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녀가 그 말을 남기고 떠난 지 한 달 만에 깨달았다.

아내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아버지 빚이 진짜 십억이나 돼?”

계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지 않아?”

“뭐가?”

“넌 전처랑 같이 살고 싶니?”

자신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돈이었고,

지금 이 상황은 그녀를 붙잡을 완벽한 기회였다.

“일 년에 일억씩 까줄게.”

이기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내를 되찾고 싶었으니까.

*<잠재적 혼인 관계>는 <빨간 구두를 신다>와 연작입니다.

<본문 중에서>

“십억.”

깔끔하게 빗어 올린 머리. 물샐틈없어 보이는 차림. 전남편은 여전히 거만한 표정으로 그루의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 거만한 태도가 싫었다. 어느 순간 그에게 압도당해 그녀 자신을 잃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십억이라고? 말도 안 돼!”

“정말이야, 십억.”

현욱이 서류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장난처럼 ‘0’이 9개나 나열되어 있었다. 증거를 보니 그루는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 이 서류는 아버지가 10억을 빌렸다는 증거였다. 10억. 도대체 10억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넌 아버지 뭘 믿고 십억을 넘겨준 거야? 너희 회사 이젠 사채놀이도 하니?”

“사채? 한그루, 말이 심한데 그거 제대로 읽은 거야? 거기 안 쓰여 있나? 무이자, 무기한.”

10억을 조건 없이 내줬다고 말해도 무방한 말이었다. 기가 찬 그루가 비아냥거렸다.

“너…… 머리에 총 맞았니?”

“글쎄?”

애매한 말로 여유롭게 받아친 그가 난데없이 쿡쿡 웃었다. 손해 볼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속 시커먼 남자 정현욱이 10억이라는 큰돈을 그냥 줄 리가 없었다. 그루는 눈에 불을 켜고 이 대출의 이면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잠깐, 이게 뭐야!”

기겁한 그루가 서류를 든 채로 현욱을 노려보았다. 믿을 수 없었다. 현욱이 이런 조건을 제시한 것도, 아버지가 이 조건에 수긍한 것도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가 정말 여기 도장 찍으셨어? 어?”

“그럼.”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얄미울 만큼 여유로워서 때려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의 여유가 한때는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도.

그녀가 입술을 깨문 채 끙 앓다가 양손을 펼쳐 얼굴을 푹 묻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이 서류에 도장을 찍은 걸까. 담보로 딸을 제시하다니, 고지식한 아버지답지 않았다.

“이게 말이 돼? 사람을 담보로 삼아? 네가 사채업자야? 응? 요즘은 삼류 사채업자도 이런 짓은 안 해!”

“그래서?”

씩씩거리는 그루의 기세에도 여전히 태연한 모습으로 현욱이 서늘하게 받아쳤다.

“왜? 경찰에 신고라도 하게?”

쉽게 말문을 막아 버리는 남자라 해도 그를 매정하게 신고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인간관계를 맺고 끊는 것이 칼 같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아도 그루 역시 아버지의 딸이었다. 그뿐인가? 신고해서 이 계약이 무효가 된다면 돈도 회수당할 것이 뻔했다. 순진하지만 고지식한 아버지가 자존심까지 굽혀 가면서 인연이 끊어진 예전 사위에게 돈을 빌렸는데 그녀가 엎어 버릴 수는 없었다.

분통이 터지는데 아무 말도 못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녀의 속을 빤히 들여다본 듯 그가 키득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정현욱은 한그루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그럼 집에서 보자.”

이혼한 지 6개월, 그루는 어이없게도 다시 그 신혼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출간작 <타인의 아내> <주인이 필요해>

출간 예정작 <빨간 구두를 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