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그는 그녀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었다.

어깨에 짊어진 국가라는 거대한 산.

두 손에 가득 들어찬 백성.

그와 그녀는 근본적으로 짊어진 게 닮았다.

“당신도 원하지? 내가 함께 가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원하잖아. 하지만 확신이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 내가 가면 당신이 또 어떻게 변할지. 당신은 국가를 책임지는 국왕인데 나 때문에 흔들릴까 봐.”

당신에게선 내가 갈 수 있었던 또 다른 길을 볼 수 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마음에 둔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처음 그랬던 것처럼.”

당신과 함께 있으면 마치 내가 그 길을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2. 작가 소개

주연

트위터 @doutormocha

3. 차례

2부. Seas set free

#Chapter 3

3부. Rule the world

#Chapter 1

4. 미리 보기

“폐하.”

바스티안이 일으킨 기척에 에르완이 먼저 알은척했다. 그는 계단 아래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어 시계탑에 와보았더니 역시 비올라를 챙겨주고 있다.

삐이익. 전쟁통에 가까워진 비올라가 울음소리로 아는 체했다. 시계탑 한 바퀴를 크게 도는 묘기도 선보였지만, 녀석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단정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격식은 차리되 움직이기 편한 차림이었다.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무겁게 올라가자 그녀가 내려오려 했다. 바스티안이 손을 저었다.

“아니, 오지 마.”

“…….”

“내가 당신 곁으로 가고 싶어.”

텅, 텅. 다리가 통나무처럼 무겁다. 움직이긴 힘겹더라도 그는 지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뛰어가지 않겠다. 서두르지 않겠다. 급해지는 마음을 꾹 내리누르며, 둘뿐인 공간을 음미했다. 잘리어의 햇살이 그녀에게 맺히는 순간은 그 어떤 절경보다 아름답다. 환하다. 달콤하다.

그는 마침내 그녀 앞에 닿았다. 신사적으로 자리를 권했다. 시계탑 꼭대기에 앉을 만한 데라고는 돌벽에 난 창뿐이라, 애매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았다. 둘 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비올라가 시계탑을 빙글빙글 돌며 묘기를 선보이다 바스티안을 툭툭 쪼았으나 시선 한 점 가지 않았다. 거의 강제적인 집중이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니, 아파. 그것도 엄청 아파. 에셀레드 경이랑 부딪치고 바다에 떨어지면서 온몸이 부서진 것 같아. 여기도 겨우겨우 온 거야.”

“그럼 더 누워 계시지 그러셨습니까?”

“당신 곁에 있어야 안 아플 것 같았거든. 있잖아, 나 진짜 당신한테 검술이라도 정식으로 배울까 봐. 이번에 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

“…….”

“…….”

“저기.”

“죄송합니다.”

더럽게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의외의 말이 돌아왔다. 당신이 뭐가 죄송하냐는 바스티안의 눈빛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외스타슈에 계신 폐하를 일주일이나 방치해서 죄송합니다. 탐색할 때 그곳을 배제한 건 아니었으나 가능성이 작다 여겼습니다. 늦게 찾은 만큼 위험에 처하게 했습니다. 제 불찰이 큽니다.”

“당신이 왜 미안해해? 당신은 결국 나를 찾아냈고, 그 덕에 내가 버틸 수 있었는데.”

“…….”

“하하. 우리 헤어질 때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는데, 정작 만나니 할 말이 없네.”

“처리하셔야 할 일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응. 반란군에 대한 게 골치가 좀 아프네.”

바스티안이 나른하게 창가에 기대며 너른 해협으로 시선을 던졌다. 흐릿하지만 외스타슈도 보였다. 포격과 비명으로 가득했던 그곳은 놀라울 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특히 반란군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가 고민이야.”

그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살바토레가 너무나 의외였지. 그냥 건방진 달변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인재를 배치하고 활용하는 법을 아는 인간이더라고. 의외의 순간에 저들의 목숨까지 내놓았어. 자기를 믿고 따라준 사람들, 그리고 무고한 잘리어 백성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고 말이야. 생각보다 정의로웠고 생각보다 쓸 만했어. 꼭 처형만이 답일까?”

“그건 제가 대답할 사안이 아닌 것 같군요.”

“대답해줘. 당신은 지혜롭잖아.”

“잘리어는 폐하께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외스타슈 방벽 안에서 직접 그들을 보고 듣고 느낀 것도 폐하십니다. 저는 그런 폐하께서 내리실 결단을 지지할 겁니다. 구태여 제 의견을 보태어 심기를 어지럽히기 싫습니다.”

“하, 갑자기 부담이 확 되는데.”

부담 하나 없는 얼굴로 바스티안이 픽 웃었다.

“그리고 당신 문제도 있지. 부르군트 말이야.”

“…….”

“우리가 이번 개입을 꼬투리 잡더라도 그들은 발루아와의 전쟁을 그만두려 하진 않겠지?”

