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이 혼약을 지속시킬 의지가 나에겐 없다. 때가 되면 분명 이 일을 바로잡을 것이다!”

의종의 비가 된 병조판서 윤돈경의 여식 단영. 합환주를 나누었지만 마음을 나누지 못한 두 사람. 냉정한 의종의 말도 단영을 흔들어놓지 못했다. 단지 그녀는 엷은 미소를 지을 뿐.

“저 또한 전하께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신첩이 궁을 나서는 그날까지 이 교태전을 찾지 않으시겠다고 약조하여 주십시오.”

이후 잠행에 나선 의종의 눈에 들어온 작은 체구, 예리한 눈빛의 한 남자. 어쩐지 낯익은 이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2. 작가 소개

불유체

필명 불유체 / 박정희

현재 피우리넷에서 활동 중.

▣ 출간작

한여름 밤의 꿈 1, 2

플러스

업타운 걸

그녀를 겨냥하라(ebook)

그대로부터 일주일(ebook)

이다지도 사소한 사랑(ebook) 外

3. 차례

#제1장. 소박(疏薄)

#제2장. 단영(端煐)

#제3장. 환(瑍)

#제4장. 이기(離欺)

4. 미리 보기

의종이 마지못해 교태전에 들어선 것은 단영이 서온돌에 좌정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의 나이 스물둘, 휘(諱)는 환(瑍)이며 자(字)는 명진(明進)으로 단영은 의종의 계비(繼妃)가 된다.

의종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원앙금침에 닿자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양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 옆에 고개를 수그린 채 서 있던 최 상궁이 민망한 낯으로 그를 불렀다.

“전하.”

앉으시라는 재촉이었다. 의종은 또다시 이마를 찌푸리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단영의 앞에 앉았다. 이제 합환주를 나눌 차례이다. 최 상궁이 다가와 술을 따르려 했으나 의당 잔을 들어야 하는 왕후께서 가만히 있자 난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최 상궁.”

움직임 없이 앉아 있던 단영이 상궁을 불렀다.

“예, 마마.”

“나가 있게.”

“……마마, 하오나.”

“나가 있으라 하였네.”

최 상궁은 당혹스러웠으나 의종 또한 가타부타 말이 없는 것이 그 또한 그러기를 바라는 듯 보여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그러나 장지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마음까지 선뜻 가게 되지 않는 것은 혹여 웃전들의 초야를 그르칠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제 곧 자경전(慈慶殿, 대비 처소)에서도 사람을 보내 올 것인데 그 또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문이 닫히고 마침내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의종도, 단영도 가만히 저 보고 싶은 곳을 바라볼 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온 밤을 이렇게 앉아 지새울 수는 없는 일, 마침내 의종이 먼저 얼굴을 들었다. 미간이 수려하고 봉안엔 위엄이 가득한 것이 한 나라의 군주로서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대가 정녕 병조판서 윤돈경의 여식인가.”

아연실색. 의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방문 밖에서 침묵하던 내관과 상궁 무리도, 곁방에 들어 있던 노상궁들도 모두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단영은 이미 짐작이라도 했던 듯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의종은 그런 그녀를 뚫을 듯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지문을 열기에 나가는가 싶었는데 곁방 상궁들을 포함, 밖에 옹송그리고 서 있는 무리들에게 물러가라는 명을 내렸을 뿐, 주위가 조용해지자 다시 와 앉는다. 이번엔 그 수려한 용안에서 냉한 기운도 함께 뿜어 나왔다.

“다시 한 번 묻겠다. 그대가 진정 병조판서 윤돈경의 여식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한숨을 내쉬듯 대답한 단영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꼭 짜인 얼굴, 눈과 코, 입술의 모양이 선명하고, 이에 둥글기보다는 단단해 보이는 턱 선이 맞물려 비록 고운 형색은 아니나 범상치 않은 기운이 엿보이는 용모였다.

“전하께서는 혹여 초영을 염두에 두고 기다리신 것이 아니옵니까?”

생경한 얼굴빛으로 보아 의종은 초영이란 계집이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초영은 제 아비의 서녀로서 굳이 서열을 짓자면 신첩에겐 아우가 됩니다.”

