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 소개

당신이 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지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찬우의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미망인, 지연. 그녀에게는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비밀이 있었다. 서로에게 끌리는 그 둘, 하지만 현실의 장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한편 계약 때문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던 지연은 비행기 사고로 남편 석주가 실종되자 조금씩 숨겨왔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석주의 실종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전해지자 상황은 급변하는데…….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미망인이라고 먼저 말을 안 했다고 저를 탓하실 건가요? 아니면 반지도 안 끼고 다닌다고 하실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당신이 미망인이라는 것하고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찬우는 지연의 말을 도중에 가로챘다. 지연의 놀란 눈동자 속에 찬우의 굳은 얼굴이 반사되었다.

“그런데…… 그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를 어쩌죠? 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요.”

지연은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워낙 세게 잡혔는지라 찬우가 놓아주기 전에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럼 어제 그 키스는 뭐였지?”

“그, 그건 실수였어요.”

2. 작가 소개

이기옥

서울여대 수학과 졸업.

두 딸의 엄마이자 멋진 남편의 아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평생 소녀이고 싶은 여자.

▣ 출간작 :〈이방인〉, 〈하루〉, 〈키스는 영화처럼〉 외 다수

▣ 전자책:〈친구의 신부〉, 〈초콜릿빛 사랑〉, 〈유혹〉외 다수

3. 차례

프롤로그

제1장. 첫 만남

제2장. 접근

제3장. 계속된 만남

제4장. 미망인

제5장. 계속되는 만남

제6장. 흔들리는 마음

제7장. 진실 혹은 거짓

제8장. 그녀의 이름은 한지연

제9장. 악연

제10장. 가족

제11장. 관계

제12장. 마음

제13장. 생존자

제14장. 그의 진심

제15장. 마지막 생존자

제16장. 마지막

제17장. 선택

에필로그

4. 미리 보기

지연은 곤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모임이라고 말했지만 그냥 그런 모임이 아니었다. 정식 파티라고 하는 게 더 잘 어울리는 모임이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근사한 턱시도 차림이었고 여자들 또한 일류 디자이너들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려던 지연은 파티장 안의 모습을 보고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태경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도 몰랐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지연은 화장실 안에서 서성거리며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눈 딱 감고 들어가는 거야. 더한 수모도 당해봤는데 오늘보다 더 심하겠어?’

석주와 사는 동안 수없이 들었던 모욕과 호기심 어린 시선도 다 견뎌냈던 지연이었기에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차림새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레이스가 달린 탓에 조금 딱딱한 느낌이 덜한 것 같아 일단 화장부터 세심하게 고쳤다.

결혼 전에는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다녔지만 석주와 결혼 후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화장이었다. 맨얼굴의 지연이 너무 동안(童顔)이라며 강 여사가 질색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생활 동안 제일 많이 배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침묵하는 법과 화장법일 정도였다.

화사한 느낌이 들게 메이크업을 고친 후 옷에 얼룩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치마 길이를 좀 더 짧게 해보는 게 어떨까 싶어 지연은 허리 부분을 두 번 정도 접었다. 마치 일부러 그런 옷을 입은 것처럼 마른 듯한 몸매에 아주 잘 어울리는 미니스커트가 되었다.

기왕 하는 김에 팔도 두 번 정도 접어 야성적인 느낌이 들게 만들고 블라우스 단추도 두 개나 풀어놓아 고개를 깊이 숙이면 속옷이 보일 듯 말 듯 만들자, 파티장 안에 있던 다른 여성들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였다.

지연은 마지막으로 신고 있던 신발이 하이힐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화장실 밖으로 나와 파티가 열리는 홀로 들어갔다.

F자동차 회사의 오너인 킹 회장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지라 어렵지 않게 킹 회장을 찾을 수 있었다. 동양인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지연이 홀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한꺼번에 꽂혔다.

지연은 자신이 한 번도 특이하거나 아름답다고 여긴 적이 없었기에 런던에서의 생활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의 영어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안 이후로 사람들은 그녀를 이방인처럼 취급하지는 않았다. 간혹 동양인과 자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호기심에 접근하는 남자들 때문에 곤혹스러웠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지니?』

지연은 자신의 영어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사장의 딸인 신시아와 리디아였다.

