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세상을 다 가진 남자, 서강재.

고고한 자존심의 소유자, 유은서.

이성적이고 냉철한 그들의 불꽃같은 만남.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승부욕이

사랑을 뒤덮는다.

“나 누구한테 매달리는 성격 아니잖아요.”

“……그럼 어떤 성격인지 들어나 볼까?”

“음,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성격?”

“원래도 인자한 여왕님은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완전 폭군이네.”

“당신도 알죠? 난 한번 경험한 건 절대로 안 잊는 거.”

“아, 그러셨던가?”

이쯤 되면,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어때요? 당신 애인 얼마나 똑똑한지 궁금하지 않아요?”

2. 작가 소개

최수현

필명은 연하늘빛.

다시 생각나고, 또 읽고 싶어지는

그런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 출간작

기다려줄래

그 여름, 나는

당신의 자리

▣ 출간 예정작

기억하나요

취향의 문제

그곳에, 네가

3. 차례

#15

#16

#17

#18

#19

#20

#21

#22

#23

4. 미리 보기

피곤이 녹아들 듯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것이 영 어색했다. 일주일간 눈덩이처럼 쌓였던 강재에 대한 고민이 녹아버린 이유도 있었겠지만, 어제부터 현실에서 멀어진 자신의 삶이 꼭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낯설었다.

‘이제 어쩌지.’

하나가 풀리면 또 하나가 시작이다. 그녀의 인생은 늘 그래왔다. 이제 또 어떤 얼굴로 그를 대할까.

충동적으로 그를 잡았다지만 그녀의 성격상 결코 후회할 일은 아니었다. 강재와 밤을 보낸다고 해서 어떤 큰 의미를 두는 것보다는 그저 지금 이 순간 그가 너무나 좋으니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언제 또 어디서, 자신을 이렇게 간절히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잘 자. 너 푹 자야 해.」

새벽녘, 익숙지 않은 몸의 통증에 비몽사몽간 눈을 떴었다. 자신을 쓰다듬고 토닥이는 그의 손짓이 얼마나 다정한지 잠결에 현실이 희뿌연 마지막 순간에도 울컥함이 일었다. 그 정도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 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마음을 두드리는 그 물음이 몸의 통증 따위는 가뿐하게 지워냈다.

“일어났으면 이것 좀 마셔봐.”

“아, 강재 씨.”

괜한 부스럭거림에 그의 잠을 깨울까 봐 눈만 깜박이고 있었더니 그가 침대 위에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언제 씻고 나온 건지 머리가 젖은 강재가 침대 맡에 걸터앉아 예쁜 찻잔을 내밀었다.

“……국화차네요?”

“응. 피로 회복이랑 불면증에 좋대.”

남자와, 그것도 첫 밤을 보낸 남자와 한 침실에 있는 것은 그녀가 아무리 당당하다고 해도 태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뚝. 뚝.

강재의 젖은 머리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하나씩 떨어져 흐트러진 침대보를 적셨다. 마주한 시선에 목이 울리고 야릇한 분위기가 감돌자 간신히 잡은 아침의 균형이 깨어졌다.

“너만 괜찮으면…….”

“아, 이거 찻잔이요.”

이번엔 그녀가 빨라 얼른 들고 있던 찻잔으로 화제를 옮겼다. 그의 눈빛 하나에도 어젯밤의 격렬한 몸짓이 필름처럼 넘어갔다. 아침부터 다시 겪으라면 그것도 사람이 못 할 짓이다.

“이거 어제 봤던 거네요. 강재 씨 어머님께서 쓰시던 거예요?”

“응. 오래된 거야.”

표정만 보자면 강재는 못마땅함 그 자체다. 그래도 어젯밤이나 그녀의 체력을 생각해 알아도 모른 척 적당히 속아주었다.

“엄마는 차를 좋아하셨거든. 그래서인지 나도 커피보다는 차가 좋아.”

“아.”

가만히 머금은 국화차의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개운함을 불러왔다. 몸이 따끈해지자 벌써부터 그 효능이 나오는 게 아닌가. 은서가 터무니없는 착각에 웃음 지었다.

“그거 알아? 국화차는 해독 작용에도 좋대. 너한테 좋을 것 같아서.”

“해독이요? 하하, 설마 저한테 독기 좀 빼내라는 거예요?”

“꼭 그 독이 아니니까. 마음의 무거운 짐 같은 것도 내려놓으면 좋지.”

“그렇게 쉽게 될 수만 있다면…… 저도 참 좋겠어요.”

그의 손길에 따라 몸을 일으킨 은서가 씁쓸한 현실을 인정했다. 바싹 당겨 앉은 강재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둘러 몸을 편히 받치자 그 포근함에 다시 눈이 감기고 만다.

“너 앞으로 리서치 팀에서 컴퓨터 끼고 살아야 하는데 국화차는 시력 보호에도 좋고. 이만하면 나 정말 좋은 남편감 아닌가?”

눈썹을 찡긋한 그가 답지 않게 공치사를 했다. 같이 농담으로 받아치면 좋으련만 중간에 들어 있는 어색한 단어 하나에 머뭇대다 타이밍을 놓쳤다. 다른 이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랬지만 마음에 둔 당사자 입에서 그 말을 들으니 훨씬 파급력이 컸다. 확실히 그는 나이가 있고 자신도 따지자면 어리지는 않으니 누군가를 가벼이 만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게요.”

벌써부터 마음은 왜 이렇게 울렁이는지.

