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깼어?”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청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 그늘진 공간에 놓인 바로크 풍의 의자에 앉은 남자가 미칠 것 같게도 아직도 정민과 닮아 있어 청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세월이 흘러 그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열여덟의 그때보다 나이를 먹었고, 그때의 예쁘기만 했던 모습이 이제는 성인 남자로 바뀌어 있었다.
“너…… 정민이?”
“그래.”
그가 빙긋 웃었다. 그러나 입매는 말려 올라가되 눈은 웃지 않는 싸늘한 조소와도 같은 미소였다. 천천히 앞이 흐릿해졌다. 정민의 얼굴과 주위 배경이 마치 물감을 섞어 놓은 것처럼 경계가 무뎌지면서 온통 뒤섞였다. 결국 다시 청아의 의식이 흐려졌다. 아마 바랐을 것이다. 이 지독한 꿈에서 깨어나면 분명히 정민의 환영이 사라져 있지 않을까.
정적.
청아는 다시 기절하고 정민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는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제시간에 맞춰 똑딱똑딱 움직이는 초침뿐이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한 시간이 흘렀는지, 혹은 두 시간이거나…… 청아의 몸이 다시 움찔하더니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는 제멋대로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 집에서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두 번 기절을 하고 두 번 눈을 떴다. 지독한 악몽의 연속이다. 도대체 언제쯤 이 꿈에서 깨는 것일까. 그녀는 쿵쿵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와들와들 떨리는 팔로 침대를 짚고 일어나 앉았다.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직도 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것을 돌아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아직 정민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왜…….”
청아는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흔들려 버린 눈동자가 정지한 그곳에 정민이 마치 새겨진 듯 앉아 있었다.
“기절하지 마. 또 하면 세 번째야.”
청아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꼬박 13년이다. 뇌 속에 제거할 수 없는 파편이 박힌 채 13년이 흘러갔다. 그러나 정민은 마치 어제 만났다가 헤어졌던 사람처럼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의자에 앉아 한쪽 턱을 괴고 앉은 그는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기묘하게도 그 눈에 돌고 있는 빛은 반가움도 놀라움도 아닌, 그저 한기였다. 까만 머리카락, 너무 까매서 깊은 바다 속처럼 짙푸른 빛이 느껴지는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가리고 있어 그나마 그 눈동자마저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그늘진 얼굴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오만한 콧날과 윤곽이 진한 입술뿐이었다. 감정이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는 그 얼굴에 담긴 것은 섬뜩한 한가로움, 그리고 간간이 느껴지는 냉기.
대체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난 지금 널 다시 만났다는 게 이렇게 놀라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넌 왜 그런 얼굴로 차가운 눈을 하고 있는 거야?
“서정민, 너 맞아?”
“대답하면 또 기절할 거냐?”
“난…….”

미디어 리뷰가 없습니다.

별점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