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립 아래로 얼굴 흰 선비의 긴 눈매가 드러났다.
여인처럼 풍성한 속눈썹 아래의 검은 눈동자가 흑요석처럼 요요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본 순간 군사들은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앵두처럼 붉은 입술이라니……. 자고로 미인은 어디 가도 괄시를 안 받는 것이라는 것이 만고의 진리였다. 걸치고 있는 옥색 도포까지 저리 고울 수 없었다.
“고운 선비님…… 저녁때 요 앞에서 차라도 한잔…….”
남녀 불문곡직, 절세가인을 눈앞에 두자 넋이 살짝 나간 수직 군사가 잠시 잠깐 헛된 망상을 품고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운 선비는 도포 자락을 탁탁 털어 정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포청 문을 지나 저만치 가고 있던 세호는 “고운…….”까지 듣고 짬밥 말년 병장처럼 ‘포도청에 어인 여인네가?’ 하고 득달같이 달려 돌아왔다. 박쥐의 귀를 가졌나, 그놈의 귀! 밝기도 하지. ……헌데 웬 선비?
실망에 가득 찬 세호가 퉁명스럽지만 정중히 물었다.
“포청엔 어찌 오셨소?”
선비가 멍하니 서 있는 수직 군사들 사이를 그대로 통과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절도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게 가라앉아 있지만 힘이 실려 있는 음성.
“응?”
선비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큰 키, 쭉 뻗은 짙은 눈썹 아래 야수의 것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깊고 매서운 눈, 매끄럽게 내려오는 콧날, 반듯한 콧날 아래 곧은 인중, 선이 뚜렷한 입술, 강인한 턱 선, 게다가 최근에 다친 듯한 눈 밑의 상처까지, 야수의 강인함과 고집이 엿보였다.
만지면 손가락이 베일 듯 빳빳하게 풀발이 선 푸른색에 가까운 진보랏빛 관복을 보아 무관이다. 아니……, 싸늘하고 고요한 예기가 풍기는 것이 군관이다.
자세히 보니 푸른 반수철릭(소매를 뗐다 붙였다 하는 융복) 위의 것은 검은 답호고, 갓에는 좌포청 표식이 있다. 깃털이 꽂힌 갓이며 연옥패와 소은 혁대를 보니 꽤 직위가 있는 자.
게다가 허리에 찬…… 검이 두 자루?!
군사 무술 중 쌍검술의 달인. 김세호!
몽톡한 체격의 왜구가 거대한 왜도(1미터)를 쓰자 그 두 배 길이의 장검으로 쓸어버리던 이순신 장군의 대형 검(2미터)을 실제로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그 전설의 종사관이다.
안색이 시퍼레진 선비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공자께서 ‘군자는 검으로서 스스로를 호위한다.’라고 하여 선비들 모두가 검을 익히지만 이자는 특별하다.
임금이 직접 나서는 관무재 초시(初試) 때 거대한 장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모습을 본 정조 임금께서 쌍수도/雙手刀를 이보다 저 아름답게 쓰는 자는 이후로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며 직접 불러 치하하고 특별히 포도청으로 불러들인 종사관.
야수와 같은 예기가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떨고 있는 사이 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한이 한 발짝 나서서 더 깊이 허리를 숙이더니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궤를 머리 위로 들어 보였다.
“종사관 나리. 소인은 한성부 한성부漢城府: 조선시대 삼법사, 또는 23부의 하나. 서울의 행정ㆍ사법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관아(서울 시청). 정2품인 한성판윤(서울시장)이 우두머리.
검안소 소속의 의관 윤만수라고 합니다.”
그러며 보니 종사관의 손이 허리의 손잡이로 가 있는 것을 알아챘다. 어느새……. 선비는 속으로 탄성 같은 한숨을 쉬었다.
만약 서툰 짓을 했다면 그대로 베였으리라.
“검안소?”
세호가 검에서 손을 뗐다.
“흠……, 자네가 바로 주옥이 말하던 그 의관이로군.”
세호는 일단 경계심을 풀었지만 둘은 아직도 가슴이 떨렸다.
듣던 대로 강직한 눈빛의 무관이었다.
종사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량한 기운이라니! 정갈한 관복의 모습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이 맑아지는 듯한 무인이다. 그저 덤덤히 눈만을 응시하는 모습인데도 선비는 이유 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다.
