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나 시크하고 유능한 촌철살인의 대가, 드라마국 PD 고 은석은 떠오르는 샛별에서 충무로 대세남으로 접어든 배우 정 해준의 열혈 팬이다. 촬영 장소 헌팅을 위해 대만에 간 은석은 마침 열리고 있던 해준의 팬미팅에 참석하여 팬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만끽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연출을 맡은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해준이 맡게 되면서 그녀는 현장을 이끌어야 하는 냉철하고 권위적인 감독과 틈만 나면 망상을 일삼는 해준의 열혈 팬 사이에서 치열한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한편 팬미팅 현장에서 열성적이던 그녀를 기억해낸 해준은 그런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 점점 눈이 가기 시작하는데…….

-본문 중에서-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은석은 저도 모르게 스타카토로 끊어서 얘기하며 해준의 손목을 끌고 불이 꺼져 있는 옆 회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저, 이러시면…….”
무척 곤란하다는 것을 최대한 예의 있게 표현하려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은석이 대뜸 물었다.
“저 알아요?”
“……네?”
해준의 쌍꺼풀 없이 또렷한 눈매가 크게 뜨였다. 대뜸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가, 싶은 눈빛을 마주하며 은석이 큼, 하고 헛기침을 내뱉은 뒤 재차 물었다.
“저 알겠냐구요.”
몇 주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난생처음 참여했던 대만의 팬미팅은 차마 떠올리기도 무참할 만큼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거기서 은석은 그와 악수를 했고,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오빠 운운하며 자신이 간혹 눈팅만 하던 팬카페 이름까지 들먹였더랬다. 그에 반갑게 웃어 주며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고, 같이 사진까지 찍어 준 그였다.
한편 해준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여자가 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송국 복도에서 마주쳤으니 방송 관계자일 가능성이 크다. 상대의 반응을 통 종잡을 수 없어서 까만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던 해준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담백한 색깔의 체크 셔츠 가운데 흔들리고 있는 사진과 명찰을 보자마자, 해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아, 고 감독님이셨구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정해준입니다.”
은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가는 걸 눈치 채지 못한 해준은 오히려 한 걸음 다가섰다.
“미팅 때 지방에 가셔서 못 오신다는 얘기 듣고 언제 인사드리나 싶던 차였어요.”
해준의 미소의 덫으로부터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은석은, 차라리 잘 된 거라고 되뇌면서도 입가가 굳는 것을 느꼈다.
“아, 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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