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도 꿈도 없이 이모부의 학대와 가난 속에서 살아가던 인연.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 헤어진 오빠가 나타나 늪의 수렁텅이 같던 삶에서 구해준다.

그런 오빠와 함께 살게 된 인연.

꿈에 그리던 이상적인 가족을 오빠와 함께 만들어간다.

그런 인연에게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내놓는 오빠.

누가봐도 서로 없이 죽고 못사는 남매였다.



그러나 그 둘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가고 있을 뿐, 실제로 피를 나눈 남매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빠는 생판 남인 인연을 왜 찾아온 것일까?



'가족이니까.'라는 이유로 설명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많다.

오빠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에 대해 점점 의구심을 품는 인연.

마침내 오빠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어릴 적 오빠의 부친이 자신에게 남긴 '유산'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본문 중에서-

여러 가지 검사 후에야 비로소 수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중한이 인연을 바라보았다. 언제 다쳤는지 이마를 꿰맨 자국에 가슴이 아팠다. 이러니 걱정을 단 한순간도 놓을 수가 없다. 중한은 자신의 동맥을 관통하여 꼽혀진 바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동맥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가는 호스를 통해 인연의 정맥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묘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에서 한순간 피가 섞여 버린 사이가 되어 버린 게.



며칠 전, 인연이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우연하게 그녀의 혈액형이 RH-A형이라는 것을 알았다. RH-혈액은 동양에서는 볼 수 없는 혈액형이기 때문에 혈액원에서도 대량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정도로 희귀한 혈액이었다. 그런 혈액을 인연이 가지고 있었다니. 처음엔 놀랄 따름이었다. RH-O형인 자신을 제외하고는 RH-혈액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한은 의식이 돌아온 듯 천천히 눈을 뜨는 인연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에게 얼마나 더 뺏겨야 하는 걸까? 처음엔 가족이었다. 그다음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유산을 뺏겼다. 그리고 마음을 뺏겼다. 지금은 피까지 그녀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이젠 피까지도 받지 못하고 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마치 처음부터 인연에게 모든 걸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마음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데도 그녀의 곁에서 빙빙 맴돌며 모든 걸 퍼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아니, 생각해보니 소설 속 키다리 아저씨도 마음은 얻었다. 해피엔딩이었지.

억울하기도 하고, 당연하기도 한 자신의 상황에 중한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 순간이 너무나 다행이었다. 만약 인연과 자신이 만나지 못했을 때,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더라면…… 그녀의 빈혈 수치는 낮은데 RH-A형 혈액조차 구해지지 않았더라면.



중한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연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의 팔과 중한의 팔이 연결되어 있는 붉은 호스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진실 된 소울메이트에게와 연결되어 있다는 붉은 실? 인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피의 느낌이 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붉은 실을 자세히 바라보니 피였다. 이동 경로로 봐서는 그의 피를 받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손은 굉장히 따듯한데도 불구하고 몸 안으로 느껴지는 피는 차가웠다.

인연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두 눈을 감고 몸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피를 느꼈다. 천천히 섞여가고 있었다. 온몸에 퍼져가고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던 우리가 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미리보기>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파서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숨통을 자의로 콱 틀어막을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찌나 많은 눈물이 흐르던지 땀에 전 것처럼 얼굴 전체가 눈물범벅이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을 거 같았다. 오빠의 앞에서 이 꼴로 앉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머리와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인연은 일어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인연아!”

뒤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연은 귀를 틀어막았다. 자신을 따라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듣게 되면 더 비참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만 같았다. 걷어차인 허벅지 근육이 찢겨 나갈 것 같았지만 참고 달렸다. 아파져 오는 폐부와 심장이 멈춰 버릴 때까지 달렸다. 이 길 끝에 절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대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만 하는 걸까? 이러다간 죽을 때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교복을 보면서도, 지나가는 여고생들을 보면서도, 학교를 보면서도, 졸업 사진을 보면서도 행복한 기억보다 아픈 기억에 눈물을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비참해! 그냥 죽어 버려!

한참을 달리던 인연의 다리 근육이 풀려 버렸다. 그대로 주저앉지도 못하고 힘없이 서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분간되지 않았다. 시야는 눈물로 가득 메워져 있었고, 정신은 반쯤 나간 듯했다. 인연의 귓가로 고막이 찢어질 듯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슬로모션화 되었다. 눈물이 떨어지는 속도, 입 밖으로 내질러지는 울음소리, 맥이 뛰는 소리 모두 느릿하게 느껴졌다.

‘도진이에게 고백을 받고 오빠에게 보호를 받고 새 교복을 입고 따듯한 밥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예쁜 옷을 입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순간인 줄 알았는데.’

멍하니 서 있는 인연을 중한이 홱 끌어당겼다. 서로 상극의 자석이 끌리는 것처럼 짧은 순간에 중한의 품으로 인연이 안겼다. 무지한 힘에 주저앉듯 쓰러졌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타이어 미끄러지는 소리가 째질 듯 허공을 갈랐다. 인연의 목덜미로 중한의 뜨겁고 거친 숨결이 내뱉어졌다. 자신의 몸을 감싼 오빠의 단단한 두 팔이 느껴졌다. 등 뒤로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도 느껴졌다.

“이 사람들이! 미쳤어?”

청신경을 타고 아주 느릿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전달됐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오열하며 울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냥…… 그냥 평범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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