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연애 만세! 이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며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잡지 기자로 활동 중인 신여성, 한승주. 하지만 우연히 요리집 ‘명월관’ 앞에서 찍힌 사진 때문에 기생으로 오인 받은 그녀는 강제 혼인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결국 승주가 택한 길은 운소보통학교의 교원으로 지원하는 것!

운소보통학교의 교장 최경후. 부친의 친일행각을 뒤로한 채 교육을 위해 힘을 쓰는 그의 앞에 나타난 승주는 그에게 신선한 감정을 일깨워주는데…….

조선에는 마땅한 허스 감이 없다고 투덜대는 숙녀들이여.

얼치기 모던 보이나 핸드 보이, 룸펜에 지친 숙녀들이여.

마음에 든 사내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는 숙녀들이여.

외사랑에 가슴 시린 숙녀들이여.

이제부터 실속 없는 연애는 집어치워라. 

필자가 이야기하는 연애, 그 열 가지 법칙에 따라 연애의 고수가 되어보자.

그리하면 올여름, 그대들의 애정도 탱글탱글 여문 포도 알처럼 꽉 차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조선의 아름다운 숙녀들이여!

다시 한 번 연애 만세!

2. 작가 소개

우영주

bax3888@naver.com

‘라벤더’, ‘선샤인’ 집필 중. 그 외 미완성인 글들을 마무리하는 게 목표.

▣ 출간작

모던연애만세

섬싱블루

아이니

이심전심

플래시

햇살처럼 당신이

3. 차례

#12.

#13.

#14.

#15.

#16.

#17.

#18.

#19.

#20.

#에필로그.

4. 미리 보기

가만히 책상에 앉아 생각에 골몰해 있던 승주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어느새 붉은 해거름이 교무실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경후가 행랑아범과 함께 집으로 간 후로 벌써 세 시간이나 훌쩍 지나 있었다. 

참으로 바보 같았다. 누구보다 승주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한다는 말도 못했다. 아니, 좋아한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뒤늦게 후회하는 꼴이라니……. 승주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경후에 대한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자유연애를 하겠다며 집을 뛰쳐나온 주제에 사랑이 뭔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한데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갑갑한 마음에 승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였다. 제 마음 하나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두 사람이 행복한 미래를 꾸려갈 수 있도록 진심으로 축하해주든가, 그게 아니면 이 마을을 떠나든가.

다른 여자와 혼인 말이 오가는 사람에게 이제 와 자신의 마음을 알리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자존심은 둘째치고라도, 그건 여태 자신을 이곳에 묵게 해준 손 진사와 영임에 대한 예가 아니었다.

승주는 책상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천천히 글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 길지 않은 몇 개의 문장을 적고 나서야 나직이 숨을 몰아쉬었다. 종이를 단정하게 접어 경후의 책상에 놓고 승주는 교무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보낸 몇 달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곳을 떠나자마자 그리워질 것 같았다.

승주는 가방을 챙겨 들고 의자를 단정히 밀어놓았다. 한데 놀랍게도 문이 열리며 경후가 들어왔다.

승주가 여태 이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을 못했던 터라 경후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승주의 모습에 경후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오후에도 느낀 거지만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할 말이 있는데 시간 괜찮습니까?”

영임과 혼례를 올리기로 했다는 말이라도 하려는 건가? 승주는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난 꼭 할 말이 있으니까 이야기 좀 합시다. 잠시만 기다려요.”

승주가 머뭇거리는 새에 경후는 창가 쪽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아둔 책을 정리해 가방을 챙겼다. 한데 책상에 편지 하나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봉투에는 승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경후가 그 편지를 집어 들었다.

“이게 뭡니까?”

승주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은지 경후가 더는 묻지 않고 편지를 펼쳤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등지고서 편지를 읽는 경후의 얼굴에서는 선뜻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교무실 안은 고요해졌고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똑딱거렸다. 이윽고 고개를 든 경후의 시선이 승주에게로 향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일말의 동요도 없는, 지독하게 차분한 음성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외려 승주는 조금 서글퍼졌다. 학교를 그만두겠다는데도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쩌면 먼저 그만두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 하는 비참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한 것 같아 승주는 치받쳐 오르는 울음을 애써 눌러야만 했다.

“적혀 있는 그대로예요. 학교, 그만두겠습니다.”

승주의 그 말에 단정한 경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말도 안 되는 폭탄선언을 한 것치고는 너무나 간단한 대답이었다.

“이유가 뭡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에요. 제가 그것까지 교장 선생님한테 말해야 하나요?”

이번에는 경후가 말문이 막혔다.