“부르군트에게 전쟁명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명분이 존재하지 않는 싸움터로 변해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직접 군함을 끌고 잘리어에 온 행태로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그들은 그저 군림할 뿐입니다. 전쟁이 바로 그들이 내뱉는 언어입니다. 세상이 제 발 아래에 있으니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 또한 중요하지 않은 겁니다.”

“전쟁은 계속된다, 이런 말이군. 리산더 같은 자가 장교인 것만 보아도 부르군트가 어떤 나라인지 뻔하긴 하지만.”

에르완은 떠나가는 군함 위에 서 있던 리산더를 기억해냈다. 전신을 붉게 물들인 핏물이 어색하지 않은 자였다. 독기가 깊이 고인 눈. 스스로를 학살하고 싶어 하는 분기를 읽었다.

리산더를 움직이는 건 오로지 잔인한 승부욕이다. 그에 이끌려 군대를 버리고 에르완을 찾아왔고, 그에 기반해 검을 휘둘렀다. 그가 무너뜨리려 한 것은 에르완의 강함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이상, 숭고함, 우아함. 모든 것이 부서지고 재만 남은 왕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에게 패배란 곧 죽음이다. 수치스러운 삶 따위 당장 죽어도 받지 않을 짐승이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간을 가장 경멸하던 그였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그가 택한 것은 삶이었다. 극적인 부활이었지만 그에게는 패배자의 비겁한 도주일 뿐이었다.

군함 난간에 서서 끝까지 그녀를 응시하던 리산더를 에셀레드는 그저 미친놈이라고 했지만, 에르완에게는 조금 달리 보였다. 너무나 수치스러워 이 나라에서 죽어 없어지고 싶은데, 조국 때문에 죽을 수는 없는 갈등 속에 있었다. 스스로를 가장 강한 왕좌에 앉혀두던 그다. 고고한 짐승의 자존심으로 그 굴욕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돌아가는 뱃길에 바다로 뛰어들어도 전혀 이상치 않을 터다.

「당신을 무너뜨리고 싶습니다.」

「폐하 같은 이상주의자는 처음입니다. 폐하가 쓰는 전술, 정책…… 그것들을 보면 볼수록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시는지요. 그 숭고함이 무너졌을 때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얼마나 치가 떨리게 처절할지 무척 궁금하고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단 말입니다. 반드시.」

검을 맞댄 채 끓어오르던 투지.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이 투구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와 검을 맞대는 순간순간이 생사를 넘나드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단 한 번도 쉽게 검을 내고 맞받아치지 못했다. 시어도어 협곡에서의 이야기를 들을 때엔, 어쩔 수 없는 노여움에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

서로의 심장에 닿아야 멈출 칼날이다.

리산더와는 다시 마주할 것이다. 보르본과 함께 당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무장한 채 나타날 터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큰 전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혼자 강해서는 승리가 불가능한, 거대한 전투를.

피로가 갑자기 몰려왔다. 목이 뻐근하고 머리가 핑 돌았다. 요 근래 하루에 한 시간 이상 잔 적이 없는 탓인지 눈이 침침했다. 아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한 달 이상씩 거뜬히 버티기도 했으니 잠이 부족해서는 아닐 거다. 그렇다면 당최 무엇 때문인지…….

“리산더는 정말 미친놈이었지. 사실 내가 그 방벽 안에서 그놈 눈에 띌까 봐 기어다녔다니까. 아무리 왕이라도 거기선 장사 없더라고, 하하. 그런데 그런 놈이랑 맞붙었다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냐고. 에르완, 당신 듣고 있어?”

아무리 떠들어대도 대답 하나 돌아오지 않아 바스티안이 말을 멈추었다. 슬쩍 돌아봤더니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설마 자는…… 건가?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멈추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에르완이 이런 곳에서 갑자기 잠이 들다니. 그녀가 얼마나 철저한 인간인지 잘 알면서.

“에르완? 내 말 좀…….”

조심스레 톡 건드린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몸이 느릿하게, 천천히 기울어지는 모습을 눈도 깜박하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툭. 그는 거의 넋을 잃은 채, 제 무릎 위에서 잠든 에르완을 응시했다. 곱게 감긴 눈, 그림자를 드리운 기다란 속눈썹과 단단히 올려 묶은 머리 사이 삐져나온 백금색 머리카락,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편안한 숨. 그 궤적에 눈이 홀렸다. 자연스레 옮겨갔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길게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쓰다듬어보고 싶은 마음은 남아도는데 그 끝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눈 한 자락 내리지 않았는데 새하얗게 얼어버린 것 같다.

조심스레 어깨를 잡았다. 문득 그녀가 고되어 보였다. 많은 것이 얹힌 어깨가 버거워 보였다. 가슴이 쓸린 듯 안쓰럽기만 하다. 지금은 밤의 신이 그녀를 깊은 안식 속으로 끌고 들어갔길. 간절히 빌면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듣지 못하더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혹여 잠결에 들을까, 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

이 말을 당신에게 직접 하게 해주어 고맙다.

“마지막 인사 안 하고 가면 나 쫓아간다. 이건 진심이야.”