화사한 외모의 리디아는 갈색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려 조금 이지적인 느낌이 들게 했고, 신시아는 불타는 듯한 붉은색 머리를 등 뒤로 길게 내린 다음, 그야말로 ‘내 몸매 봐주세요!’라는 광고판처럼 등이 깊게 파이고 가슴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아슬아슬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그것을 드레스라고 칭할 수 있다면 말이다.

『미스 킹.』

지연은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하려 했으나 리디아는 지연을 살짝 끌어안았다. 지연과 알게 되어 너무 좋다는 말을 종종 했으나 이렇게 반갑게 맞이한 적은 처음이어서 지연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리디아라고 불러. 나도 그냥 지니라고 할게.』

지연은 자신의 영어 명을 말하는 리디아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잘하면 일이 예상보다 더 빨리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디아와는 반대로 신시아는 그녀가 입은 옷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거만하게 인사를 건넸다.

『옷이 참 특이하군요.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드레스인가 봐요? 어머, 달링!』

신시아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더니 곧 그녀는 얼굴에 가식적이면서 요염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신시아가 반대편으로 달려가자 리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저런 애니까 지니는 신경 쓰지 마. 그나저나 이번 주말에 올 거지?』

리디아는 지연과 동갑이었다. 덕분에 말을 놓고 지내기가 훨씬 수월했다.

『생각해보고요.』

지연은 신시아의 말에 상처받지 않았다. 한국에서 알고 지낸 사람들에 비하면 신시아는 양반 축에 들 정도였다.

『이런, 아직도 생각 중이야? 우리 회사하고 합작한다고 들었는데, 그럼 꼭 와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걸 어떻게…….』

지연은 리디아는 교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회사 일에는 관심도 없는 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 리디아의 입에서 합작이라는 말이 나오자 지연은 당황스러웠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리디아가 알고 있는 정도라니, 그건 킹 회장도 어느 정도 그녀 회사와 같이 일을 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만약 이번 일이 성공하면 회사는 성공까지는 아니지만 그 길로 발을 내밀 수 있었다.

『나야 원래 소식통이잖아?』

리디아가 눈을 찡긋하자 지연은 웃고 말았다.

『아버지하고 인사해야지?』

리디아에게 이끌려 킹 회장과도 인사를 나눈 지연은 킹 회장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어색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 아는 이가 없었기에 지연은 이곳저곳에서 그녀에 대해 수군거려대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공기가 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연은 가까이에 있는 테라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습기를 잔뜩 먹은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듯이 스치고 지나갔다.

런던의 공기가 눅눅하다는 생각이 들자 이곳으로 어머니를 모시려는 생각을 지워야만 했다.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지만 이번 회사 일 때문에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맡기고 온 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살짝 몸이 떨리자, 그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추워서 그렇다고 생각해 몸을 돌렸다.

“어머, 어떡해요!”

지연의 입에서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남성적인 매력이 물씬 묻어나면서도 차분한 음성 또한 영어가 아닌 한국어였다.

“그래도…….”

지연은 상대방이 남자이며 영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닫자 얼굴이 굳고 말았다.

“정말 아무 문제없습니다.”

깍듯하게 답하는 매너가 지연의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제가 댁의 구두를 하이힐로 뭉개버렸는데요…….”

지연이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그 미소는 어색하기만 했다. 하긴, 그녀가 진정으로 미소를 지은 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났으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지연은 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그만, 한 남자의 발을 세게 밟았던 것이다.

의도된 건 아니지만 그녀는 너무나 당황했고 상대방이 괜찮다고 말을 해도 연신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어두운 테라스 구석에서 불빛이 보이는 데로 나오자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는 여성들이 말하는 그런 이상형의 남자였다. 지연의 눈은 그를 보자마자 커졌다가 금방 작아졌다. 그녀는 이런 부류의 남자들을 많이 만났었고, 분명히 이 남자도 똑같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자만심과 이기심, 그리고 세상이 모두 자기의 뜻대로 될 거라는 그런 오만함. 지연은 보통 그런 남자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런던에 온 지 몇 달, 그동안 한국에서 온 사업가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 남자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서 지연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홀 안에서 킹 회장의 큰딸과 유난히 붙어 있어 그의 궁금증을 자아내던 여자였다. 신시아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리디아와 친한 친구라며 이런 곳에 왜 저런 옷을 입고 왔는지 알 수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마치 앞에 있는 여자 때문에 이번 모임 자체의 품위가 떨어진다는 식이었지만, 찬우가 보기에는 신시아야말로 그 품격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그의 호기심을 자아냈던 이 여자는 혹시 한국인이 아닐까 했던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지연은 상대방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난 후 어떤 말이 나올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지연이 찬우의 다음 언행을 기다리고 있을 때 찬우는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얼굴로 지연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처럼 의도된 언행으로 말하지도 않았고 접근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그녀에게 계속 고정되어 있었고 지연은 그런 어색한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 고개를 살짝 숙인 후 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렸다.

