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뭐가 문제야? 남주 같은 건 바꾸면 되지!”

여동생이 쓴 소설, 이렇게 진행하면 인기 없어! 잘 진행되던 이야기를 중간에 자신이 파투내는 바람에 본격 남주가 체인지되고, 그 소설은 대 to the 박!

하지만 이게 뭐야!

눈을 떠보니 내가 그 소설 안에 있고,

거울 속 이 미녀는 바로바로, 이제는 조연이 되어버린 미래 폭군의 누나 ‘알리시아’!

여조도 악조도 아닌 몇 줄 안 나오는 비중 없는 캐릭터로, 부귀영화는커녕 이리저리 치이다 폭군(예정)남동생이랑 같이 목이 잘리게 생겼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소릴 해가지고, 이제 와 혀를 자를 수도 없고…….

안 되겠다! 살아날 길은 이 소설을 벗어나는 것뿐!!

결국 몇 줄 안 나오는 남주의 친구인 상인을 꼬셔 이 나라를 뜨기로 한다.

그. 런. 데.

막상 밤을 함께 지낸 후 보게 된 남자의 외모가 심상치 않다.

“어, 어젯밤엔 분명 그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 들었던 것 같은데. 으음, 뭐라더라. 라, 란슬롯 님이랬던가.”

“아, 그거 내 친구.”

“…….”

“왜, 문제 있어?”

저기요.

문제가 있냐고? 많지, 많다마다.

……남주가 왜 내 침대에서 나와!

2. 작가 소개

아페르타

3. 차례

1부

#6

2부

#1

#2

#3

#4

4. 미리 보기

“……그런데 저스틴, 방금 제 집무실이라 하셨어요?”

“그럼요. 자그마치 크레노스 가의 마님께서 본인의 사무실이 없으시다는 건 제가 용납하지 못합니다.”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그 마님 소리 좀…… 아니, 그보다.”

저스틴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향하던 그녀가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을 무시하지 못했다.

이렇게 서슬 퍼런 저스틴을 무시하고 따라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단둘뿐인데 그중 하나는 현재 운동장에서 포박을 당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누가 어떤 식으로 포박을 하건 손가락 하나로 빠져나올 힘을 가졌다. 당당하게 본인이 뜻하는 바와 같이 묵직한 걸음걸이로 응접실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렀다.

“……대체 왜 이러세요?”

“…….”

그녀가 뒤로 돌아섰을 때, 아레스는 무심히 자신의 가죽 장갑을 벗어내는 중이었다. 약간은 흐트러진 머리칼, 잇새에 가볍게 문 검은 장갑 한 짝이 그의 황폐한 눈길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전 이제 제 집무실로 돌아갈 예정이라서요.”

“…….”

그러시든가.

입을 다물어도 느껴지는 의미가 분명했다. 여기서 더 유치해지기 싫었던 그녀는 저스틴에게 마저 안내해달라 신호를 보냈다.

앞만 보고 걸으면서도 막상 뒤에서 느껴지는 걸음걸이를 무시할 수가 없다.

뚜벅뚜벅.

이번에 돌아보면 몇 걸음 뒤가 아니라 바로 제 곁에서 그림자를 드리울 것만 같은 기분,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며 가슴이 꽉 차올랐다.

“……제 집무실에 갈 거라구요. 그러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발걸음이든 뭐든.

“…….”

이제 남은 한 짝도 마저 벗어낸 그의 입엔 아무것도 물려 있지 않았다.

대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올려다보기만 했다. 계단 아래참 난간을 가벼이 짚고 고개를 든 눈빛이 보는 이를 스산하게 했다.

“안 들리세요?”

“……그래, 가. 나도 내 집무실에 가는 중이니까.”

드디어 듣는 목소리도 반갑다기보단 체념처럼 가라앉았다. 그녀가 일부러 발걸음을 빨리하자 저스틴 역시 본분대로 그녀를 한 발짝 앞섰다.

“이리로 오시죠. 거의 다 왔습니다.”