“한 선생.”

“적은 대로 다른 선생님을 구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킬 거예요. 그러니 가능한 한 빨리 후임 선생님을 구해주세요.”

적어놓은 편지글을 마치 외우기라도 한 것처럼 승주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교무실에 잠시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의 눈길이 맞부딪쳤다. 승주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던 경후가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전 다른 선생 구할 생각 없습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그대로 찢어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행동에 승주는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입니까?”

“…….”

“처음에도 불쑥 나타났으니 갈 때도 불쑥 나가면 되는 겁니까? 한 선생, 다른 사람 생각은 조금도 안 합니까?”

비난이 섞인 차가운 말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승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네. 저, 부모님한테 등 떠밀려 억지로 혼인하는 게 싫어 무작정 이곳으로 도망치듯 온 거예요. 교장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원래 선생 할 생각도 없었고 단순히 있을 곳이 필요했을 뿐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가겠다고요. 더는 있기 싫어졌으니까.”

승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후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럼 처음부터 아예 오지 말지 그랬습니까! 자기 맘대로 와서 온통 뒤흔들어놓더니 왜 이제 와서…….”

순간, 꾹꾹 누르고 있던 울음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승주는 저도 모르게 바락 소리를 질렀다.

“왜냐고요?”

물기가 그렁그렁한 승주의 눈가가 이내 붉게 물들었다. 경후는 그런 승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생이기 전에 나도 여자거든요.”

다섯 발자국도 되지 않을 가까운 거리였다. 어스름한 저녁볕을 등진 경후의 얼굴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내가 가르치는 제자랑 혼인 말이 오가는 사람한테…… 그동안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해놓고…… 이제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해요.”

“…….”

“당신을 동료로…… 교장으로만 대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안 되는데……. 이젠 내 마음이 그렇게 안 될 것 같은데…… 뭘 어쩌라고요.”

순간적으로 터져버린 말이었다. 그래놓고서 승주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꽁꽁 가려버렸다. 부끄럽고 비참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습게도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승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주 작은 흐느낌 외에 교무실에는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벼운 한숨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마룻바닥을 삐걱삐걱 울려댔다. 그 소리는 승주의 앞에 와서야 멈추었다.

“얼굴 좀 봅시다.”

평소처럼 무뚝뚝한 음성이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쳐버렸으면 딱 좋겠는데 이 상황에서 얼굴을 보자는 건 뭐람. 승주는 더더욱 얼굴을 꽁꽁 싸맸다.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 승주를 보다 경후는 나직이 숨을 뱉었다. 처음 만난 그때, 학교 처마 밑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쭈그리고 있던 승주의 모습과 지금 이 순간이 겹쳐졌다. 경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나 화 많이 났습니다, 한 선생.”

“…….”

“얼굴 좀 보자고요.”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승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빨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경후는 허리를 굽히고 앉아 승주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팽팽하게 얽혀들었다.

“그런데 대체 도망은 왜 가는 겁니까?”

승주는 아무 대꾸도 없이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여기서 이대로 나가면 두 번 다시 그를 못 볼 수도 있지만 최소한 지금처럼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경후는 승주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진사 어르신께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정중하게 말씀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승주는 숨을 들이켰다. 승주의 몸이 바짝 경직되는 걸 느끼고 경후는 잡은 손을 풀어주었다.

“그래도 도망칠 겁니까?”

경후가 손목을 풀어주자마자 승주는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한 발짝 만에 경후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하던 말 마저 하고 가야지, 어디 갑니까?”

승주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녀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 제멋대로 뒤엉키는 바람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선생도 알다시피 나, 성격 못된 데다 집요합니다. 상대가 약한 모습 보인다고 물러설 놈 아니에요.”

하지만 그의 말투는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았다. 외려 나직하고 다정했다.

“올 때는 마음대로 불쑥 왔을지 몰라도 적어도 갈 때는 그렇게 마음대로 안 될 겁니다.”

“혼인하게 될 거라고…….”

“누가요? 사람이 귀가 그리 얇아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럽니까?”

승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잔뜩 경직되어 그를 보고만 있었다. 경후는 가볍게 혀를 차며 물기가 남아 있는 승주의 눈가를 손으로 닦아주었다. 심하게 뜀박질을 한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코앞에 서 있는 경후에게도 그 주책없는 소리가 들릴까 싶어, 승주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경후가 그만큼 앞으로 다가섰다. 승주가 뒤로 물러설 때마다 경후는 앞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었을 때 오히려 경후와의 거리는 처음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데도 없으니 이제 아까 하던 말 마저 합시다.”