젊은 종사관의 눈 깊은 곳에는 따뜻한 기운이 있어, 마주 선 이의 마음을 저절로 편안하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눈빛에 담긴 푸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바로 하늘이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내에게 주신 큰 선사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선비의 얼굴에 흥분과 공포가 엇갈리는 동안 세호는 배다른 동생, 김완의 얼굴이 떠올라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성 안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민생 사건 사고를 쫓아다니는 세호와 달리, 포도청에서 하는 일보다는 한 차원 높은 일을 관할하는 한성부에 있답시고 한껏 거들먹거리는 완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한성부/漢城府 한성부漢城府: 지금의 서울 시청.
서윤/庶尹 서윤庶尹: 한성부 으뜸 벼슬인 판윤과 좌우윤을 보좌하는 종4품 벼슬.
에서 우윤/右尹(3품. 국가의 전곡 출납ㆍ회계)으로 승차까지 한 터라 그 유세 떠는 꼴은 그냥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복형제인 완에게 듣기로는, 윤만수는 역관인 이의민과 함께 청나라 연행길에 따라 나섰다가 그곳에 8년 동안 머물며 의술과 검시에 대해 배우고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의민은 역관으로 청과의 교류에 그 공이 높아 정조의 신임이 두터운 자였다.
세호가 한발 물러나자 그제야 만수가 고개를 들었다.
“아, 저희 우윤 어른을 아시는 것을 보니 김 종사관님이시군요.”
“그렇네만, 내 우윤에게 자네에 대해 들었을 때는 그저 샌님 의관인 줄 알았더니, 이리 직접 보니 샌님은 아니로구만!”
세호는 만수의 덩치만 보고 잠시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워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제가 좀 덩어리가 큽니다! 아마도 의관이 되지 않았다면 이 좌포청의 포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적 소원이 포도청의 포졸이 되어 도적을 잡는 것이었거든요, 하하하!”
만수가 멋쩍은 얼굴로 실소를 터트리자 곁에 서 있던 선비도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랬던가? 헌데…….”
세호는 만수의 곁에 서 있는 선비를 바라보았다.
흑립 아래 깎아 놓은 듯 갸름한 얼굴, 단아한 이마와 쭉 곧은 콧마루와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분홍빛 뺨, 여인의 것처럼 붉은 선홍색 입술. 움켜쥐면 한 손에 쏙 들어오게 생긴 작은 체구. 언뜻 보기에도 사내라 하기에는 너무 가냘프게 보였다.
몇 해 전, 남장 여인에게 호되게 당한 세호는 잠시 눈앞의 선비도 혹시 여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의혹의 눈빛을 받은 선비가 뭐냐는 듯 눈살을 살포시 찌푸리는 것이…… 그 모습조차도 매우 곱다. 수상했다.
세호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호에게는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지기들이 있었다. 한성의 한량들이라 소문난 지기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무려 셋이나 있었다. 그들은 정도/正道만을 걷는 모범적인 세호와는 전혀 달랐다. 그야말로 사고뭉치.
보다 못한 세호가 팔팔하게 반대하고 나서면 너야 그러거나 말거나 세 사람은 여전히 몰려다니며 일을 벌이고 사고를 쳤다.
뜨르르 하는 집안들만큼이나 일도 크게 벌려서 셋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 쫓아다니던 것이 몇 해 전까지의 일이었다. 그런 세 사람의 행적을 낱낱이 춘화와 잡록으로 그려 내는 익명의 화공이 있었다.
그 잡록 때문에 지기들은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고 세호는 그 화공을 잡기 위해 수사를 했다.
그런데 막상 잡고 보니 범인이 남장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 대범한 수법이며 배짱이 마음에 들어 한때 세호는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그의 지기 중 하나인 창이와 부부의 연이 맺어져 남의 부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고운 선비를 보면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때가 떠오르자 ‘혹시 이번에도……?’라는 생각이 들며, 눈앞에 서 있는 이 가냘픈 선비가 예사롭게 보이지를 않았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선비를 마치 범죄자를 앞에 둔 양 요모조모 뜯어보는 동안 분위기가 험악해져 갔다.
원래 세호는 자신의 관직에 자부심이 강하고 철두철미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만 한할 뿐, 남의 허물에는 관대하다. 단호한 표정은 습관적으로 얼굴에 무장된 것일 뿐이다.
선비의 서늘한 눈빛에 세호는 잠시 멈칫했다.
남장을 한 여인일까?

언제나,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좋은 이야기꾼으로 남고 싶습니다.

출간작/
[돌발 상황] [적과의 동거 1000일] [피렌체에서 칠일]
[비단속옷]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불멸의 새]
[어수룩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다] [꽃잠]
[그해, 오사카에 내리던 봄비] [카라부란] [미궁]
[청담동 오두리][조선춘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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