“조금 아프네요.”

그의 음성에 지연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더니, 곧바로 그녀가 찬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성공이군.’

찬우는 지연의 관심을 얻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한국에도 이 정도 여자는 흔하다고 생각하는 그였지만, 이국땅에서 외로움 때문에 느낀 애국심이라고 하면 좀 이상할지는 몰라도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앞에 있는 여자에게 정이 간다. 이런 건 그로서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검은 머리가 찬우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같은 검은 머리라도 영국인과 한국인은 머리결과 색이 현저하게 달랐다. 게다가 그녀의 옷차림 또한 참 특이했다. 파티가 열리는 곳에 드레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화사한 원피스 정도는 기본적으로 입고 오는 것이 예의였지만, 여자는 정장을 살짝 변형한 옷차림이었다. 방금 전까지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온 흔적이 엿보였다.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웃고 있지 않았던 여자의 눈동자 또한 찬우가 평소 보던 여자들과 달라, 그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던 속담이 떠올랐지만 그녀의 뒤를 따라 테라스로 나오고야 말았다. 멀리서 본 그의 느낌이 틀리지 않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찬우는 여자가 곁에 없어 아쉬운 상태도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간절하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때도 없었다. 아마 유치원 때 아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여 선생님과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고 애를 썼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이라는 생각에 그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살짝 생겨났다.

“제가 어떻게 보상을 하면 좋을까요?”

지연은 찬우의 일그러진 구두를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보상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는 약간 차갑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해야 그녀의 관심을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그의 외모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아니, 그를 보고도 파티장에서 보였던 지루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 사실이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네?”

지연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못 들으신 것 같은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구두를 보상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녀의 표정에 당혹감이 엿보이자 그는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지연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저하고 춤을 추신다면 보상하신 것으로 하죠.”

그는 지연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지연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린 듯 멍하니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정도의 그녀는 185를 훌쩍 넘는 찬우를 보려면 고개를 쳐들어야만 했다.

“우리가 춤을 추면 너무나 우스워 보일 거예요.”

지연은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강하게 자신을 잡아당기려 하는 그가 치명적인 위험이 될 것 같아서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당신이 나에 비해 너무 커서요.”

지연은 말을 꺼냈다가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냄새가 폴폴 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좀 크기는 하죠. 그래서 불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아니, 불만은커녕 다들 까무러치게 좋아하던데요?”

찬우는 이런 상황을 자주 겪는 남자처럼 능수능란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지연은 이런 남녀 사이에 있는 지분거림에 익숙하지 않았다. 글라스를 잡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지연은 하마터면 맨손으로 그것을 깨뜨릴 뻔했다.

찬우는 그녀가 잠시 동안 흔들리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지연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아 테라스 난간에 올려놓았다. 홀 안에서 들리는 발라드풍의 음악이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긴장감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지연은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에 나온 음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그 음악이 심금을 울리던지 지연은 영화를 보고 나온 후에도 ‘Try to remember’를 들으면 눈물이 저절로 나오곤 했었다.

“안에서 춤을 추기 싫다면 여기서 추는 건 어떨까요?”

그는 집요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처럼 지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서 춤을 출 수 있다는 말에 지연은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짧게 숨을 내쉰 다음 찬우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다른 남자와 춤을 추기는 처음이었다. 어릴 때, 꿈속에서 수없이 많은 왕자님들과 춤을 추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곧 현실에 적응하고 나서 지연도 현실과 꿈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냉혹한 자리에 안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그녀의 꿈은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버렸다.

그리고 지금 지연은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이 연출되자 당혹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무도 없으니 이번 한 번만은 즐겨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교차하였다.

찬우는 능숙하게 지연을 리드하였다. 가볍게 턴을 하면서 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찬우은 그녀가 웃자 빛이 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둠의 동굴 속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햇빛을 본 사람같이 상대방은 행복해 보였다. 음악이 끝나자 지연은 찬우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손을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지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