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로마를 찾은 수혁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인 지현과 어긋나고, 로마에서 요리 공부를 하는 지현은 무뚝뚝하고 차가운 수혁에게 반감을 느끼게 된다. 여행 도중에 티격태격 다투던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에게 조금씩 끌리게 되고…….
“트레비 분수의 전설 아세요? 두 번 던지면 사랑이 이루어진대요.”

-본문 중에서-

“왜 내게 키스를 했는지 솔직히 말해 주세요.”
“미안해. 지현 씨 입술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키스가 하고 싶어졌어.”
“감정 따위는 없었다는 얘기군요.”
“감정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미리보기>

수혁은 살며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허리를 숙이고 그녀에게로 조금씩 다가갔다. 느린 화면처럼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그의 눈동자에 지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가 다가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현의 몸이 움찔했다.
곧 지현의 입술에 수혁의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지현은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달콤한 와인의 향기가 지현의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와인 향기를 가득 담은 그의 입술과 부드럽고 따스한 그의 혀가 지현의 혀를 건드렸다.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놓아주는가 싶더니 지현의 입천장과 잇몸을 가녀린 꽃을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훑었다.
영혼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그의 짜릿한 키스에 몸을 떨던 지현은 곧 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걷어내었다. 너무나 황홀해서 너무 위험한 키스였다. 금방이라도 육체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키스. 지현은 말없이 그에게서 떨어져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의 입술에서 빠져 나왔건만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 머릿속으로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내일 떠날 사람이다.’
지현은 또 다시 그의 키스에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자신을 질책했다. 키스에 몸이 안달할 정도의 그런 여자였나? 지현은 스스로에게 수치심이 일었다. 하지만 그가 또 키스를 한다면 여지없이 무너질 것이다. 도무지 그의 눈동자와 키스를 지현은 막을 힘이 없었다.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고 있었다. 여전히 토니블랙스톤의 애절한 감미로운 음색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두 수혁과 지현은 남은 와인을 모두 들이켰다. 술이 부족한 것인지, 키스가 아쉬운 것인지 수혁은 테이블 위에 있는 와인을 손수 가져다 한 잔 따라서 부었다. 와인 한 모금을 마시며 수혁은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엔 왜 키스를 했냐고 묻지 않지?”
“하고 싶어서 했겠죠.”
지현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했다. 그의 키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자신에게 원망이 가득 섞인 그런 어조였다. 그 이전까지 그에 대해 가졌던 호감들이 지현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니까. 그는 내일이면 피렌체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인을 만날 테니까. 그리고 그는 영원히 로마에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그 생각에 지현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에 대한 짧았던 추억이 점점 더 큰 여운으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워진 그와의 감정이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수혁은 와인 한 잔을 들이켜며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가지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사랑스러운 그녀, 하지만 수혁은 순간적으로 죄책감이 일었다. 혜경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리고 어차피 로마를 떠나야한다는 부담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로마에서의 어설픈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로마란, 아무리 그리워한다고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거리였다. 떠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고 지낼 것 같은, 그렇게 해야 될 것만 같은 먼 거리였다.
지현의 머릿속은 생각 이상으로 복잡해졌다. 현실과 이상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 어떠한 것도 정답이 없는 그런 현실이다. 그 정답 없는 현실 앞에, 비현실적인 남자가 앉아 있다. 그리고 상상마저 해보지 못한 황홀한 키스까지 나누고.
그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도 로마에 계속 남아 있을 사람이라면 그건 현실에 보다 가까웠다. 언제든 길거리를 나서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 베네치아 광장 주변의 트라토리아 안에서, 스페인 광장에서, 콜로세움 앞에서, 트레비 분수 앞이거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이거나……. 하지만 그는 그렇게 우연이라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일이면 떠날 사람이니까.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건 무모한 생각이다. 그에게 로마는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단순히 여행 이상, 그 무엇의 의미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피렌체로 곧 떠날 사람이니까.
미칠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이 지현의 가슴을 덮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빠져 버린 결과였다. 뻔히 나타나게 될 결과, 그 결과를 미리 알고서도 지현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의 부드러우면서 달콤한 키스의 향연에 지현은 어린 아이처럼 그에게 끌려만 갔다. 하지만 그의 입술을 결코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마력 같은 그 무엇이 있었다. 지현을 그의 세상으로 밀어 넣는 마력 같은.
지현은 희망을 잃은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확한 계획은 없어요. 하지만 당장은 가지 않을 것 같아요.”
그녀의 짧은 대답은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듯했다. 수혁은 겨울 바다 위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을 맞은 듯 가슴이 시렸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로마의 추억은 그렇게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수혁은 감정이 메말라버린 그녀의 미소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와 같이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면…….’
수혁은 탁자 아래로 얕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물었다.
“날 어떻게 생각하지?”
조심스런 그의 질문에 지현은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냥 좋은 사람 같아요.”
“……내 말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냐 말이야.”
그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뭔가를 바라듯 다그치는 것처럼 들렸다. 자신을 좋아해달라고 하는 말처럼.
왜?
지현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도 역시 준서처럼 바람둥이란 말인가. 애인이 있으면서 다른 여자를 가지고 싶어 하는. 순간적으로 불쾌감이 일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여자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거겠지.
감정 따윈 없어. 지독하게 매력적인 당신의 입술에 잠시 놀아난 것뿐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지현은 입술을 꼭 깨문 채로 참았다. 대신 다른 말을 늘어놓았다.
“키스한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세요? 키스를 내가 받아 줘서?”
“…….”
“그냥 키스가 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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