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래. 뭐든 얘기해봐.”
“성이 씨와 거미 씨는 제 사람들이니, 그 사람들에 한해선 사돈어르신께서도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가원아.”
“누구든 이제부터 저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면 그땐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백중만의 심중을 교묘하게 건드렸다. 그건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으니 함부로 일을 처리하지 말라는 경고와 같았기 때문이다. 가원이 아직 지난번 일로 마음이 풀어지지 않은 줄은 알지만 백중만이 듣기엔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그놈들한테 잘해주는 이유가 뭐냐? 특히나 유성 그놈은 널 돈 받고 산 놈이야. 설마 그런 놈에게 진심이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진심……. 적어도 절 배신할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압니다.”
가원이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백중만의 인상이 굳어졌다. 고지식한 사람일수록 다루기는 영 어려운 법이다. 본인이 느끼고 판단하는 것 외엔 통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가원인 여자가 아닌가. 매사 꽁한 면이 많은 게 여자라 생각하는 백중만은 가원을 삐쳐서 토라져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았다.
“얼마든지 이용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그놈들을 믿어선 안 돼.”
가원의 눈빛이 슬프게 이지러졌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응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지금 이 상황에 정말로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사돈어른이나 동휘 오빠가 아닌, 그 사람들이라는 게 절 얼마나 슬프고 애석하게 만드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다시 사돈어르신을 찾아와 사과 말씀을 올렸는지 정말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그래도 내 죽은 오빠의 장인이니까, 조카들의 외할아버지니까 참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리고 싶어서라는 거…… 정말 모르시겠어요?”
가원의 열변에 백중만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니까 도움을 청하러 온 게 아니라 아량을 베풀러 왔다는 건가?
“가, 가원아.”
“저 한 사람만을 위해서라면 사돈어르신을 또다시 찾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나 혼자만의 안위가 걱정이었다면 모든 거 다 버리고 벌써 이 땅을 떠나버렸을 겁니다. 근데…… 그럴 수 없는 걸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잖아요. 한 시간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가족이 죽었는데, 어떻게 나만 살자고 도망칠 수 있나요?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제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신다면, 부디 절 도와주세요. 제발 동휘 오빠와 제 핑계만 대지 마시고요. 그걸로 모든 잘못을 덮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사돈어르신. 결국엔 곪고 썩을 테니까요.”
백중만은 가원의 혐오스러운 시선을 받자 불쾌한 낯빛을 띄우며 서둘러 대화의 마무리를 지었다.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 보거라.”
“약속해주세요. 그 사람들, 건드리지 않겠다고.”
“알았다. 그러겠다고 약속하마.”
확실히 약속을 받은 후에야 가원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개운치는 않지만 그래도 이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찾아온 약간의 보람은 있었다. 한편으론 이런 것까지 억지로 약속을 받아내야 하는 게 마음 아프고 속상했다. 당연히 서로 힘을 합쳐 사건의 전말을 밝혀야 하건만, 적 아닌 적이 되어버리다니.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유성의 미래가 불안해진다.

저자: 이조영

글을 사랑하고,
글에 미치고,
글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글쟁이.
늘 영화처럼 선명하고 함축적인 메시지가 있는 소설을 쓰고자 노력한다.

[노다지 하숙집에는 앙큼 고양이가 산다][시누대 숲에 가면 바람이 보인다][학교를 접수하라!] 외 출간.
[올드맨(가제)] 퇴고 중.

홈피: 글쟁이 마을(http://piuri.net)
이-메일: yeunnor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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