“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위치까진 필요가 없었는데…….”

“실제로 가시면 또 다를 겁니다.”

그가 웃으며 가장 한가운데에 위치한 거대한 문 앞에 섰다.

이제껏 뒤따르는 걸음을 의식하느라 어디로 온 건지도 모르고 있던 그녀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예상했던 것처럼 아레스의 걸음 또한 제 뒤에서 멈추자 아직 풀어내지 못한 무언가가 소용돌이쳤다.

“각자 갈 길 가자면서요? 각하는 각하 집무실에 가신다면서 왜 이렇게 저를…….”

“여기 내 집무실도 되는데.”

“네?”

“그리고 각자 갈 길 가잔 적은 없어.”

쏘아보듯 제 의사를 분명히 밝힌 그가 익숙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스틴을 재촉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떠밀려 있었다.

눈앞에 블릿슈를 포함한 대륙의 지도가 걸린 벽에 그의 검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아래층의 장대한 집무실을 축소해놓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더 아늑하고 개인적이다.

“저스틴, 이게 무슨 일인지 말이나 좀 해주고…….”

“말을 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개 한 번만 돌리시면 되는 것을요.”

“고개를요? 아니…… 하하.”

스르르 고개를 돌린 그녀가 입을 가린 채 격해지는 헛웃음을 다스렸다. 남은 두 사람이 안 웃으니 자신이라도 웃어야 했다.

‘이게 뭐야!’

천장까지 닿은 책장 너머로 눈에 담기도 무서운 핑크빛이 가득했다. 여기가 원래는 그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어디서 핑크빛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들을 한가득 잡아뒀다 해도 믿을 판이다.

“……저, 저스틴. 전 정말 이런 거.”

“네. 알고 있습니다, 마님. 굳이 감사하실 필요도 없구요.”

“그게 아니라 누가 사무실에 이런 짓을…….”

“제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언젠가 공작저에 소공녀가 생기신다면 꼭 이런 식으로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요.”

저스틴 특유의 ‘귀 막고 말하기’가 시작됐다.

그가 회한에 찬 얼굴로 외알 안경을 내리고 잠시 숙연해졌다. 벅찬 마음을 이겨내려는 과장된 행동으로 보였지만 정작 아레스는 어느덧 자신의 책상 뒤에 앉아 펜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저스틴, 언제는 또 마님이라더니 지금 와서 소공녀는 무슨 말이에요? 제 나이가 벌써…….”

“정식 혼인 전이시니 뭐가 됐든 어떻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 방에는 누구도 들이지 않을 테니 마음껏 즐기셔도 됩니다.”

“…….”

그 마음껏 즐기는 게 저스틴 한 사람밖에 없잖아요.

알리시아가 손을 내밀어봤자 저스틴은 그 마음 다 안다며 뿌듯하게 잡고만 있었다.

망연자실 이마를 짚는 사이 문은 이미 닫혔다. 어쩌면 운동장에 있던 모든 기사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내공을 지닌 자는 따로 있었는지도 모른다.

“…….”

그녀가 눈을 들었다. 저스틴과 실랑이하는 내내 펜만 놀리고 있던 남자가 어느덧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른스럽게.’

아레스 앞에서는 다시 울컥하거나 이게 뭐냐 방방 뛰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레이디가 되고 싶은 마음은 더욱더 없었지만.

“제가 옮길게요. 원래 주인에게 나가달랄 순 없는 거니까.”

“왜 그래야 하는데?”

“그거야 당연히!”

“어차피 나를 남자로 신경 쓸 것도 아니고, 당신 취향은 따로 있다면서. 그럼 나랑 한 공간에 있는다고 별다른 의미가 있나?”

“……당연히 없죠.”

눈썹을 세운 아레스가 그녀의 대답을 듣고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명쾌한 결론치곤 눈길이 썩 곱지 않다.

