쓴 다른 사람이거나 몸이 엄청 아프지 않는 이상 일어날 리 없는 일이야.”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하여 소파에 앉혀주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방 밖으로 나가려고 해 나를 화들짝 놀라게 했다.

나는 어미에게 매달리는 새끼 짐승처럼 그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라트니히를 붙들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아프지 않아!”

“너 지금 내게 네가 아리엘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거니?”

“그, 그것도 아냐!”

“그럼 왜 우는 건데?”

이제는 그쳤지만, 잔뜩 울어서 붓고 젖은 눈가를 라트니히는 제 손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눈가에 닿는 온기와 부드러운 손짓에 심장이 다 덜컹거렸지만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을 낱낱이 파헤칠 듯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는 그의 매서운 눈길에 내 심장이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서, 라트니히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정말이지, 라트니히에게서 받는 오랜만의 배려였다.

“정말로, 그저 악몽을 꿔서 그래.”

“……그래?”

“응.”

내게 닿은 그의 손끝의 온기가 잃어버리기 무서울 정도로 따스했다.

“정말이야…….”

부드러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라트니히는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나를 노려봤지만, 더 이상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내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별일이네.”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겨 나를 자신의 품으로 이끈 라트니히는 이내 조용히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대단하신 하트하르스 가의 후계자도 악몽을 꾸는군.”

“…….”

일평생 남을 달래본 적이 없었을 그 손짓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데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도 그다지 곱지 않아 위로처럼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건 분명히 위로였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모른 척 그의 위로를 즐기기로 했다.

성력 357년, 폰투스 백작의 반역에 의해 분명 나, 아리엘 폰 하트하르스는 황궁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사실이었다. 또렷하게 떠오르는 과거와 라트니히에 대한 감정,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던 그 기분까지 전부 생생하게 아직도 느낄 수 있어 더더욱 그것이 꿈이나 환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로부터 5년 전인 지금, 성력 352년이 꿈인 것이냐 한다면 그것 역시 아니다. 기억과 맞아떨어지는 일들과 떠오르는 앞으로의 일들에, 그리고 사람들의 태도에서 나는 이 역시 현실임을 자각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은 단 한 가지다.

아리엘 폰 하트하르스는 357년 죽어서 352년에 다시 눈을 떴다. 즉, 나는 지금 정말 5년 전으로 돌아와 과거를,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씁쓸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끝끝내 내가 사랑하는 라트니히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결말을 떠올리자 슬프면서도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10년도 더 묵은 이 오래된 마음은 그렇게 쉽게 지우거나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나는 라트니히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나 혼자만이 그를 사랑하고 싶어서 그에게 직접 마음을 전하는 대신 그가 사랑하는 그 여자를 몹시도 미워하고 괴롭히고 증오하였다. 하지만 그건 전부 헛된 짓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라트니히의 시야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내 이런 발버둥이 부질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라트니히는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으니 이제 지금이라도 그에게 마음을 전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하든 라트니히의 마음은 그 여자에게 갈 것이다. 지금은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곧 만나게 될 그 여자, 세르히 황태자의 연인에게 말이다. 그렇다면 괜히 고백 같은 걸 해서 우리의 사이를 이상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검은 거한을 쓰러트린 영웅 주제에 꽤 비겁하고 겁쟁이 같은 생각이지만 애초에 나는 그렇게 용감한 사람도, 상냥하고 좋은 사람도 아니다. 내 본성을 알아챈 린이나 다른 기사단원들이 떨어져나갈 정도였으니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런 못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것도 하지 말자.’

나는 라트니히를 좋아한다. 아마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일종의 예감이자 예언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그의 마음을 그 여자로부터 돌릴 수도 없을 것이다. 고백을 해서 라트니히의 마음을 내게로 향하게끔 애쓸 만큼 나는 용감하지도 못했고 여자로서 뛰어나지도 않았다.

라트니히를 좋아해봤자 보답받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예전처럼 그를 좋아했다간 분명 질투에 활활 타올라 그 여자를 매도하고 괴롭히는 데 전처럼, 아니 이번엔 전보다 더 심혈을 기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저 좋아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그가 행복하도록 돕는다면 그걸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