그녀의 인생에 무엇이 되었건 현실적인 문제로 지레 포기한 적은 없었는데, 이제는 은근한 농담 하나에도 쉽게 웃을 수가 없어졌다. 끝까지 몰려 잃을 것도, 거칠 것도 없이 몸으로만 부딪쳐 오던 삶에서 놓치기 싫어 발목을 잡는 것이 생겨버렸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도 갈 길이 많은데 이렇게 몸을 사려도 될는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나중에 강재 씨 부인은 좋을 것 같아요.”

“여자들은 자기 얘기 자기가 하면 어디 가서 욕먹지 않아?”

“네?”

“쓸데없는 생각 못 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말이야.”

무섭지도 않은 협박에 어깨를 움츠리자 강재가 그녀의 하얀 어깨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쓸어 올라가듯 목선을 타고 오르자 묘하게 몸이 꼬이는 듯한 느낌에 발끝을 오므렸다. 작은 몸짓에 시트 아래 봉긋한 맨가슴이 드러나니 그녀가 흠칫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러다가 우리 진짜 못 나가겠다.”

귓가로 올라온 그가 아쉬움이 한가득인 한숨을 뱉어냈다. 평소 칼로 긋듯 단호하기 짝이 없던 태도와는 천지차이라 그녀의 억눌러둔 웃음이 터져버렸다. 가뿐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이렇게 이 남자에게 익숙해져만 가다 나중에는 어찌 혼자 설 수 있을까. 큰 미래를 그리고 시작하지 않았다지만 갈수록 한 치 앞이 애틋해졌다.

“조금 더 쉴 거야? 아니면 일어날까?”

먼저 발을 내딛고 뒤를 돌아보던 그가 뜻밖의 체온에 깜짝 놀랐다. 아직 침대에 기대어 있던 은서가 그의 허리를 감고 얼굴을 묻자 강재는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간신히 흥분을 잠재운 채 멈춰 서 있다 조용히 몸을 돌렸다.

“이러면 진짜 안 가겠다는 소린데…… 나 이런 쪽으로 정신력 약한 남자라고 말 안 했던가?”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다 아침빛이 오롯한 눈가에 닿았다. 단단히 두른 손의 힘이 조금 풀린다 싶자 어쩔 수 없는 아쉬움에 그의 손이 이음새가 되었다.

“그럼…… 가지 말까요?”

“……지금 내 심장 튼튼한지 시험하는 거야?”

확실히 은서의 목소리가 분위기에 휩쓸려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느껴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보려다가 그 감정을 짐작할 수가 없어 일단 품에 꼭 안았다.

“……당신 많이 보고 싶었어요.”

“꿈 맞네.”

딴소리를 하고 있는 그를 보자 은서는 또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말 한 번 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끊임없이 자신만을 보아준 남자에게 마음 한 번 전하지를 못했는지. 뺨에 닿는 그의 얼굴이 일주일 전보다 훨씬 까칠한 것도 이제야 두 눈에 확실히 들어온다.

그때그때 솔직한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은 지금에야.

“지금 혹시 또 매달리는 거야? 나 안 그래도 지금 위험한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그의 손에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뺨이 닿도록 그를 꼭 끌어안자 그대로 강재가 뒤로 넘어갔다.

“나 누구한테 매달리는 성격 아니잖아요.”

“……그럼 어떤 성격인지 들어나 볼까?”

“음, 하고 싶으면 그냥 하는 성격?”

누워 있는 그를 향해 은서가 입술을 맞대자 강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살폈다. 이 불안하면서도 예상치 못한 행운을 그저 즐겨도 되는 건지 재보는 듯했다.

“그래, 사장님, 어제 하루 정도 반란 일으켜보니까 느끼는 거 없어요?”

“뭘?”

“그래도 내 치하에 있을 때가 좋았다는 거.”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든 그녀가 그의 위로 걸터앉았다. 남자라면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미소, 이거야말로 독이 든 잔이라도 입을 벌릴 만큼 치명적이다.

“원래도 인자한 여왕님은 아니었는데 지금 보니 완전 폭군이네.”

간신히 참았더니 이 여자가 또 무슨 꿍꿍이일까, 그러기에는 강재에게 꿈같은 현실이라 목젖이 울릴 정도로 동요가 컸다.

“말버릇 보니 아직 정신 못 차렸나 봐요.”

“안 차리려고. 꿈이면 아깝잖아.”

다시 길고 긴 키스가 이어졌다. 어젯밤은 미약하나마 조절이 가능했지만 먼저 이리 나오면 이번에는 정말 미칠 일만 남았다. 환한 햇살 아래 더욱더 유혹적인 그녀의 실루엣을 아래부터 훑어가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니, 또 왜 이러실까.”

“유은서. 아무래도 아직은 내가 하는 게.”

성마른 조급함에 강재가 등을 세우려 하자 그녀의 손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지 말라는, 손끝으로 말하는 부드러운 거절.

“당신도 알죠? 난 한번 경험한 건 절대로 안 잊는 거.”

“아, 그러셨던가?”

그의 여왕님도 마냥 당당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온몸에 그가 남긴 보기 좋은 흔적과 스스로도 감출 수 없는 홍조가 뚜렷했다.

그럼에도 절대로 약자는 될 수 없는 호승심 가득한 태도에는 그 못지않은 열기가 있었다.

이쯤 되면,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어때요? 당신 애인 얼마나 똑똑한지 궁금하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