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알고 있는 그 남자를 사랑해버린 아름답고 용기 있는 여자 강혜.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은, 너무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강혜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사랑 속에서 그녀의 인생에 서서히 빛이 나기 시작했다.


사랑을 해본 적 없는 남자 주혁.
쓰러진 그녀를 만난 순간 생애 처음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인연으로 만들지 않고 지나갔다.
두 번째 인연도 그냥 지나쳤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자꾸 밟힌다.


“이분, 안 되겠어요.”
주혁은 강혜를 바로 부축했다. 흠칫. 생각지 못한 그의 행동에 놀라는 그녀의 몸이 주혁의 부축을 거부하는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주혁은 무시하고 강혜를 일으켰다. 여자의 몸은 찼고,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피할 수 있는 여력조차 없는 듯했다. 주혁은 강혜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의무실에 일단 가야겠어요.”
“아……아닙니다. 제가 혼자 갈 수 있어요……. 괜찮습니다…….”
개미 소리 만하게 강혜는 겨우 말을 꺼냈다. 주혁은 강혜의 얼굴을 바라봤다. 청초한 얼굴에 제발, 그만 놔달라는 애원이 보였다. 아파 보이는 얼굴이 안쓰럽도록 아름다웠다.
주혁은 이런 순간에도 반할 것 같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아, 그래 같이 사는 남자가 있다고 했지. 우진이를 술에 잔뜩 취하게 만들었었지. 그리고…… 나는 너를 안고 난 후 여자를 안는 재미가 없어졌지.
그래,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남자를 홀리는. 아니, 나를 홀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 너를 가까이하면 난 아마 무척 힘이 들 것이다. 겪어 보지 못한 감정에 신경 쓰느라 힘에 부칠 것이다.
주혁은 최대한 냉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강혜를 부축한 주혁은 천천히 회사 건물로 들어가 넓은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 뒤를 인정이 종종걸음으로 걱정스러운 듯 따라가고 있었다.
그에게 부축 받아 걸으면서도 그의 접촉을 부담스러워 바르작거리는 느낌에 주혁이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나를 만나서 그러는 것 이해해. 하지만 조금만 참아. 잠시만 도와줄게.”
“…….”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것을 본 주혁은 입가를 끌어올렸다. 많이 놀란 것 같다. 떨리는 시선에 겁이 잔뜩 들어가 있다. 처음 자신과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젖은 시선보다 더 당황스럽고 힘들어 보인다. 하긴,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게 된 상황에 그도 놀랐으니 그녀는 더 당연할 것이다.

[미리보기]

강혜가 갑자기 입을 가리고 웃음을 약간 참으며 말했다.
“저, 제가 너무 웃긴 거 같아요. 너무 태도가 달라요. 너무 티 많이 나죠?”
주혁이 복숭앗빛으로 물든 강혜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와 우진이에 대한 태도?”
“예.”
“내가 강혜 씨에게 치근댔다면 강혜 씨의 태도는 같았겠지. 나는 그러진 않았잖아.”
“처음엔 아마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이젠 사장님이 저에게 치근대기를 바라요.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을 마음. 이미 열렸어요. 저 사장님이랑 가까워지고 싶어요.
강혜는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떨리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는 다만 아무에게나 친절한 남자일 뿐인데. 어떤 혹독한 아픔을 겪으려고 방정맞게 입을 놀리려고 그래.
강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혁은 강혜의 반짝이는 눈빛과, 꼭 쥔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앞에 앉은 저 눈부시도록 예쁜 여자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눈빛.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가게를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자연스럽게 강혜가 걷기 시작했고, 주혁이 담배를 꺼내 피우며 강혜의 뒤를 따랐다.
“강혜 씨.”
주혁이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결심한 듯 강혜를 불렀다. 강혜가 뒤돌아 별처럼 예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본다.
주혁은 그 눈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입을 뗐다.
“하지만 이젠, 나도 치근대고 싶은데.”
강혜가 눈을 크게 뜨고 주혁을 바라본다. 그때 강혜가 타야 할 버스가 정차했다. 승객을 태운 버스는 곧 출발해 버렸다. 두 사람은 버스가 온지도 모르고 서로에게 집중했다. 서로를 한참 바라보며 눈만 마주쳤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던 강혜가 침을 한번 꿀꺽 삼킨 후 그에게 되물었다.
“예?”
“나, 강혜 씨에게 관심 있어.”
“저어…….”
주혁은 허둥거리는 강혜를 보고 당황했다. 아직 아니었나? 내 착각인가?
“정말요?”
강혜가 되묻자 주혁이 환하게 웃었다.
그때 갑자기 강혜가 주혁의 품에 뛰어들었다. 놀란 주혁의 손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그러나 곧 그는 두 팔로 강혜를 품에 꼭 안았다.
강혜가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좋아해요. 좋아하고 있어요. 이렇게 안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좋아해 버렸어요.”
강혜는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그에게 고백했다. 감춰 뒀던 이야기가 풀어졌을 때 강혜는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졌다. 강혜는 자신을 꼭 안는 주혁의 품 안에서 쿵덕쿵덕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그의 소리인지 자신의 소리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혁은 저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결국, 그녀가 이겼다. 그녀에게 졌다. 멋지게 그녀에게 먼저 고백하려고 했던 그의 생각은 더 멋진 고백에 지고 말았다.
역시 내 가슴을 뛰게 만드는 정말 멋진 내 여자.
그러나 프러포즈는 내가 먼저다.
“강혜야. 나랑, 연애하자.”
주혁의 다정한 목소리가 강혜의 귓가에 들어와 심장에 보석처럼 박혔다. 강혜는 꿈결처럼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못 믿겠지만 나 연애 처음이야.”
강혜의 마음에 깊은 행복이 심겼다. 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휩싸인 강혜도 주혁의 품에서 최대한 다정하게 속삭였다.
“저도…… 처음이에요.”
갑작스런 마음의 확인이었지만 두 사람이 겪은 갈등의 시간을 생각하면 두 사람 모두 긴 시간을 거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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