“뭐…… 뭘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승주가 다시 물었다.

“올 때는 한 선생 마음대로 불쑥 올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잠시 말을 끊고 경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갈 때는 그렇게 제멋대로, 내 허락 없이 못 갑니다. 좋아한다면서 도망가는 건 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 연애법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난 안 됩니다. 성질이 못돼서 그렇게 도망치도록 못 내버려둡니다.”

사위는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그의 얼굴도 저녁 어스름에 잠기어 조금 전처럼 분명하고 명확하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소리 하나하나는 분명하게 들렸다.

“듣자 하니 경성의 모던 보이들은 낯간지러운 소리도 잘들 한다던데. 한 선생, 알다시피 내가 성품이 다정하고 살가운 사람은 못 됩니다. 뭐, 보기에 따라 성질이 더럽다 해도 할 말은 없고요. 물론 흠을 찾고 들자면 수도 없이 많을 테고.”

가슴이 너무 빨리 뛰어 입을 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승주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어머니가 그토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한 양갓집 규수가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되어버렸다.

“연애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경후의 목소리는 아주 조금 떨리긴 했지만 너무 떨려 말 한마디 못하고 있는 승주에 비하면 그래도 퍽 차분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남자라도 괜찮다면, 한 선생이 하고 싶다던 그 자유연애…… 그거 나랑 합시다.”

가슴 뜀이 더욱 심해졌다. 승주는 숨을 멈추었다. 꼭 모아 쥔 두 손에 어느새 땀이 축축하게 배어나 있었다. 고요한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경후가 떨리는지 심호흡을 했다.

“지금 당장 대답을 달라는 건…….”

“아뇨. 지금…… 지금 당장 이야기할게요.”

숨은 쉬는지 마는지, 석상처럼 굳어 눈만 크게 뜨고 있던 승주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할래요.”

“…….”

“여자답게 조신하거나 고분고분하지 못하고, 성격도 급하고 제멋대로에 남 참견하기도 좋아하지만, 그런 여자라도 괜찮다면…….”

새빨개진 얼굴로 승주는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저, 교장 선생님과 연애하고 싶어요.”

선뜻 대답이 떨어지지 않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승주가 고개를 드는데 순간 경후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달짝지근한 과일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눈을 감은 경후의 얼굴이 시야 가득히 들어오고 그의 입술은 따스하게 느껴진다. 심장이 터져버릴 듯 쿵쾅쿵쾅 뛰는 것도 같고 온몸이 나른하게 허물어지는 듯도 하였다.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채 오로지 온몸의 감각세포만 곤두선 것 같았다. 눈도 깜빡일 수가 없었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몰라 그저 가만 숨을 멈추고 있었다. 그러다 가슴이 점점 갑갑하게 차올라 머리가 어지러워질 때쯤, 그녀의 신경을 옴짝달싹 못하게 꽉 죄고 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풀려 자유로워졌다.

다행이라 할까. 아니면 서운하다 할까. 하아, 승주는 제일 먼저 숨부터 쉬었다. 그러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 도무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얼이 빠진 승주의 모습에 경후는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렸다. 늘 또랑또랑하던 눈망울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몽롱한 듯 보였다.

사랑스러운 사람.

가슴에서 시작된 웃음이 그의 얼굴에도 번졌다. 경후는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굽혀 승주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참으로 바보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경후 역시 조금은 쑥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게…….”

조상 중에 말 못해 죽은 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 많던 승주가 당황해 말을 더듬고 있었다. 허리 뒤에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어 경후는 승주의 이마에 내려온 머리칼을 장난치듯 가볍게 쓸어 올렸다.

“많이 놀랐습니까?”

“예.”

얼이 빠진 듯 새하얗던 승주의 뺨에 그제야 연분홍 고운 물이 서서히 퍼졌다.

“지금은요?”

“좀…….”

“괜찮아졌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까?”

다정한 그의 물음에 승주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경후는 빙긋이 웃었다. 승주가 수줍게 시선을 맞추자 그는 팔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그러게 도망은 왜 치려고 했습니까? 정작 가지도 못할 거면서.”

여름밤 특유의 나른한 미풍처럼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심장이 다시금 뛰어댔지만 조금 전처럼 터져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승주는 용기를 내 무릎 위에 가만히 모으고 있던 두 손을 풀어 경후의 등을 안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파문이 천천히 일고 있었다.

“그러니까요. 나 정말 바보인가 봐요.”

승주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천천히 스몄다.

그의 등 너머, 창밖에 가득한 남빛 하늘은 여태 본 어느 풍경보다 아름답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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