“그럼 굳이 내외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당신은 왜 매번 저스틴에게만 아무 소리 못 하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

이번엔 더 할 말이 없다. 둘의 나이를 모두 합친대도 안 되는 사람이 저스틴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는 물론이고 나라 몇 개를 지도에서 말끔히 지워낸 아레스마저 감당하기 힘든 존재인 듯했다.

“난 안 되는 건 포기가 빨라서.”

그게 그런 ‘척’만 하는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렇단 거지.”

“……후유, 그래요. 이제 와서 집무실이 어디든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녀가 터덜터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뒤로 아레스가 의자를 끌어내는 소리가 울렸다.

제게로 걸어오는 것을 아는 그녀가 평소보다 조금 긴장했다. 완벽하게 막힌 한 공간에 둘만 있다는 것이 이렇게 또 다른 분위기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또 왜 그래요?”

“전에 그 계획은 정말 다 끝난 건가?”

“무슨…….”

“어린 폐하에게 남녀관계 하나만큼은 자연스럽고 싶다며.”

“그러려고 했었죠.”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카이가 폭군의 기질을 발휘할 때는 무분별한 여자관계도 분명 존재했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러운 연애감정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는 걸 분명히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그날부로 사라졌다.

남의 마음을 짓밟아놓은 아이한테 무얼 소중히 하라 가르쳐줄 의욕이 남아 있을 리 있나.

“할 만큼 다 해봤잖아요. 상냥하게, 아슬아슬하게, 아름답게. 내가 아는 거 전부 다 해봤는데 이제 생각나는 것도 없어요.”

“……마지막 건.”

“아니, 됐어요. 아무 말 마요.”

알리시아가 복잡한 얼굴로 자신을 잡으려는 그의 손을 물려냈다. 내가 왜 그랬지.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긴 매한가지다.

어차피 돈 받은 만큼 일하기로 했으니 자신도 프로답게 평정심을 찾아야 할 때였다. 그녀가 태연하게 고개를 들고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러니 약혼이건 뭐건 이제 당신 뜻대로 하세요.”

“내 뜻대로?”

“어차피 계약은 계약인걸요.”

“……계약이 아니라면? 달리 생각해둔 상대는 있고?”

“네에?”

“……있어도 그만이야.”

짙은 안개처럼 어두운 혼잣말과 함께 그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졌다. 어색하게 고개를 내린 그녀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닿을 듯 스쳐갔다. 어? 알리시아가 눈을 들자 이미 그는 예의 무심함을 되찾은 뒤였다.

“당신이 여기까지 했다면 그다음부터는 나겠군.”

“뭐가요?”

“폐하 마음을 돌리는 것.”

아직도 그 얘기냐며 흘겨보는 알리시아의 앞에서 아레스가 양손을 깍지 꼈다. 당신은 보고 듣고 믿고 싶은 대로 하라며 간만에 뜻 모를 여유가 흘렀다. 그녀가 정말로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언제는 꼭 그래야만 하냐 그 소리만 하시더니. 이제 와 왜 생각이 바뀐 건데요?”

“이봐, 자문관님. 전쟁 하나를 해도 전략은 수십 번씩 변하는 거라고.”

“이게 전쟁이에요?”

“아닐 것도 없으니까.”

당당하다 못해 내리찍는 듯한 눈빛의 위치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저것도 재주지.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기정사실화시키고 만다.

자신이 저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는 것도 모르고 알리시아가 허탈하게 팔짱을 끼었다.

“각하, 폐하는 제 동생이에요.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 안다구요.”

“그럼 그 반대도 되겠군.”

“…….”

“때로는 모든 것을 아는 조력자 하나가 무지한 백만 대군을 능가하기도 하는 법이라.”

마치 그래야 할 이유만 하나 더 는 것처럼 아레스가 스르륵 턱을 쓸었다. 며칠간의 고뇌가 묻어나는 듯 까끌해진 수염의 흔적이 그를 더욱 야성적으로 보이게 했다.

날 도발하셨겠다, 그새 발을 빼려는 앙큼한 그녀의 꼬리를 지그시 눌러 밟았다.

“그러니 내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당신 역시 후회하지 않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