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좋아해. 널, 연모하고 있어.”

“죄송합니다만, 소저. 듣지 못한 걸로 하겠습니다.”

율은 지금까지 희아와 닿아 있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적 같아 더 바라는 건 사치라고 생각했다. 그걸 알면서도 바라게 된다.

하나, 제 과거가 그녀마저 잡아끌어 어둠에다 처박아버릴까 봐 두려웠다. 자꾸만 밀어내고 모르는 척했다.

연모하고 있지만 자꾸만 어긋나는 시선들. 율과 희아가 서로를 마주 보는 날은 올 수 있을지. 그의 가슴속에 부는 바람은 언제쯤 그칠지.

“당신을 만났기에, 저는 다시 살아가고 싶어졌습니다.”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녀를 위한다는 위선으로 거짓을 읊어, 그녀를 슬프게 해선 안 되었다.

“희아.”

율이 부드럽고 애달프게 그녀를 불렀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 만났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2. 작가 소개

한하연

쓰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다가 지금도 쓰고 있는 평범한 글쓴이.

동화와 귀여운 걸 좋아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면도 있는 그런 사람.

▣ 출간작

그녀는 수학을 배운다(ebook)

엘핀느의 꽃(ebook)

붉은 벨벳 위 하얀 진주 한 알(ebook)

달콤한 말 세 방울(ebook)

푸른 단검과 흰 장미(ebook)

하우스(ebook)

맑은 하늘 푸른 잎새(ebook)

목련화(ebook)

루비아스 마티아스(ebook)

그해 여름, 우리는 이혼했다(ebook)

로맨스는 없다(ebook)

스트로베리 키스

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비밀의 숲(공저)

3. 차례

#5장. 태자비 후보 간택 사건

#6장. 연심은 기침과도 같아 숨길 수 없어

#7장. 덫은 덫으로

#8장. 모든 것의 근원으로

#9장. 바람이 부는 끝에

#종장終章

4. 미리 보기

솨아아, 솨아아.

바람이 불자 버드나무들은 일제히 긴 머리채를 흔들었다. 율은 분명 저기 서 있건만, 희아는 그가 이대로 바람을 타고 사라질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희아는 저도 모르게 발을 서둘렀다.

“오셨습니까.”

바람이 멈췄다. 율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희아도 율을 바라보며 섰다.

내가 마음을 고백했던 사람. 지금도 연모하는 사람. 나를 두 번이나 구해준 사람. 알고 있다 생각했지만, 실은 몰랐던 사람.

그러니 물어야겠다.

“율. 너는 누구야?”

침묵이 흘렀다. 율의 선 고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지만, 헤실헤실 웃을 때와 같은 약한 모습은 없었다.

‘태자가 그랬지, 진명眞名이 맞냐고.’

아니라고 믿고 싶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들. 하지만 눈을 감고 외면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이 찬찬히 입을 뗐다.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믿는다 대답하려 했지만,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지난 10년은, 모두 거짓이었던 거야?”

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율이 어떤 사람이었든, 무엇을 감추고 있든, 희아가 가장 확인하고 싶었던 건 둘의 관계였다. 쌓아온 감정과 시간이 거짓이라면, 그녀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도, 그릴 리도 없다. 평온하다면 평온했던 그 세월이 어찌 거짓일 수 있을까.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은 모두, 소중했다.

신분을 속이고 과거를 속였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없다 말했지만 그렇다고 제 본성을 숨겨가면서까지 그녀를 거짓으로 대한 적 없다. 그녀가 소중해 더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 제가 버린 과거가 그녀의 발목까지 잡아버릴 것 같았기에.

율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

“제 원래 이름은 율이 아닙니다. 저는 과거를 버리며 이름을 바꿨습니다. 몸을 쓰는 일에 어리바리하고 어설프게 굴었던 건, 과거를 붙들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과거에 붙들리고 싶지도 않아서였습니다. 고향을 떠나 멀리 왔지만 보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조금 쓸쓸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는 겁이 났다. 희아가 과거를 숨겨온 그를 미워할까 봐. 그러나 그렇다 하여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여인들에게 물렀던 이유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한 죄책감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본디 다례국의 귀족으로, 아현국 인인 아버지와 혼례를 올렸습니다. 아버지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당신 삶의 의의를 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도록 하는 것이라 정의하셨지요. 그것이 실은…… 당신의 진정한 바람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했다. 어머니의 교육은 나무랄 데 없었다. 그 엄격하고 완벽해 보이는 훈육에 숨겨져 있던 건, 상실을 이겨내고자 하는 집착이었다.

