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파혼, 하고 싶어요.”

이름뿐인 몰락 귀족 로사 엔테인. 그녀에게는 델바인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약혼자, 수도 치안대장 헨리 에카르트가 있지만 어린 시절 약혼한 이후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시간이 흘러 파혼을 생각하는 그녀 앞에 나타난 헨리는 완벽한 약혼자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언제나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치안대의 마법사 아실 로건과 약혼자 헨리, 두 사람 사이에서 로사는 고민에 빠지는데…….

“그리고 가장 하고 싶었던 것도 떠올랐고.”

“그게 뭔데요?”

로사가 물었다. 그러자 헨리가 웃었다.

“연애.”

2. 작가 소개

김유린

물병자리, A형

나만 고양이 없어!

트위터 : @yurin0925

▣ 출간작

용의 꽃

다이아몬드의 신부

3. 차례

#프롤로그

#1

#2

#3

#4

#5

#6

4. 미리 보기

“헨리 에카르트 님. 급한 용건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물이 담긴 잔에도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 로사는 꼿꼿이 앉아 헨리를 마주 보았다. 시원시원한 눈매며, 백작부인을 꼭 닮은 단정하게 넘긴 모래빛 금발, 오뚝한 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을, 훤칠한 미남이다. 게다가 에카르트의 차기 백작이다. 거기에 수도 치안대 대장이다.

로사는 이런 인물에 빗댈 것은 궁에 있는 태자 저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자 저하는 얼굴 한번 볼 수 없는 멀리 있는 존재이고, 헨리 에카르트는 바로 제 앞에 마주 앉아 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로사는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회의적인 마음가짐으로 지금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용건이 급해도, 식사를 물리면서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식사를 한 뒤에, 차근차근히 이야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자, 드세요.”

조용한 강권에 로사는 내심 한숨을 푹 내쉬고 모자에 달린 베일을 넘겼다. 그러자 드러나는 민낯이나 다름없는 얼굴. 그나마 입술이라도 칠해서 다행이다. 그것만으로도 화장을 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헨리는 그녀의 또렷한 눈매 안에 감춰져 있던 초콜릿빛 눈동자를 발견하고 그만 미소를 지어버렸다. 많이 보던 눈동자다. 치안대 신입기사 브래들리 엔테인의 눈동자였다. 그녀와 그녀의 오라비는 많은 것이 닮아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도 그렇거니와 눈동자도 판박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많이 달랐다. 로사는 오래전 보았던, 기억에 남아 있는 남작부인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에 반해 브래들리는, 남작부인보다는 남작을 더 많이 닮은 모양이었다.

“브래들리 엔테인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가 불현듯 입 밖에 낸 말에 물을 마시던 그녀가 멈추었다.

“오빠를 아세요?”

그녀의 동그래진 눈에 헨리는 속으로 아까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네. 치안대에 있는 모든 기사들의 얼굴은 알고 있습니다. 특히, 엔테인 경은 부지런하고 유능한 인재지요.”

헨리의 말에 로사의 눈동자에는 온기가 서렸다. 진짜 유능한 사람한테서 칭찬받았네, 오빠. 직접 들었다면 더 기뻐했을 텐데.

“오빠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기뻐할 거예요. 먼저 집에 돌아와야겠지만요.”

로사의 새침한 대답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안대에서 적응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제도입니다. 반년 후에는 집에서 출퇴근도 가능하니 이해해주십시오.”

아차. 말해놓고 보니 너무 딱딱한 말투로 대답하고 말았다. 헨리는 슬쩍 로사의 눈치를 보며 와인을 마셨다. 로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식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접시를 늘어놓으며 웨이터가 말했다.

“전채는 꿀과 씨겨자로 맛을 낸 닭가슴살에 사과와 오렌지, 아몬드로 풍미를 더한 샐러드입니다.”

아삭아삭한 야채와 달콤한 소스가 발라진 닭고기가 한데 어울려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한입 먹어보자 감탄성이 나올 만큼 맛이 있었다.

이런 음식을 자주 접했을 헨리 역시 오랜 치안대 생활로 제대로 된 식사는 너무 오랜만인지라 군말 없이 샐러드를 먹었다. 그 동안 빈 잔에 새로 와인이 채워졌고, 와인을 즐기지 않는 듯 거의 줄어들지 않는 로사의 잔은 레몬이 든 탄산수로 교체되었다.

맛있는 식사는 어색한 사이도 한결 누그러지게 만든다. 오필리아의 노림수가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다. 헨리는 마음속으로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이런 상황까지 다 예측하신 것일까?

전채를 말끔히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수프가 나왔다. 부드럽고 고소한 병아리콩에 매콤한 향신료를 더한 맑은 채소 수프였다. 토마토의 붉은색이 한층 식욕을 돋웠다.

“맛있어……!”

로사의 뺨에 홍조가 돌았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으스러지는 병아리콩이 별미였다.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군요.”

헨리는 로사가 열심히 식사를 하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 헤실헤실 풀어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네. 다음 요리가 기대되네요.”

다음 요리는 메인인 송아지 스테이크였다. 부드러운 육질에 허브 소금을 조금 올려 먹는 방식인데, 곁들인 야채 소테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메인에 어울리는 와인 역시 새로 나왔다. 헨리가 한 모금 마셔보니 오렌지 향과 이름 모를 꽃향기, 오크 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알코올이 들어간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로사의 잔에는 이번에도 신선하고 달달한 오렌지 주스가 채워졌다.

