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처럼 진실을 감추고 있던 나의 아내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거짓투성이였으므로. 그녀와의 결혼식을 이틀 앞두었던 날, 진실은 너무도 허무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연히 발견한 보이스 레코더. 그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 여인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아버지와 결탁하여 내게 접근한 뒤 사랑에 빠진 표정과 눈물까지 모두 거짓으로 위장하고 날 사로잡았던 나의 가짜 연인. 행복에 겹던 결혼이 복수의 무대로 탈바꿈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버려 주리라.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네 눈물이 날 만족시켰을 때, 그때 버려 주겠어….

▶잠깐 맛보기

“많이 피곤하셨죠?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자정이 넘어 귀가하는 남편에게 바가지 한번 긁지 않는 그의 너그럽고 심성 고운 아내는 언제나처럼 한술 더 떠 수고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어 귀가해도, 비위가 상할 만큼 독한 여자들의 향수를 뒤집어쓰고 와도 한결 같은 반응이었다.

지혁이 거칠게 넥타이를 풀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식사하셔야죠, 다녀오세요, 다녀오셨어요, 고생하셨어요. 훗! 이제 그 레퍼토리 좀 바꿀 때도 되지 않았어? 차라리 녹음기를 틀어 놓는 게 낫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겨워 죽으라는 거야, 뭐야!”

지혁이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며 빈정거렸다. 지혁의 조롱 섞인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서현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전혀 휘말리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봇물 터지 듯 서현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회의적이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선 필사적이었다.

“내가 저렇게 앵무새처럼 단순한 말만 반복하게 된 데는 지혁 씨 영향도 무시할 수 없어요. 화술도 좋아지려면 대화를 자주 나눠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우린 부부인데 대화는 고사하고 얼굴 보기도 힘든 상황이니까…….”

“그래? 난 그동안 우리가 대화를 꽤 많이 나누었고, 지금도 충분히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군. 얌전하신 부인께서 의외인걸?”

“내 말은 그러니까…….”

위험스럽게 빛나는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서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목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지혁의 포위망에서 한시라도 바삐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녀보다는 그가 빨랐다. 채 걸음을 떼 내기도 전에 그녀는 손쉽게 그에게 잡히고 말았다.

사냥물을 포획하듯 서현을 사정없이 낚아 챈 지혁은 그녀의 어깨 위에 얌전히 걸쳐져 있는 얇은 스웨터를 우악스럽게 벗기고는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가정에 불성실한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허튼 구석이 없던 그의 아내는 옷차림도 예외 없이 그대로였다. 그가 적지 않은 생활비를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레스 룸의 한쪽 벽면을 그녀의 옷으로 가득 채워 주어도 그녀의 패션 센스는 예전과 비해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다.

핏기 가신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스웨터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는 서현의 호소력 담긴 눈과 마주치는 순간 지혁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서현을 번쩍 안아 든 지혁이 거침없이 침실로 향했다. 서현이 가볍게 발버둥을 쳐 보지만 허망한 몸짓에 불과했다.

지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원한 것도 결국 이거잖아. 이 정도의 대화라면 만족해?”

▶목차

1~20

* 이 전자책은 2006년 타출판사에서 출간된 〈그 후〉를 eBook으로 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