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신의 오후"의 진수아, 이한의 세자매 중 둘째, 진그리의 이야기.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던 그리는 한 남자에게 홀딱 반해버린다. 바로 언니의 친구이자 동료인 하늘에게. 문제는, 하늘은 고아 출신이라 그리같은 상류층 여자를 싫어한다는 것. 더군다나 나이 차이도 컸다. 그리는 몇 년에 걸쳐 하늘을 유혹할 계획을 세우는데…….


[미리보기]


지루해.
그리는 또다시 하품을 하고야 말았다. 너무 지루했으니까. 바로, 삶이.
자신은 겨우 십사 년을 살아왔을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사는 게 심심하다고 생각하는 건 남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 일이었지만, 그리는 진심으로 지루했다.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는 삶이라 그런 걸까.
세계적인 기업, 대(大) 자운그룹의 두 번째 상속녀인 진그리는 말 그대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평생 다 쓰지 못할 재화를 가진 사람으로서, 물질 외의 다른 부분에서도 모자란 건 없었다. 일반적인 부부와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부모님, 동생을 아주 예뻐하는 언니, 사이좋은 쌍둥이 동생까지 감정적으로도 그리는 부족한 게 전혀 없는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아직 열네 살에 불과했으나, 그리는 이제 사는 게 귀찮았다. 하고 싶은 거라도 있다면 다를 것 같긴 했다. 열 살 차이가 나는 모모 언니는 회사일에 영혼을 바치고 있고 쌍둥이인 움이는 바이올린에 몸을 불사르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언제나 불꽃같은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난 왜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걸까?
그동안 그리는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자신에게도 평생 열정을 불태울만한 것이 있기를 바랐기에. 하지만 무엇이든 간에 옅은 관심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재미없어.
그리는 다시금 하품을 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흐릿하기만 했던 시야가 조금 맑아지는 동시에, 정원으로 빠져나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185cm는 되는 큰 키에 슈트빨이 잘 받는 날렵하고도 균형잡힌 몸매 그리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유자.
구하늘. 언니 진모모보다 두 살 위지만, 대학교 동창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남자.
6년 전, 모모는 겨우 열여덟 살에 예일대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자운그룹에 투신했다. 그런 모모의 옆에는 하늘도 있었는데, 하늘 또한 스무 살에 예일대를 졸업한 천재 중에 천재였다.
그리는 하늘을 다시 한 번 관찰한 뒤 한숨을 내쉬듯 짤막하게 평가를 내렸다.
“착한 인상이지만, 확실히 잘생기긴 했네.”
지난 6년 동안, 그리는 회사 창립 파티나 모모 언니 생일파티에 참석한 하늘을 몇 번 봤었다. 많은 사람들이 꼬맹이에 불과한 그리와 움 쌍둥이를 자운그룹의 상속녀로만 보고 비굴할 정도로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데 반해, 하늘은 그들을 그저 어린 여자아이로만 대했었다. 어린아이인 건 사실이었으나 사실 그리는 어린 취급을 받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늘을 싫어하는 쪽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에 대한 감정이 어떻든 간에 그의 외모가 빼어난 건 사실이었다.
그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30여 미터 아래에 서 있는 하늘을 좀 더 자세히 관찰했다. 자운그룹 창립 50주년 파티에 참석하는 하늘은 언제나처럼 날렵한 근육을 강조하는 멋진 슈트를 걸치고 있었다.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날카로웠으나, 검은색의 뿔테 안경과 여유 있는 미소가 그를 서글서글하고 인상 좋아 보이게 했다. 실제 성격과는 달리.
하늘을 잘 몰랐지만 그리는 그가 인상과는 달리 녹록치 않은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알아주는 성깔의 소유자인 모모 언니의 친구가 마냥 착할 리 없다는 추측이 가장 크긴 했지만, 이제 스물여섯 살인 하늘은 현재 입사한지 6년 만에 부장 자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기업 내부의 일은 잘 모르나 아무리 예일대 출신이라고 해도 단순히 능력만으로 승진이 빠를 수는 없었다. 그만큼 자기 관리는 물론 성격도 치밀하고 독하다는 뜻일 터.
그런데, 왜 갑자기 호기심이 일지?
평소 하늘을 싫어하긴 했으나 얼마나 싫어하든 간에 가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 자체를 주지 않는 성격인지라 그리는 하늘을 무시하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간을 할애해 하늘을 바라보고 있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답지 않은데. 왜 이러지?
그리는 평소와 다른 자신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면서 밑을 관찰했다. 현재, 그녀는 축구장처럼 드넓은 정원 중앙에 있는 가장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정원은 미로처럼 높은 덤불로 갈려있어서 길을 찾기 어려웠는데, 이 별장에서 파티가 열리면 사람들은 정원으로 빠져나와 비밀스런 만남을 가지곤 했다. 비밀리에 만나는 사람을 훔쳐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타기가 취미인지라 오늘도 그리는 꼭대기에 올라와 있는 차였다.
흠, 저 아저씨도 누굴 만나려고 나온 건가?
하늘은 정원으로 나온 뒤 미로 같은 곳을 정처 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딱히 누굴 만나러 파티에서 빠져나온 게 아니라 시원한 바람을 쐬러 나온 듯 싶었다. 그러나 그리는 곧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 씨.”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아주 곱고 예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는 목을 앞으로 쭉 뺐다. 덤불에 가려져 얼굴을 잘 볼 수 없는 위치로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를 발견한 순간, 하늘은 짧은 순간 멈칫했다. 눈이 날카로운 그리조차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여자는 그리의 반응에 흠칫 몸을 떨더니 한 손을 하늘 쪽으로 뻗었다.
여자의 손이 닿기 직전, 하늘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여자는 따라가듯 덤불을 헤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는 오늘따라 환한 보름달빛과 별빛의 도움으로 여자의 곱디 고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연희. BN그룹의 외동딸.
나이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었으나 얼마 전 이연희에 대해 지나가듯 들은 게 있었다. 국무총리의 아들과 결혼한다고.
결혼식을 앞두고 다른 남자와 대체 무슨 분위기야?
그리는 연희의 창백한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눈앞에서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으나, 하늘의 얼굴에는 여전한 여유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바라던 게 아니었어. 내가 정말 바라는 결혼은, 정말 원하는 결혼은…….”
연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가 움직인 건 연희의 소리 없는 울음이 잦아든 뒤였다.

wdlsr@naver.com
한국로맨스소설작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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