입에서 살살 녹는 스테이크에, 고소하고 부드럽고 아삭거리는 야채 소테. 향긋한 소금과 풍부한 맛의 와인. 별다른 말이 없어도 두 사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오필리아의 예상대로 꽤 괜찮은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메인 접시가 나가고 난 뒤, 디저트로 입가심을 위한 레몬 셔벗과 작은 치즈 케이크가 나왔다. 그리고 연이어서 진한 홍차가 곁들여졌다.

“정말 맛있었어요.”

디저트와 차까지 먹은 다음에, 로사가 헨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헨리 역시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저야말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최근에 무척 바빴던 터라.”

식사까지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던가. 로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헨리가 덧붙였다.

“물론 치안대 숙소의 식사도 꽤 괜찮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없어서요. 최근에 일이 좀 생겨서. ……그러니까 말인데,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헨리가 자세를 바로 하고 진중한 얼굴로 로사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로사는 시선을 어디론가 돌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것대로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결국 로사는 헨리의 푸른 눈을 응시한 채, 차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최근에 사건이 좀 생겼는데, 그 일로 도움을 주실 수 있을까요?”

영 엉뚱한 이야기에 로사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파혼 이야기도 아니고, 도움? 무슨 도움?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거절이 아닌, 정말로 의구심에 나온 말에 헨리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믿음직스러운 미소다. 로사는 속으로 이 남자는 잘생긴 얼굴 때문에 득 보는 일이 많겠구나 싶었다.

“네. 오히려, 엔테인 양의 도움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사건에 관한 것이거든요. 물론 대외비로 혼자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요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로사는 꿀꺽, 침을 삼켰다. 기대하던 것과 영 다른 상황이다. 하지만 로사는 식어가는 찻잔의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어쨌거나 단둘이 독대하는 상황이니 결심한 것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좋아요. 대신 저도 에카르트 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로사는 두 손을 테이블 밑으로 넣었다. 긴장으로 두 손이 축축해졌다. 여자 쪽에서 먼저 이런 이야기를, 그것도 당사자가 말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대상이 바로 ‘그’ 에카르트다.

“파혼을…….”

말을 하다 말고, 로사는 고개를 숙였다.

“파혼을 했으면 해요.”

그 말에 헨리의 눈이 커졌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그건 갑자기 왜……?”

차마 더 말할 수가 없다. 오필리아가 걱정했듯이, 헨리가 일에 매달린 사이에, 약혼녀는 파혼을 결심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우리가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약혼을 하게 된 건지 저는 모르겠지만,”

로사는 손가락을 움직여 테이블보를 꾹 쥐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여러 이유에서라도 우린 파혼을 하는 게 옳아요. 서로 사랑하지도 않고, 격이 맞는 혼인도 아니고, 정략적으로도 의미가 없죠. 이대로라면 저는 나이만 먹은 채로 노처녀가 되고 말 거고요.

솔직히 저는 이 약혼이 여태껏 이어져온 것 자체도 백작부인께서 저를 예뻐해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헨리 에카르트 님. 당신 역시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약혼을 유지하고, 또 결혼까지 할 생각이신가요?”

로사의 직설적인 말에 헨리는 무척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일반적으로는 위태위태한 약혼을 이렇게 오래 유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헨리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성인이 되는 나이가 되면 당연히 결혼하고 같이 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헨리는 약혼녀라는 방패를 내세워 온갖 혼담으로부터 도망쳐온 것은 아닐까. 물론 그것은 무척이나 편리해서 그가 안락함에 빠져 있는 사이에, 그녀는 지쳐가고 있었다. 헨리는 어렵지 않게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머리는 좋았으니까.

몰락해가는 엔테인 가의 장녀.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하고, 어려운 집안 때문에 사교계에 데뷔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이 얼마나 헐뜯었을지를, 왜 이제야 깨달았단 말인가. 머리가 좋기는, 아둔해빠졌다. 헨리는 가슴이 턱 막혀서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우리는 약혼을 유지할 필요도, 그 이유도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제 생각으로는 제 돌아가신 어머니와 백작부인의 친교로 인해 약혼이 성사됐지만,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어요. 그러니 파혼하고 자유롭게 되도록 해요.”

과연 파혼한다고 자유로워질까. 로사는 속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웃었다. 하지만 적어도 헨리 에카르트의 약혼녀라는 타이틀은 떼어낼 수 있다. 그러면 어딘가에 일자리라도 얻을 수 있을 테고, 하다못해 가정교사 자리라도 알아볼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먼지가 쌓여 초라해진 장식 인형처럼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파혼을 내뱉고, 스스로 나는 가치 없으니 버려달라는 말을 하다니.

“……무슨 생각이신지는 잘 알았습니다.”

한참 만에, 헨리에게서 침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얼굴은 조금 어두웠다. 아무래도 일방적으로 파혼을 청한 것이 그의 자존심에 먹칠을 한 걸까. 로사는 시선을 내리깐 채 가만히 그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파혼을 이야기하는 것은, 서로의 가문에게도, 그리고 당사자인 저와 당신에게도 옳지 않으리라는 것도 아실 겁니다. 적어도 엔테인 양의 아버지인 남작께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그럴 이유도 없고요. 저 역시, 파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엔테인 양의 마음도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죠. 엔테인 양이 제 일을 돕는 동안에, 우리가 정말로 약혼을 유지할 가치가 없는지, 그런 관계인지 되돌아보자는 말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약혼을 한 사이지만, 이야기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죠. 그러니 적어도 서로를 알고, 사귀어본 다음에 파혼을 말해도 늦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헨리의 말에 로사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상외였다. 당연히 파혼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는 만류하고 있다. 어째서? 게다가 오히려 서로를 알아보자며 유예까지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