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첫만남.


코스모스가 보인다. 도시에 살 땐 별로 볼 일이 없었던 소담한 코스모스가 창밖에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벌써 미친 건지 아니면 미친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건지 그것이 자꾸만 움직였다. 마치 발이 달린 것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움직인다.
인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햇살이 눈부신 아침이다. 귀신만 아니라면 무서워할 것은 없었다. 한 발, 두 발. 창가 쪽으로 걸어갈수록 코스모스 아래로 갈색의 둥근 머리통이 보였다.

‘드르륵’

“누구세요?”

창문을 연 인하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사람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동네 꼬마들이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과 달리 그것은 완전한 어른이었고 여자 사람이었다.
인하는 조금 놀랐다. 잠깐 동안 마주친 그녀의 연갈색 눈동자가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신비스럽게 느껴져 순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하던 일을 끝내야 하는지 손에 쥔 작은 돌로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인하는 3분 정도 그녀가 하는 일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처음엔 죽어 버린 화단에 다시 씨라도 심으려는 건가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손놀림에 일관성이 없었다.
인하는 다시 창문을 닫았다. 망치를 들고 못질을 시작했다. 이곳에 온지 겨우 2박3일. 소수의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지만 그들은 자신이 알고 지낸 사람들과는 어딘가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었다.

조금은 이상한 시골 마을.

“그건 그렇고 우리 꽃년이랑은 어떤 사이임?”

잠깐 방심한 동안 갑자기 날아 온 공격에 인하는 말문이 막혔다. 오늘 처음 만난 여자와 어떤 사이인지 묻는다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하야 할까.

“저희는 오늘 처음 만난…….”
“우리 오빠.”
“응?”
“네?”
“우리 오빠야.”
“아이고, 세상에! 얘가 우짠 일로 말을 다 하네. 꽃년이는 이 총각이 마음에 드나 보지?”

뭐지? 조금만 더 있다간 꽃년이 남편이라도 될 듯한 이 분위기는. 인하의 떨떠름한 표정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칠갑은 마냥 즐거워보였다. 여자의 나이를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았던 인하는 그녀의 말투에 고개를 갸웃했다. 십대 중반인가?

“자네, 점심은 먹었는가?”
“아뇨. 아직…….”
“그럼 우리 집에 가자고. 아침 먹이려고 꽃년이 찾은 거니까.”
“저, 전 괜찮습니다. 원래 아침은 안 먹는…….”
“나한테 왜 인사 안 왔어?”
“네?”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칠갑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이사를 왔으면 이장댁에 제일 먼저 인사해야 하는 거 알아? 몰라? 서울 사람들은 이웃끼리 말도 안 섞는다고 하더니 진짠갑네. 진짠가봐. 아무리 그래도 젊은 사람이 그라믄 안 되지. 나 솔직히 자네가 여기서 지낸다고 들었을 때부터 기다렸어. 언제 이 친구가 떡을 들고 우리 집을 방문 할 것인가! 매일 매일 대문만 쳐다봤어!”
“죄송합니다. 이장님. 그 동안 정신이 없어서…….”
“죄송하면 따라와. 우리 꽃년이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얘기해주지.”

우리가 만난 건 완전한 우연은 아니었어.
누군가에겐 바램이었고 누군가에겐 상처였고 누군가에겐 마지막 희망 같은 만남.
지금 생각해보니 우린 어디선가 어깨를 스쳤을 수도 있고 같은 공간에서 차를 마신 적도 있었을지 몰라.
너를 사랑하게 되고 나서야 난 이 모든 우연들에 비로소 감사함을 느껴.
앞으로 그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순간만큼은 영원하길 바래.


<미리보기>


“으아아악!”

교실을 나가려던 인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창밖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던 여자가 복도 창문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인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여자의 얼굴과 머리에 꽂은 코스모스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저기 죄송한데 여기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그러니까 이 분교가 이젠 제 거거든요. 앞에 외부인 출입 금지라고 푯말도 달아 놨는데 못 보셨어요?”

“글자 읽을 줄 몰라.”

“아…… 글을 모르신다?”

신사는 절대 여자에게 함부로 해선 안 되며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쉽게 화를 내선 안 된다고 아버지는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 교훈을 최대한 적용하여 인하는 불쾌한 마음을 숨기고 정중한 손짓으로 문 쪽을 가리켰다.

“일단 나가실까요?”

외동이라 그런지 인하는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누는 데 서툴렀다. 혼자만의 공간을 침해당한 것 같아 기분이 불쾌했지만 일단은 참았다. 여자는 다행히 별다른 저항 없이 현관 쪽으로 향했다. 꽃무늬 치마에 하얀 스웨터. 목이 드러나는 짧은 단발. 그리고 가장 신경 쓰이는 저 코스모스 장식. 그것도 생화. 인하는 뒤에서 여자를 스캔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쁜 외모가 아까울 만큼 마음에 안 드는 시골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촌스러웠다.

여자는 현관을 나서자 쪼르르 달려가 다시 흙을 팠다. 뭔가 농락당하는 기분에 인하가 뒷머리를 헤집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

“거기 뭐 있어요?”

그녀 맞은편에 인하도 같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 그녀가 하는 짓을 관찰했다. 말간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던 여자가 말했다.

“보물이 없어.”

“…….”

“여기 어디 숨겨 놨는데 없어졌어.”

인하는 뒷목을 쓸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신빙성이 떨어진다. 잠시 고민하던 인하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추리해 나가듯 물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뭘 묻어 놨다 이거죠? 근데 그게 없어졌다?”

“응.”

타임캡슐 같은 게 아닐까 생각됐다. 오랫동안 폐교였고 그동안 캠핑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다녀갔다면 이미 없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혹시 발견하면 알려 줄 테니까 그만 나가실까요?”

이제 이곳의 주인으로 당연히 할 수 있는 요구이건만 왠지 쫓아내는 것 같아 인하는 말을 돌려서 했다. 닮은 건 아닌데 지난밤 같은 이불을 덮었던 지유와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짜야? 진짜 찾아 줄 거야?”

“찾아 준다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발견하게 되면…….”

“이거 줄게.”

그녀가 주머니에서 꺼내 내민 것은 아몬드가 잔뜩 박혀 있는 초콜릿이었다. 이런 것을 받아도 되나 싶다가 근처에 슈퍼가 없으니 조금 탐이 났다. 모르는 사람에겐 십 원 하나 빌린 적 없는 인하였기에 선뜻 손이 내밀어지진 않았으나 이게 바로 시골 인심이겠거니 하며 초콜릿을 받았다.

핀치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싶은 어른아이.


<출간작>

나의 마리오네트,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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