“저는 어머니의 사후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후계싸움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다례국으로 온 건,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고, 제 몸에도 그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여, 제 아버지의 후계가 된 이가 제게 앙심을 품더라도 여기까진 손을 뻗지 못하리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의 사후, 제 아들이 당연히 그림자 황제에 오르리라 생각했건만 새로운 후보가 나타났다. 그 존재가 어머니에겐 커다란 충격이었을 터.

새로운 후보자는, 저만 사랑해왔다 믿었던 남편의 혼외자였다.

돌이켜보면, 그가 실제로 아버지의 자식이었는지, 아니면 외국인이던 제 어머니의 피가 섞인 절 못마땅해하던 이들의 작품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어머니는 그림자 황제였던 아버지의 철저한 보호 아래 있었으나, 그 가진 권한은 많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제 아들을 그림자 황제로 만드는 데 집착했다. 그러면서 제 사랑과 신뢰를 배신한 부군에 대한 애증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믿노라 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일에 대해 조사했고, 그로 인한 괴로움 탓인지 급사했다.

아버지의 혼외자로서 후계구도에 오른 이는, 그림자 황제가 되는 데 불타올랐다. 또한 율을 향한 강렬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제가 사라져버린다면 열망을 채울 것이라, 열등감은 사라지리라 믿었다. 어린아이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율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무것에도 열정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살아간다는 것에까지. 그래서 모든 걸 놓아버렸다.

율에게 자질이 없거나 능력이 모자랐던 건 아니다. 오히려 후보자들 중 월등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저보단, 하고 싶어 열의를 불태우는 사람이 낫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갑자기 부모님을 모두 잃고, 매우 슬펐던 거 같습니다. 상실감을 어찌하지 못하고 막연히 벗어나고 싶다고만 생각하며 그곳을 떠나왔는데, 소저를 납치한 인신매매단에 잡혔습니다. 소저는 태사공께 몸값을 받기 위해, 저는 다른 납치한 아이들과 함께 팔아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무예를 익혀온 터라 저항하고 도망갈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항 정도가 아니라 몰살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꼼짝도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아이 한 명 정도 같이 둔다면 희아가 덜 울리라 생각한 범인들이 그곳에다 절 던져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계속해서 아무것도 않았겠지.

그녀와 만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울고 있던 작은 아이를 다독여주었지만, 실은 제가 위로받았다. 사람의 온기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율은 인신매매단 일당을 제압하고 그 공을 자연스럽게 나이수에게 넘겨주었다. 저희를 찾으러 다녔던 인물들 중, 그가 가장 인간미가 넘쳤으므로 일부러 그를 택했다.

“당신을 만났기에, 저는 다시 살아가고 싶어졌습니다.”

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희아는 조용히 듣고만 있다.

진실을 말해야 했다. 그녀를 위한다는 위선으로 거짓을 읊어, 그녀를 슬프게 해선 안 되었다.

“희아.”

율이 부드럽고 애달프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음성은, 전에 없이 진중했으며 슬프기까지 했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처음 만났었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희아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울 것 같았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눈을 뜨고 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되, 평소와 다른 율이다. 율은 그녀의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일전에는 거절하더니만, 이제 와 고백하다니. 우롱당하는 기분이야.”

율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시선을 올렸다. 감정이 실린 청록빛 눈동자는 감람석 같기도 했고 비취 같기도 했다.

희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청록빛 눈동자에 투영되는 모든 것이 반짝이는 듯 느껴진다. 연정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분명 반짝거리겠지, 희아는 생각했다.

저 아름다운 눈에 떠오른 감정은 오롯이 저를 향한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더 저릿했다.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서로 안전할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다 일련의 사건들 후, 제 마음에 솔직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으며, 제 진심을 전할 기회가 또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희아가 율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율의 얼굴을 양손으로 꽉 잡아 감쌌다. 그리고 제 쪽으로 당기며 입을 뗐다.

“잘못했지?”

“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내게 숨기는 것이 있어선 안 돼.”

“네.”

“아직 용서한 거 아니야.”

“네.”

율이 순순히 답했다. 희아가 그를 바라보더니, 그의 얼굴을 더 바짝 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우수수, 버드나무 잎이 다시 물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