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살인미수 죄를 저지른 남자 주인공과 조폭인 아버지로 인해 큰 상처를 안고 살던 여주인공의 만남. 서로의 덧난 아픔에 여러 번 이별과 상처를 겪지만 시간이 흘러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성장해 가는 대견스러운 러브 스토리. 그들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의 인생까지도 바꿔놓는데……. 단순한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게 아닌 서로에게 진정 ‘사람’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본문 중에서-

효원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 지호를 쳐다봤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열과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는 지호를 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한 기침과 고열, 식은땀이 아니라 죄책감과 괴로움에 쥐어짜듯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지호의 마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살인자’라는 세 글자가 지호의 단단한 가슴속 여린 심장을 검붉게 파고들었을 생각을 하니, 그녀의 가슴에도 고통이 번졌다.
[넌 어린애가 왜 교도소에 들어간 거야?]
[살인미수.]
덤덤하다 못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대답하던 지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집에 가겠다는 효원의 말에,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지호의 또 다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가 범죄자인데도? 날 당신 집에 들였을 때,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는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이야? 내 작은 행동에도 당신이 불안에 떨 수 있을 거라는 생각해 봤냐고.]
효원의 입에서 신음 소리에 가까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효원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무겁고도 괴로운 마음을 안고 있는 지호에게, 넌 충분히 벌을 받고 나왔으니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살 필요가 있다고 당연한 듯 핀잔을 준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항상 별다른 말없이 무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어, 모르고 있었다. 과거에 저질렀을 일들이 매일 매시간 지호의 숨통을 조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지호의 핏줄 선 손등을 잡았다.
[이놈 심정이 네가 18살 때 느꼈던 심정이랑 똑같을 거다. 무섭고 두렵고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그 공허한 느낌.]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오르면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18살 때 어두운 집구석에 혼자 남아 바들바들 떨던 제 자신의 손을 잡아 주듯, 애틋하고도 뜨거운 심정으로 지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미리보기>

지호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도대체 무엇을 미안해하는 건지, 이 상황에서 왜 그녀가 저 자식에게 사과를 건네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효원의 뒤를 쫓아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뭐하는 거야? 당신이 뭐가 미안해?”
“손 놔. 나 지금 네 얼굴 못 보겠어.”
“당신 바보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남자가 당신을 두고 다른 여자랑 버젓이 바람을 피웠어.”
“그래서?”
효원이 그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며 앙칼진 음성으로 되물었다. 당황한 지호가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너도 똑같아. 내가 저 사람과 헤어졌다는 거, 너 알고 있었잖아. 근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모르는 척 했잖아. 심지어 나한테 결혼식 날짜도 물어봤어. 일부러 그랬니?”
“그건…….”
“내가 상처 받을까 봐 일부러 숨긴 거라면, 너의 그 선택은 제대로 틀린 거야. 네가 날 정말로 생각했다면 지금 저 사람에게 주먹을 날리는 게 아니라 그때 나한테 진실을 말했어야지!”
효원의 음성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흩어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거짓말은, 당신이 먼저 했어.”
“뭐?”
“저 자식과 헤어졌다는 얘기를 나한테 하면, 내가 미안해할까 봐 숨긴 거잖아. 거짓말을 그토록 싫어한다던 당신이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 그렇게 해야 했는지 몰라서 나도 처음에는 입을 다물고 있었어. 근데 그 후로 당신이 날 피했잖아. 내가 당신한테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어. 이미 관계는 깨졌고, 그걸 되돌릴 수 없는 이상 당신은 계속 거짓말을 입에 담아야 했고 날 보기가 거북했을 테니까.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자고 했을 때도 당신은 또 거짓말을 하면서 날 피했어.”
“자존심이 상해서 그랬어. 아빠의 존재까지 숨겨 가며 만나던 남자랑 그 꼴로 헤어지고 나니까 자존심이 상하더라. 그 모습을 너한테까지 왜 보여줘야 돼? 그때 넌 어차피 3주 후면 헤어질 그런 사람이었어. 그런 너한테 책임감 뒤집어씌우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됐니?”
“내가 정말로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면 거짓말하면서까지 날 생각해 줄…….”
“몇 번을 말해! 널 생각한 게 아니라, 내 자존심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그녀가 울부짖다시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길가에 세워 둔 차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원준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보다 지호가 그것을 알면서도 숨겼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저히 지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화가 나고 창피하고 서러웠다.
“거짓말한 건 미안해. 그래도 당신이 지금 이렇게까지…….”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효원의 투명한 눈동자에 분노와 서러움이 가득 서렸다.
“네가 내 보호자라도 되는 척, 네가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뭐라도 되는 척 하지 마. 잊었나본데, 넌 내가 3주 동안만 도와주려고 데리고 왔던 사회적 약자야. 그저 전과자라고.”
“…….”
“내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니? 넌 두 번이나 사람을 때렸어. 살인미수 전과자의 주먹은 흉기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을 때렸다고. 5년을 감옥에서 썩어 놓고, 결국 또 책임지지 못할 폭력을 저질렀어, 넌.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저 사람도 나쁘지만 너도 똑같아. 그런 네가 뭐라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됨됨이가 좋지 못한 사람에게 줘야 할 건 주먹이 아니라 무관심이야. 그러니까 난 오늘부터 널 무시할래. 고맙다. 난 항상 죄지은 전과자의 편에 서야 하는 내 인생이 기구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 기구한 인생에서 벗어났네. 네 덕분에.”
효원이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는 지호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일이 꼬여도 너무 꼬여 버렸다. 그녀를 위해 했던 거짓말과 분에 못 이겨 주먹을 날렸던 대가로 그녀에게 버림 받은 것이다. 효원이 탄 차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지호가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원준과 여자는 사라지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며 속닥거리고 있었다.
“들었어? 저 사람 살인미수 전과자래.”
“뭐야. 신고해야 되는 거 아니야?”
“야, 무슨 신고야. 보니까 아까 그 남자가 바람피워서 저 여자랑……. 아, 아무튼 거참 관계들이 복잡하시네. 에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그의 귓속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그를 둘러싸고 손가락질하는 이 길거리에 지호는 철저히 혼자였다. 가슴에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역한 느낌 때문에 헛구역질까지 할 것만 같았다. 지호가 손등으로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야 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목구멍은 따끔거리고 뜨거웠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로를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 한 대를 본 지호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머! 119에 신고 좀 해요! 방금 저 학생이 사람을 쳤어요! 어머, 어머!]
[미친 거 아니야? 쟤 왜 저래? 야, 대박이야!]
5년 전 홀로 남아 있던 도로 한복판의 모습과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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