의종의 눈썹이 꿈틀하였으나 일단은 조용히 단영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간택령이 내려지기 전에 전하께서 직접 사가의 아비를 은밀히 불러 단자를 올리도록 종용하셨다 들었습니다. 지금껏 그러한 선례를 들어본 적이 없어 여기엔 필경 연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은 하였으나 부족한 아녀자 소견으로 그 뜻까지 미처 헤아릴 수는 없었는데, 이제 전하를 뵙게 되니 문득 짚이는 바가 있어 한 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단영은 조현례 때 대비의 안색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던 것을 상기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며느리의 용모로 미루어 그토록 그녀여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주상의 심기가 무엇인지 의아해졌으려니 싶어 짓게 된 쓴웃음인데, 의종이 보기엔 어쩐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건이라니, 무엇을 말함인가.”

사실 의종으로서도 짚이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확실치 않으니 단영의 말을 먼저 듣고서 확인을 하고 싶었다.

“지난해 상강(霜降, 입동이 오기 전 늦가을) 무렵일 겁니다. 하루는 바람을 쐴까 하여 초영이 거처로 쓰고 있는 별당 후원으로 나갔다가 담을 넘어 들어오는 낯선 사내를 보았습니다. 요행히 신첩은 몸을 숨길 수 있었으나 바깥기척에 놀라 나오던 초영은 그자와 그만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내는 어떤 위협 행위도 없이 스스로 돌아갔고 그날 사건도 행여 구설에 휩싸일 것을 두려워한 초영의 함구로 유야무야되었습니다만, 끝이라 여겼던 그날 밤이 실은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바, 신첩이 본 그자는 키가 매우 컸으며 황의에 복면은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의종은 어이가 없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껏 이토록 당돌하게 제 의견을 표하는 계집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또한 이처럼 똑똑하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쳐다보는 계집도 처음이었다. 누구나 그의 앞에만 서면 지진이라도 만난 듯 몸을 떨었고, 말 한마디 건넬라치면 벌써부터 긴장하여 그의 어조가 아무리 다정하다 하여도 웃는 낯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을 보라. 비록 부족한 아녀자의 소견이라 말문을 열었지만 마무리는 이리 명확하지 않은가. 

의종이 보위에 오른 지 열두 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정비 한 명, 후궁 한 명을 들이고 궁인 중에도 승은을 내린 바 있긴 해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것 봐라, 싶은 것이 괘씸한 반면 왠지 호기심도 생긴다.

“그대는 지금 그 사내와 나를 연관 짓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예, 전하.”

“그러니까 그대는…… 내가 월담 같은 한심한 짓거리나 하고 다녔노라고 말하고 싶은 거로군.”

“…….”

실소가 나온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지난날 자신이 어딘지도 모르고 담을 넘었다가 마주쳤던 여인은 병판의 서녀 초영이라는 계집인 모양이었다. 행동거지며 자태로 보아 의당 반가의 처자일 거라 짐작하고 그 집을 빠져나온 후 병판의 집이라는 것까지 확인하긴 하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날의 사건은 잊히지 않고 의종의 뇌리에 오래도록 자리했던 것이다.

「객이 도리어 집주인에게 뉘냐고 물으십니까?」

처음부터 초영이란 계집과 맞닥뜨렸던 것은 아니다.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라 등잔불을 껐던지 내부는 어두웠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게 깨어 있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라 그냥 돌아서려다가 ‘객’이라는 표현에 문득 대거리가 하고 싶어졌었다.

「그대가 이리 아무에게나 객이라 칭하는 것을 보니 근자에 이 담을 넘은 이가 이 몸이 처음은 아닌 모양이오. 아니 그렇소?」

「이미 스스로가 불청객임을 자인하고 계신 분에게 굳이 한 번 더 확인을 시켜드릴 필요가 없다 생각되어 그리한 것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또한 필경 이곳을 나가신 후 이 댁이 누구의 소유인지 확인을 하실 터, 그리하면 지금껏 저 담을 넘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는지 자연 아실 수 있을 것이며, 더불어 금일의 운이 나쁘지 않았음도 깨닫게 되실 겁니다.」

그녀의 대답인즉슨, 아무나 호락호락 침범할 수 없는 곳에 들어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만도 천운인데 거기에 그의 체면을 생각해 점잖게 예우까지 해주는 것이니 그쯤에서 고맙게 여기고 돌아가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여인의 배려는 오히려 어두운 장지문 안의 그녀를 확인해봐야겠다는 의종의 흥미만 유발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사람이든 사물이든 거리낄 것 없는 특권에 길들여진 성향도 그의 흥미를 더욱 부추겨놓았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오가고 마지못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던 여인. 예상대로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니, 그저 아름다운 정도가 아니라 지금껏 의종이 보아온 여느 여인들보다 더욱 고운 자태를 지닌 여인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초영을 바라보는 의종의 낯빛은 편하질 못했다.

“그대는…….”

말문을 열고도 뒤를 못 잇는 의종. 그토록 당돌히 대거리를 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행동거지도 의당 그에 부응해야 한다 믿었던 때문일까, 장난기 어렸던 목소리와 달리 얼굴을 굳히며 수줍어하는 초영을 물끄러미 훑어보던 그는 곧 몸을 돌려 그곳을 빠져나왔다.

「객이 도리어 집주인에게 뉘냐고 물으십니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인의 말과 모습이 생각처럼 쉬이 지워지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자태도 자태려니와 그만 한 입심을 지닌 계집이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달빛 아래 교교히 도드라지던 여인의 음색, 시간이 더할수록 마치 꿈을 꾼 듯 확실치 않아 아주 곁에 두고 보리라 마음먹은 것이 그로부터 달포 후. 그것이 몇 해 전 정비였던 원덕왕후(元德王后)와의 사별 이후 계비를 들일 마음이 없다던 그간의 고집을 꺾게 된 이유였다.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이제 갓 혼례를 마치고 초야를 기다리는 신부에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종이 보기엔 단영 또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고, 실제로 그녀도 이 혼인에 대해 별다른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어찌 하실 의향이십니까?”

글쎄, 모르겠다. 의종은 고개를 먼저 저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은 민 모라는 처자 외엔 누구도 며느리로 들이지 않겠다는 대비의 고집을 꺾은 그였다. 병판의 여식이 아니면 이후로도 비를 들이지 않겠노라 고집을 부려 행한 혼례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신부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당장이라도 이 혼약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런 천만부당한 일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일개 서녀에 불과한 계집 하나를 얻기 위해 말이다.

“나는.”

의종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대로 이 혼약을 지속시킬 의지가 나에겐 없다. 지금 당장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고 때가 되면 분명 이 일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새 신부는 슬퍼하지도, 분해하지도, 하다못해 놀라지도 않는다. 그것이 의종의 마음을 더 거북하게 만들었다.

“그대는 그리 알고 향후 내 명이 전달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

“그것이 언제입니까.”

허. 의종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여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의 말끝을 잡는다. 오히려 재촉을 당하는 것 같아 도리어 마음이 상할 지경이었다.

“기대하고 있었나?”

대답이 없다.

“기대하고 있던 바냐고 물었다.”

슬며시 단영의 입가에 미소가 잡힌다. 그 또한 비웃는 것처럼 보여 의종은 불쾌해졌다.

“시집 온 첫날밤, 지아비로부터 반드시 소박을 놓으리란 다짐을 들었습니다. 어찌 전하께서는 제가 그런 참담한 일을 기대했으리라 여기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아니 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냐?”

“아니 된다고 하면 그리 해주실 것입니까. 신첩이 그리 말하면 전하의 말씀은 없던 일이 되는 것입니까?”

의종의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해줄 의사가 없다는 건 스스로뿐만 아니라 여인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느냐 묻다니, 이제 보니 실없는 소리를 한 것은 의종 본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구치는 불쾌함은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는 왕이다. 누구도 그보다 강할 수 없고, 누구도 그보다 의연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오히려 왕을 초조하게 만들고, 왕을 자신 없게 만들고 있었다.

“저 또한 전하께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의종이 불편한 심기를 다스리기 위해 도끼가 그려진 병풍을 노려보고 있는데 단영의 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수록 태산이란 생각에 저도 모르게 미간부터 찌푸렸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영은 작정한 바를 주저함 없이 털어놓는다.

“이후로 신첩이 궁을 나서는 그날까지 이 교태전을 찾지 않으시겠다고 약조하여주십시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교태전을 찾지 말라? 감히 이 나에게? 의종의 눈빛에 분노가 서렸다.

“……지금 나에게 명을 내리겠다는 것인가.”

“어찌 그런 천만부당한 말씀을 하십니까. 신첩이 무엇이관데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는 이 궁을 나갈 때까지 전하께서 지켜주시길 간청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의종은 들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이런 해괴한 일은 당해본 적이 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참견을 하다니. 계집 주제에 말이다.

“그대는 필경 정신을 놓은 것이로군.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리 무엄할 수 있단 말인가.”

단영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의종을 차분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비록 어투는 조용하였으나 형형히 빛나는 의종의 눈빛은 지금 그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보여주는 참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이 정도의 불똥쯤은 예상한 바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왕이란 신분의 사내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나 꼭 확답을 받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던 속내였으니, 어떤 부당한 처벌을 받는다 해도 감수를 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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